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본카테고리

누가복음 1-24장 [쉬운성경] Book of Luke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Son of Man came to seek and to save

반응형

예수와 당시의 정치지배자들 1. 예수와 헤롯 안디바 당시 로마는 일상적 행정에 따른 상당한 책임과 권한을 예루살렘의 의회(산헤드린)에 위임하였기 때문에 의회의 중진이었던 대제사장들은 상당한 정치적 권한을 소유했었다. 그러나 헤롯 안디바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한 마디로 경멸적이며 결코 그와 타협하지 않는다. 그를 '여우'라고 칭하므로써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2. 예수와 대제사장들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결한 사람들이 대제사장이며, 시간이 갈수록 그들이 예수에게 더 위협적인 세력임을 누가는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예수는 성전정화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대제사장들에게 항의한다. 이것을 누가는 암시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예수는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변 않고 다시 되물음으로써 그들을 당황케한다. 그리고 누가는 바로 다음에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위치시킴으로써 대제사장들의 무책임과 살인성을 통렬히 공박한다. 이것으로 보아 예수는 대제사장들의 바램과 정책들이 자신의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는 알 수 있다. 3. 예수와 로마식의 관행 우리가 로마식의 관행이라고 할 때 그것은 힘에 의한 지배를 뜻한다. 로마제국의 존재의 근본 전제는 힘이었다. 로마는 피지배지의 많은 기존의 제도를 인정해 주면서도 그들의 관행을 도입 유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한 것이며, 유대지방의 통치에도 역시 그러하였다. 예수는 여기에 대해 전혀 다른 행위를 보여준다. 예수는 여성의 새로운 지위 부여 등, 당시의 로마 세력에 의한 억압적 구조와 제도에 상치되는 일을 하신 것이다. 4. 세금과 로마의 관리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구절로 유명한 세금 문제는 해석이 분분하다. 다양한 해석중에서도 일치하는 점은 예수께서 인간의 활동을 세속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으로 이분화시켰다는 가정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가이사에게는 세금을 바치고 하나님께는 성전세를 바치라고 권고하신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의 것에 견주어 어느 정도 강하게 인간의 영역으로서 로마체제를 지지했는가라는데는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 카시디는 그러나 예수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인간의 정치질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보다 큰 창조 질서 가운데 한 부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라.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바라심이 정당하게 무시될 수 있는 영역은 없다. 이러한 해석이야말로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당시 사회적 관행과 여러 정치적 지배 세력에 대한 자세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카시디는 주장한다. 그러므로 로마의 정책과 관행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회형태의 기준 아래서 평가되어야 하고 거기에 대응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이방인들의 왕들이 하는 강제로 다스리는 관행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예수는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핀데로 섬김과 겸손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예수는 이렇게 하여 모든 로마관리들까지도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결과도 예수는 예상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는 잡혀서 박해를 당하고 회당에 끌려가 마침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며 나 때문에 임금들과 총독들 앞에 서게 될 것이다." 5. 예수의 입장에 대한 展望 이상에서 살핀 예수의 사회적 태도과 관행은 로마 체제의 관행과 상치되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예수는 로마체제를 신성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로마의 질서를 감독하는 관리들에게 존경심을 보이지 않으며, 그들이 헤롯 안디바 급이든 또는 예루살렘 대제사장 급이든 심지어 더 높은 격인 백성의 은인이든간에 예수는 그들을 거리낌없이 비판하셨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로마인들과 그들의 결탁 세력들이 굳게 지켰던 사회적 제도와 관행에도 복종하지 않으셨다. V. 예수의 재판과 죽음 1. 예수의 체포와 산헤드린에서의 청문 고소인은 대제사장들과 그들의 결탁세력들이다. 이 소환사건에 대한 누가의 기록은 마태와 마가의 것과 다르다. 마태, 마가에서의 죄목은 예수가 성전을 파괴한 후 다시 짓겠다고 큰 소리친 것에 대한 것임에 비해 누가에서의 죄목은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어쨋든 의회의원들의 질문에 예수의 대답은 간결하면서 애매하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너희가 말하였다." 2. 빌라도 앞에 선 예수 의회의원들에 의해 빌라도 앞에 선 예수는 그들에 의해 또 고발당하는데, 죄목의 특성을 살펴보면 예수가 열심당과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는 것과, 세금 납부의 거부와, '그리스도'라고 사칭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의 행태를 그것들과는 어긋나게 서술한다. 즉 예수는 로마의 지배에 무력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열심당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세금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한 적이 없으며, 겸손과 섬김에 입각한 사회 구조와 관행을 내세웠을뿐 기존의 정부형태에 대해서 어떤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3. 