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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되지 않은 이야기 [슐라이어마허, 바르트, 구티에레즈] 로저 올슨 저 [Friedrich Schleiermacher, Karl Barth] 하룻밤에 정리하는 신학의 역사 제5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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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년~1834년)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허 또는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에르마허 (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년 11월 21일 - 1834년 2월 12일)는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이며 철학자이다. 그는 계몽주의, 경건주의, 그리고 낭만주의의 영향을 통해 현대 자유주의 신학를 탄생시켰다. 그는 또한 보편 해석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개신교 정통주의에서 주장한 성서영감설에 따른 성경 본문의 의도를 파악하는 신학이 아니라 신앙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직관과 감정을 근거한 신학 방법론을 구축하였다. 그의 신학 접근법과 방법론이 현대 기독교 사상에 끼친 그의 깊은 영향력 때문에, 그를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보기도 하며, 또한 개신교 신학을 슐라이어마허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며,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를 극복한 개신교 근대 신학의 문을 열었다고 본다. 칼 바르트로 대표되는 20세기의 신정통주의 운동은, 그의 영향력을 넘어서기 위한 여러 방식의 시도 중 하나이었다. 실레시아에 있는 브레슬라우에서,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 칼뱅주의 개신교)에 소속된 프로이센 군목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레 근처의 바비와 루사티아 북부의 니에스키에 있는, 모라비안 학교에서 교육 받았다. 그러나 경건주의성격의 모라비안 신학은 날로 늘어만가는 그의 회의를 해소시키지 못했고, 그의 아버지는 마지못해서 그에게 할레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당시 할레 대학교는 이미 경건주의를 포기했고,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볼프(Friedrich August Wolf)와 요한 잘로모 젬러(Johann Salomo Semler)의 이성적인 정신을 채택하였다. 신학생으로서 슐라이어마허는 교과과정과는 별도로 나름의 책읽기에 전념했으며 구약성서와 중동 지역의 언어에 대한 공부를 무시했었다. 그러나 제믈러의 강의에 참석하면서 신약성서에 대한 역사비평 을 공부하게 되었고, 요한 아우구스투스 에버하르트의 강의를 통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96년 독일 루터교 목사가 되어 베를린으로 옮겨 갔으며, 그곳에서 철학자 슐레겔 등 낭만파 학자와 문학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종교론》에서 종교의 본질은 행위도 이성도 아닌 감정이라고 주장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독일 민족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설교로 루터 이후 최대의 설교자로 알려졌다. 베를린 대학교 설립에 참여했으며, 베를린대학교 신학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종교 체계 “나는 슐라이어마허의 낭만주의 신학을 일생동안 진지하게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그의 신학을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밝히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 칼 바르트” 슐라이어마허는 근대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작품은 《종교론》(1799년, 기독교 변증서)과 《신앙론》(1821/22; 2판: 1830/31)이다. 우선 그의 《종교론》에서 근대신학이 정초해 놓은 새로운 방향정위를 살펴볼 수 있다. 20세기의 새로운 신학적 사상들은 슐라이어마허와 비판 대화를 시도했으며,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오늘날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적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을 “주체”로 생각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여기서 주체(subjectum)은 모든 것을 지탱하는 근원을 뜻한다. '주체'로서의 인간은 모든 삶과 사유의 중심이면서, 모든 것은 바로 그 자신에 의해 이끌어져야 한다. 따라서 주체로서 인간에게 종교란 외부의 어떤 힘에 굴복하거나 순복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는 교리를 중요시하는 정통주의와 결별한다. 이로써 그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가 된다. 슐라이어마허는 당시의 철학적 사상을 수용한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사유를 요약하는 '자연과 함께 하는 하나님'(deus sive natura, 데우스 시베 나투라)를 그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는 ‘신’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우주’에 대해 말한다. 또한 그는 ‘세계정신’, ‘인간성’, ‘역사발전’과 같은 당시의 정신사의 보편 기반을 확보하고 있던 개념들을 수용한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는 단지 시대의 아들만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의 개념들과 정신사 작업들을 수용하면서도 그들이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이로써 슐라이어마허에게서 시작되는 근대신학은 근대정신을 수용, 비판하는 신학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인간의 종교 체험과 감정으로 생각하였으며, 기독교의 전통 교리와 신앙고백(Creeds)를 절대시하지 않았다. 신학보다 인간의 종교 체험과 감정을 더 우선시한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주요 특징중 하나이기도 하다. 해석학 근대에 ‘보편적 해석학’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단연 중심인물로 거론되는 사람이 슐라이어마허이다. 