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펄젼의 시편 25편 강해
[개 요]
주제
이 시에는 "다윗의 시"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다윗의 충성스러움이 이 시편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의 모습, 그가 겪었던 수많은 투쟁, 그의 범죄와 진실된 회개, 그리고 그가 겪었던 깊은 고뇌 등이 모두 여기에 나타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의 마음을 여기서 살펴볼 수 있다. 이 시는 다윗의 노년기에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 그가 젊은 시절에 범했던 죄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점과 그의 많은 원수들의 계교와 잔인함에 대해 언급하는 점에서도 그렇게 추정할 수 있다. 압살롬이 그를 대적하여 반역을 꾀했을 때, 그가 이 시편을 지었다는 학설이 결코 근거 없는 이론은 아니다. 이 시는 일곱 편의 "회개의 시" 중에서 두번째 시이다. 다윗은 범죄 후 진심으로 슬퍼하는데, 그 슬픔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다. 이러한 태도가 참된 성도의 증거이기도 하다.
구성
이 시는 22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절의 첫 글자는 히브리어의 알파벳 순서로 되어 있다. 이렇게 구성된 여러 편의 시 중에서, 시 25편은 맨 처음으로 나타난다. 시편 기자가 이런 방법으로 시를 기록한 것은 암송하기 쉽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성령께서 이런 방법으로 시를 기록하게 하신 것은, 시를 짓는 예술적 능력도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람의 재능과 창조성을 모두 하나님의 단 앞에 드리고 성결케 하여 거룩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시편에는 뚜렷한 구성은 없고, 그 내용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제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시편 기자는 이 시편에서 기도와 묵상에 전념한다. 기도와 묵상이 번갈아 나타나며, 이것을 따라서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
1-7절기도.
8-10절묵상.
11절기도.
12-15절묵상.
16-22절기도.
[강 해]
1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2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3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4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5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6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7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1절. "여호와여." 비둘기가 제 집을 찾아가듯이, 거룩한 영혼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주의해 보라. 폭풍이 불 때면, 여호와의 배들은 항상 기억하고 있는 피난의 항구로 돌아간다. 우리는 풍요로움 가운데서 편안하게 지낼 때는 종종 하나님을 잊곤 하지만,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 부르짖으면 그래도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구원해 주신다. 그분은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인가!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 기도할 때에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그분께 바치지 않으면서 그분을 향해 손을 든다는 것은 그분을 조롱하는 것이다. 진정한 기도는 영혼이 땅에서 일어나 하늘에 계신 그분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야곱의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곳으로 갈 때는 염려와 걱정을 버리고, 위에 계신 언약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위로 올라갈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영혼이 날개를 잃어버렸거나 몸이 무거워 땅에 묶여 있을 때에 그렇다. 이때 우리의 영혼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라기보다는 땅에 숨어 있는 두더지와도 같다. 이러한 때에도 우리는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온 힘을 다하고 마음을 높여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믿음을 지렛대로 삼고 은혜의 팔을 의지하면, 꼼짝 않고 있던 몸도 움직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쓰고 애를 써도 우리 힘만을 의지한다면 필연코 패배를 당할 수밖에 없다. 구세주의 사랑이 전능하신 힘으로 우리를 끌어 주실 때에야, 우리의 마음은 연기가 하늘로 오르듯이 사랑하는 그분께 올라가는 것이다.
2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일인칭 소유격을 사용하여 부르는 이름은 단순히 "여호와여"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가깝고 친근하게 들린다. 감미롭게 노래하는 시인은 이미 하늘에서 도우시는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 그분을 부여잡는다. 이렇게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는 곡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했으며, 하나님도 이것을 기뻐하셨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을 간절히 추구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품고서 이것을 하나님께 고백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믿음이란 우리가 타고 있는 배를 해안에 연결해 주는 밧줄과 같다. 이 밧줄을 끌면 우리는 해안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해 주는 밧줄이다. 이 밧줄을 의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간다. 믿음의 닻이 있는 한, 아무리 험한 태풍이 불어닥쳐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믿음을 상실하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 우리의 믿음이 강하고 굳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로도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다. 믿음은 또한 방패와도 같다. 자신의 방패를 버리는 군인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안전을 찾지 못한다면 어디서 당신의 안전을 찾을 수 있겠는가?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로 소망을 잃지 말게 하소서. 주께서 신실하게 행하셨던 것에 대해 증거하기를 부끄러워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이처럼 부끄러워하기를 바라는 자들이 많이 있나이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원수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들의 악한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나의 원수들이 내가 고난에 처한 것을 보고서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희롱하지 못하게 하소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명예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수들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품는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한 것을 보고서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다른 것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결국 실망하고 영원히 수치를 당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할 때는 결코 좌절을 당하지 않는다.
