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창세기 18:10-12)
세 사람이 아브라함을 방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현현(顯現, Theophany)하셨고, 두 천사도 동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들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내가 내년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라는 이 이야기를 장막 문에서 듣고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겐 출산의 소망이 다 끊어졌다고 믿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출생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사라는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신의 나이라는 처지가 더 커 보이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웃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주님께서 하신 구체적인 약속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지’를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믿지 않는 불신앙을 꾸짖으십니다. 주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것은 그 속성을 고려해볼 때, 엄청난 배교를 저지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창세기 18:13-15)
우리는 사라와 다르지 않습니다. 믿는다 하면서 의심하고, 하나님께서 명백히 죄를 지적하시면 핑계를 대서라도 빠져나가려 합니다. 창세기 17장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이 웃었고, 지금은 사라가 웃었습니다. 신자는 모두 과정 중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가 더 잘났느니 못났느니 비교하는 못난 짓은 하지 맙시다.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고, 후손에게 복을 빌어주는 데까지 이르기 위해 많은 훈련의 과정을 거쳤음을 기억하십시오. 아브라함 역시 신자로서 다듬어져 가고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빚으시려는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십시오. 서로를 위한 비방을 멈추고, 나의 죄를 시인하십시오. 그때 참된 영적 성숙이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창세기 18:32)
비틀거렸던 아브라함은 악한 성 소돔을 위해 기도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는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분명 성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으셨기에, 아브라함은 심판 앞에 놓인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으로 성숙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롯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회개를 거부한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위해 주님께 탄원합니다. 친구여,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반드시 이러한 기도가 나타나야 합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까? 죽으셨으나 부활하신 예수께서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자답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죄악 속에 감각 없이 살아가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당신을 오래 참아주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탄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