해석학의 역사에서 특히 슐라이어마허의 보편 해석학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전의 신학적 해석학이나 문헌학적 해석학과 같은 해석학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좀 더 보편적인 지반에서 해석과 이해의 문제를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필론,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루터에 이르기까지 성서 해석학의 방법으로 널리 활용되었던 비유적인 해석 방식에 슐라이어마허는 회의를 품게 되었다. 비유적 해석은 텍스트의 본래적 의미 이외에 비본래적 의미를 받아들이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것이다. 만인을 위해 쓰인 성서를 더 이상 신앙과 은총이 아니라 문법적이고 심리적으로 해석할 필요성을 절감한 슐라이어마허는 이전의 전통과 동시대인들과의 활발한 지적 교류를 통하여 해석학과 비판의 체계를 수립하게 된다. 빌헬름 딜타이는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을 연구하여 다음과 같이 적었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해석은 하나의 구성 과정이다. 구성은 규칙(Regeln)을 잘 적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해석자의 재능(Talent)에도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해석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문법적 해석이다. 이것은 저자의 언어 영역권 안에서 텍스트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과 단어의 의미는 전체적인 문맥(Kontext)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배후에 깔고 있다. 텍스트의 해석에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 또한 중요하다. 심리적 해석은 저자의 기본 생각과 본래 의도에 비추어 텍스트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요청이다. 저자에게서 우리는 자아, 품위, 자율, 자유, 자발성과 같은 심리적인 근원을 발견할 수 있다. 해석자의 예감(Divination)은 해석자의 근원을 추적하기 위한 방법으로 저자의 심리적 상태 파악은 물론 저자의 전체적 저술에 비추어 하나의 작품을 통찰함으로써 이해를 촉진시킬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저자가 자기 스스로를 이해한 것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러한 근거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 I. 첫째 강연 : 종교변증론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변증론에서 자신이 종교에 대해 말하게 된 것은 내적 필연성이며 신적인 사명이라고 밝힌다. 신은 모든 시대에 걸쳐 자신의 뜻과 역사의 대변자로 중보자(전달자)를 보내는데, 종교와 연관하여 이러한 전달자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그는 이 문제를 영국과 프랑스가 아닌 독일에서 제기하는 이유로, 독일민족만이 성스러움의 감각을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여기서 독일민족에 대한 그의 자부심과 사명감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슐라이어마허는 종교가 인간성의 어떤 소질에서 유래하며, 그것이 어떻게 독일 교양인들에게 최고의 것이며 가장 진귀한 것에 속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목적을 두고 강연함을 밝힌다. 우선 종교를 멸시하는 이들의 종교에 대한 아프리오이한(a prioi, 선험적) 개념의 실체를 밝힌다. 즉 종교를 멸시하는 이들은 영원한 존재에 대한 경외와 다른 세계에 대한 믿음을 모든 종교의 주축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경외와 믿음이라는 것이 인간속성의 산물이며 시대와 역사의 산물이라고 규정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종교의 개념은 인간의 정신적 현상이며, 그 중심에 놓인 것들은 도저히 종교라 불릴 수 없을 정도로 종교에는 전적으로 이종적인 것이라 주장한다. 이에 대해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의 전체, 즉 종교의 체계 또는 종교 개념 그 자체로부터 출발하지 말고, 개별자로부터 시작할 것을 주장한다. 신학체계와 종말론에 대한 논쟁은 냉철한 논증으로 귀결되며, 천박한 강단 논쟁을 야기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에서는 종교를 발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종교가 존재하고 작용하고 있는 곳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자극하며 영혼의 모든 활동을 통해서 무한자를 직관하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즉 종교에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며, 이것은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경험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슐라이어마허는 전체로서의 종교를 개념적으로 논하는 이들에게 개별자의 자리 곧 개인적인 종교체험의 자리로 내려올 것을 요청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철학을 일례로 들어 설명한다.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을 형성한 이들이 자신이 발견한 것을 전달하는 순간 그들의 철학체계는 부서지고 깨어진다고 말한다. 즉 정신이나 영은 대학에 가르치는 것을 통해서 온전히 전달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다른 이들의 사상을 추종하고 그들이 구성해 놓은 것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사상의 정신(Geist der Sache)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상의 정신은 오로지 그 정신을 발견한 사람만이 소유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철학보다 체계적인 것에 덜 기우는 종교에서 두드러진다. 이에 슐라이어마허는 그들이 종교라 부르는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신에게 감동된 사람들의 모든 말과 고결한 행위 가운데서 발견되는 개인적인 암시와 감정들에 집중할 것 요청한다. 한편 종교변증론의 마지막에서 슐라이어마허는 법과 도덕을 종교와 구별한다. 그는 법과 국가를 종교와 구별함으로써, 종교와 정치를 분리한다. 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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