3절.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고난은 그 마음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능력을 키워 준다. 고난 가운데서 자신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자들은, 또한 주위에 있는 고통당하는 동료를 불쌍히 여기고 잊지 못한다. 한때 가난했던 사람들, 또는 지금도 가난한 자들이 다른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긴다. 질병으로 고생해 보지 않은 자들은 아픈 자들을 보고서 불쌍한 마음을 품지 못한다. 이처럼 고난은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고난당하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한다. 우리가 종종 고난과 슬픔을 당하여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있다면, 우리는 이 슬픔을 감사해야 한다. 굳은 마음, 친절하지 못한 마음은 다른 무엇보다도 나쁜 것이다. 이것은 본인에게는 질병과도 같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문과도 같다.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기도는 결코 이기적인 기도가 아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독점하겠다는 생각으로 기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비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맛보기를 바라는 것이다. 기도는 약속과 같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분을 의지하는 자녀들에게 결코 거짓 되거나 불친절하게 대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항상 약속을 지키신다.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다윗은 그의 원수들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원수들이 그에 대해 증오심을 품는 것은 방자한 일이다. 죄인들은 그들의 범죄를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들이 죄를 범함으로써 어느 누구도 이롭게 하지 못한다. 죄를 짓는 자신에게도 이것은 해가 되는 것이다. 그들이 범하는 율법이 불공평하거나 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폭군처럼 다스리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해 주권을 가지셨다는 사실이 결코 사람을 속박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그들이 죄를 짓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죄를 행함으로 유익이 있다거나 죄를 짓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수치를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죄인들은 그들의 죄에 대해 참회하며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영원한 멸시와 수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자들이 오는 세상에서 당할 운명이다.
4절.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거룩하지 못한 자들은 자신의 뜻을 고집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외친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우리의 의무를 분별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그런 때에는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분께 여쭈어 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법은 때로 신비스러워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분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그분께 물어 보아야 하며, 그때 그분은 그분의 시간에 모든 것을 명확하게 알려 주신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자들에게 도덕적 가르침을 주시고, 말씀에 대한 지식도 채워 주시며, 그분의 섭리로 우리의 가는 길을 인도하신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귀한 선물들이다.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4절에서 이 두번째 간구는 첫번째 간구보다 더 구체적인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아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아빠, 내가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인지 먼저 가르쳐 주세요. 그리고 내 떨리는 발이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우리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에 불과한가! 우리는 지속적으로 전능하신 그분께 힘을 얻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5절.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이 간구는 앞의 4절에 나오는 두번째 간구와 같은 내용이다. 어린아이가 걷기 시작한 이후, 아빠가 계속해서 아이의 손을 붙잡고 앞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부탁하는 간구이며, 진리의 기초를 더 가르쳐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이것은 체험적인 가르침을 간구하는 기도이다. "여호와여, 나를 당신의 진리로 인도하시고, 당신의 신실하심을 증거해 보이소서. 나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사 그 귀중함을 알게 하소서. 나로 진리를 따라 살게 하소서." 다윗은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서 여호와의 학교에 계속해서 다니고자 했던 것이다. 4, 5절에서 다윗은 네 번이나 '은혜의 대학'에서 학생으로 공부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사상을 주입시키면 안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고, 성령께서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하고, 또한 배우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실 것을 간구해야 한다.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온전한 구원을 주신다. 독자들이여, 그분이 당신의 구원의 하나님이신가? 아버지께서 택하시고, 아들이 화목케 하시고, 성령께서 새롭게 하사 영원한 소망을 품게 하신다는 것을 아는가? 그렇다면 이것을 근거로 더 큰 구원을 간구하여 복을 받도록 하라. 여호와께서 당신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그분은 그분의 길로 당신을 인도하실 것이다. 다윗이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처럼, 우리도 확신을 품고 기도해야 한다. 이런 기도는 힘이 있고,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큰 위로를 준다.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인내란 믿음이 낳은 딸과 같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하는 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린다. 여호와를 섬기고, 예배하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분을 기대하고 신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특권이기도 하다. 우리의 믿음은 연단을 받아 더욱 강한 믿음이 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진실된 것이라면, 지속적으로 고난을 받는다 해도 결코 굴하지 않을 것이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려 주셨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데 피곤한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6절.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고난에 처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셨다고, 또는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보이시던 긍휼을 잊으셨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전에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사랑을 기억하시라고 간구하게 된다. 존귀하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우리도 이렇게 거룩한 담력을 가지고 기도하자. 그러나 우리의 두려움 속에는 거룩하지 못한 불신이 섞여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서 이 불신을 몰아내야 한다.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란 두 개의 보석과 같이 귀한 것이다! 이것은 순결한 단어들이다. 이처럼 감미로운 단어는 세상에 없다. 그 은혜로운 뜻을 우리의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오, 나의 하나님, 당신이 베푸신 긍휼
내 영혼이 돌이켜 보나이다
내 생애에 함께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보고
경외심과 사랑과 찬양을 돌리나이다.