헤롯 안디바의 심문 판결에 곤란을 느낀 빌라도는 헤롯 안디바에게 예수를 넘긴다. 그러나 누가는 그러한 처리 상황에 대한 공식적인 로마의 태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 않다. 어쨌든, 처음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헤롯의 태도에 예수는 협조하지 않고 심문에 불응한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끈질지게 예수를 고발하여 다시 빌라도에게로 예수는 이송된다. 4. 빌라도 앞에 다시 선 예수 23장 13-16절에 의하면 누가의 입장은 분명하다. 빌라도의 무죄 선언은 철저하다. 헤롯도 똑 같은 판단을 한다. 빌라도는 헤롯을 여전히 로마의 동맹자로 보며, 로마의 이익을 옳게 판단할 줄 아는 유능한 동맹자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23장 18-23절에 의하여 학자들은 소위 '정치적 변증론'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다시말해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그토록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으로 부각시킴으로써, 누가는 로마 제국이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무서워할 아무 까닭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카시디는 대제사장들과 그들의 결탁자들이 예수의 마지막 운명의 죽음에 대한 1차적 책임이 있다는 점을 오해의 여지없이 분명하게 밝히려는 것이라고 본다. 누가의 설명에서는 예수를 죽이는 일에 대제사장들과 그들의 결탁자들이 행한 역할에 견줄 만한 사람이나 집단의 역할은 없다. 누가는 예수를 죽인 자들이 대제사장들과 그들의 결탁자들임을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유대인을 도매금으로 예수의 죽음에 관련되었다는 식으로 추리하지는 않을 뿐만 아니라, 도대체 대제사장들이 유대인 전체 인구를 대표하는 자들이라는 식으로도 추리하지 않는다. 어쨋든 누가가 대제사장들과 그 결탁 세력 이외에 어떤 다른 유대인 집단에게 책임을 돌린다고 볼수는 없다. 5. 예수의 십자가 처형 누가는 비록 로마 군인들이 예수를 처형했지만 대제사장들과 그 결탁자들의 책임을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그들의 책임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누가는 처형 현장에서 로마의 백인대장의 고백을 서술하고, 아리마대의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결국 누가의 정열적인 설명은 로마가 예수의 처형을 집행했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압력을 넣고 설득하여 그들의 목적 실현에 이용하려 했던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빌라도는 마침내 그들의 의도에 굴복하고만 것이다. 6. 재판에서 예수의 반응 재판에 대한 예수의 응답에서 우리는 어떤 일반적인 형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마디로 하면 누가복음에서 보여지는 예수는 원칙상 충성심을 보여야 할 정치적 권세에 대해서 실제로 아무런 존경심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눈여겨 보면 예수께서 내세웠던 자세 및 구조와 예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강조했던 자세 및 구조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누가는 섬김과 겸손에 기초해서 새로운 사회 관계를 이루려고 애쓰는 예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입장과 기존 질서 사이에는 늘 긴장이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세와 태도는 헤롯에게 대해서와 빌라도의 법정에서 일관되게 확인되는 태도이다. 이 자세는 권력에 대해서 협력의 자세도 존경의 자세도 아닌 것이다. 7. 빌라도와 헤롯의 선고 예수의 태도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빌라도와 헤롯은 예수의 죄없음에 대해서 매우 소극적이다. 단지 그들은 로마 통치의 유지에 관심이 있었다는 정도만을 누가는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가 대제사장들의 증오를 받을 만한 일을 했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들이 휘말려들 성격의 것이 아님도 또한 알고 있었다. 그들의 선고는 그저 팔레스틴 지역에 대한 로마의 지배를 안전하게 지켜나가는데 도움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억압과 부정의에 대한 예수의 반응 누가는 부정의에 대한 것으로 서기관들을 비판하는 것과 과부들의 제산을 등쳐먹는 것을 비판하는 예수를 서술한다. 억압에 대해서는 이보다 더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예를들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난 예수의 항의로서 이는 당시의 주도적인 경제 행위와 질서에 정면 도전하는 것이며, 이것은 또한 종교적 권한 남용과 억압에 대해서도 비판하는 것이었다. 또한 누가의 예수는 특히 여성의 역할과 지위에 대하여 진보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당시 일반의 생각과는 다르게 누가는 이혼과 재혼을 간음과 같은 것으로 보는 예수를 부각시키고 있다.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 향유로 예수의 발을 씻은 이야기 등을 통해서 누가의 예수는 여성들에게 새로운 자아정체와 사회적 지위로 인도하는 길을 암시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섬김에 기초한 사회관계에 대한 예수의 요청 억압에 대한 예수의 입장은 새로운 사회관계를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의 예수는 사회관계의 새로운 유형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암시적으로는 겸손과 헌신적 봉사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하신다. 9장 후반부에 있는 가장 높은 사람에 대한 예수의 말씀, 14장에 있는 잔치집에 높은 자리를 택한 사람들에게 하신 비유,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 등에서 볼 수 있는대로 겸손과 봉사는 예수의 사회 관계에 대한 권고이다. 이것은 누가의 예수가 억압의 정치적 관계를 비판하는 전체 요건이기도 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