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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년 7월 12일,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 1466–1536)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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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 “에라스무스, 성경에서 읽는 것이 영감된 진리라는 사실을 부여잡으십시오.”

오늘은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 1466–1536)가 별세한 날입니다. 1536년 7월 12일, 에라스무스는 바젤(Basel)에서 이질로 인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로마가톨릭교회에 충실했지만 마지막 성례를 받지 않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감았습니다. 어거스틴 수도회의 사제였던 에라스무스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인문주의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성경과 초대교부들의 작품에 눈을 뜨고 난 후 『그리스도인 병사 지침서』(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와 『우신예찬』(Encomium Moriae)을 저술하여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1503년에 출판한 『엔키리디온』의 일부를 살펴봅시다.

믿음이 그리스도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기에, 첫 번째 규칙은 가능한 한 그분과 그의 성령에 관한 것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성경을 의존하는 것입니다……온 맘을 다하여, 다음과 같은 믿음을 가지십시오. 즉, 당신의 구원에 속하지 않는 것은 성경에 조금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성경에서 읽는 것이 영감된 진리라는 사실을 부여잡으십시오……예언자들이 그것을 알렸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그것을 증거했습니다. 시대마다 경건한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동의했습니다. 육체와 말씀으로 그리스도 자신이 그것을 전달했고 그의 덕행으로 그것을 표현했습니다……그리스도에 관한 놀라운 일들이 선지자들의 말씀을 통해 얼마나 많이 예언되었습니까?[박건택 편역, 『종교개혁사상선집』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2001), 10-11.]

에라스무스는 교부들의 작품을 번역 및 편집했을 뿐 아니라 1516년에는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종교개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지만 에라스무스는 루터와의 자유의지(자유선택) 논쟁 후 개혁자들과 결별하고 맙니다. 결국 북부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학자는 로마가톨릭과 종교개혁 진영 중 어느 한 편에도 속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자유의지 논쟁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일상적인 선택이 아닌 구원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에라스무스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광대한 행위를 강조했지만, 미미한 정도이기는 해도 인간이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루터는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을 저술하여 믿음과 선택 역시 하나님의 선물임을 역설했습니다. 위대한 인문주의자가 원문으로 돌아가 개혁의 터를 닦아준 그 공헌을 잊지 맙시다. 우리 역시 얼마든지 오류를 범할 수 있는 나약한 피조물임을 인정합시다. 또한 역사를 통해 부지런히 배워서, 동일한 오류에 빠지지 맙시다.

에라스무스는……《자유의지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인간의 눈은 비록 건강하다 해도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는 눈을 다른 쪽으로 향하게 하여, 자신이 볼 수도 있었던 것을 그만 볼 수도 있다……눈이 죄 앞에서 항상 건강했다 할지라도, 죄를 통해 눈은 망가진다. 여기 있는 한 사람, 볼 수 있는 이 사람이 감히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가 의도적으로 눈을 감거나 돌릴 때, 자신의 것으로 여길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이러한 관련 하에서 우리는 자유의지를 인간 의지의 능력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능력을 갖고 인간의 영생의 행복으로 이끄는 그 어떤 것에게로 향하기도 하고 아니면 그것을 저버리기도 한다.”[Veit-Jakobus Dieterich, Martin Luther: Sein Leben und seine Zeit, 이미선 역, 『누구나 아는 루터 아무도 모르는 루터』 (서울: 홍성사, 2012), 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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