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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년 7월 6일, 얀 후스(Jan Hus, c. 1369–1415)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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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6일 “후스, 나의 적들에게 자비를 내려 주소서.”

오늘은 얀 후스(Jan Hus, c. 1369–1415)가 순교한 날입니다. 1415년 7월 6일, 후스는 불 속에서 별세하였습니다. 보헤미아 왕국의 후시네쯔(Husinec)에서 출생한 후스는 위클리프를 통해 종교개혁 사상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후스는 종교개혁의 샛별이라 불리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변호했고, 프라하대학에서 철학과 학장과 총장직을 수행하면서 체코말로 설교하고 저술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교회의 세속화를 비판하던 그는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했으나 계속해서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던 중 콘스탄츠 공의회에 출두하게 됩니다. 지기스문트 황제는 신변을 보호했으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체포되어 고문당한 후 쇠사슬에 묶인 채 정죄 받은 후스의 머리에는 마귀의 그림과 ‘이단들의 주모자’라는 글귀가 적힌 종이모자가 씌워졌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면류관을 생각했고, 조금도 이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몸에는 일단 사제들의 제복이 입혀졌다가 관리들의 손에 의해 찢겨졌다. 그의 머리는 삭발되고 성직자의 상징인 통쇼(tonsure)가 있던 곳에는 악마들의 그림으로 가득찬 종이관이 씌워졌다. 그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길가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고 있는 자기의 저술들을 볼 수 있었다. 그가 기둥에 묶였을 때, 이들은 그에게 그의 견해를 철회할 마지막 기회를 주었으나 그는 이를 다시 거부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였다. “주 예수님, 당신을 위하여 이처럼 잔인한 죽음을 아무런 불평 없이 감당합니다. 부디 나의 적들에게 자비를 내려 주소서.” 그가 죽는 순간까지 시편을 낭송하는 것을 주위 사람들은 들을 수 있었다.[Justo L. Gonzalez, The Story of Christianity, 서영일 역, 『중세교회사』 (서울: 은성, 2007), 212.]

거위를 키우는 마을에서 태어난 거위 - 체코어로 ‘후스’는 거위를 뜻함 – 는 화형대 위에서 예언하듯 말했습니다. 한 세기 후에 굽지도, 끓이지도 못할 백조가 일어날 것이라고. 후스가 죽은 지 100여년 후에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고, 이는 종교개혁의 불씨를 유럽전역으로 퍼뜨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담대하게 앞날을 내다본 개혁자의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마지막 순간, 원수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그 마음이 내게도 있기를 소원합니다.

후스는 점점 커지는 압력 때문에 1412년에 프라하를 떠났다. 그 후 2년간 그는 보헤미아 남부에서 소귀족들의 보호를 받으며 지냈다……많은 편지와 함께 위클리프의 책을 옹호하는 글을 썼다……1413년에 그는 대표작 ≪교회론≫을 썼다. ≪교회론≫은 교회를 ‘구원을 예정 받은 자들의 모임’으로 설명했다. 그 모임의 무리는 품행을 통해 식별 가능하다는……주장은 위클리프의 견해를 그대로 대변한 것이었다…후스는…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며, 교황이 아닌 성서가 그리스도인의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는 교황의 명령이 그리스도의 법에 일치할 때만 교황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빗나간 교황에 대항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라며, 그는 교황의 잘못에 대해 단호하게 항거할 것을 천명했다.[이동희, 『역사를 바꾼 종교개혁가들』 (서울: 지식의 숲, 2013), 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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