여호와께서 과거에 베푸셨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미래에도 우리를 대하신다면, 우리는 만족할 것이다.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변화가 없으시다. 그분은 예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도 우리에게 긍휼과 인자를 베푸실 것이다. 우리는 은혜의 강이 계속해서 흐를 것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다윗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에 대해 확신하는 자였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부터 있었던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재판정에서 재판을 할 때는 자주 "전례"에 따른 판결을 내린다. 우리도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전례를 따라 행하실 것을 담대히 간구할 수 있다. 딕슨은 이렇게 말했다:"믿음이란 우리가 체험했던 것을 다시 기억하고, 이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시는 하나님께 다시 말씀드리는 것이다." 결코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께 영원 전부터 베푸신 그분의 자비와 영원한 사랑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를 기뻐하시며 응답하신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좋은 것들의 근원을 찾아보라. 그 근원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서 당신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택하심을 믿지 않는 자들도 이것을 깨닫게 되면, 그분의 택하심과 영원하신 긍휼과 사랑을 알게 될 것이다.
7절.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죄란 거치는 돌과 같다. 우리는 이것을 치워 버려야 한다. 여호와여, 내 모든 죄악을 기억지 마시고 잊어버리소서. 나의 젊은 시절에 혈기로 방탕하게 놀았던 것을 기억하지 마소서. 우리가 기억하고 참회하는 죄악을 하나님은 잊어버리신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버린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것이다. 이 세상은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충동한다. 그러나 이 죄악은 결코 사소하고 작은 것이 아니다. 사탄의 잔칫자리에서 젊은 시절에 즐기는 놀이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우리를 괴롭힌다.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내는 것은 노년에 겪을 독을 심어 놓는 것이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젊은 시절을 기억하고 눈물을 쏟으며 성경책을 적시는 자도 있을 것이다.
"죄와 허물." 이 두 단어는 모두 악한 행동을 나타내는 말이다. 다윗은 이처럼 구체적으로 참회했다. 진실되게 참회하는 자는 죄에 대해 대충 넘어가며 참회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 많이 슬퍼하고 운다. 그의 수많은 죄악이 한없이 그를 슬프게 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죄악을 뼈아프게 기억하게 되면, 그가 범했던 다른 죄악에 대해서도 참회하게 된다. 죄를 진심으로 참회하는 자는 온전하고 분명하게 사함을 받기 전에는 만족하지 않는다. 다윗은 그의 죄를 용서받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억지도 마실 것을 바랐다.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다윗이 드린 이 기도는, 십자가 위에 달리신 주님 곁에서 죽어 가면서 한 강도가 드린 기도와 같다. 이 두 사람의 기도는 모두 같은 것에 근거하여 드리는 기도이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근거하여 기도한다. 우리는 감히 공의의 저울에서 평가를 받은 대로 우리 몫을 요구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로 대해 주실 것을 간구할 뿐이다.
8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9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10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이 구절들은 여호와의 성품과 그분의 행하심에 대한 묵상이다. 기도의 들판에서 땀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자는, 때때로 기도를 멈추고 묵상의 음식을 먹으며 힘을 새롭게 해야 한다.
8절.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여호와의 성품 중에서 선하심과 정직하심이 친구처럼 함께 나타나 있다. 선하심과 정직하심이 하나가 되어 함께 나타난 모습을 보고 싶다면, 십자가 밑으로 나아와 우리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라.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흐르고, 또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주님의 은혜가 함께 나타나 있다. 그뿐 아니라 선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교훈하여 자신을 따르도록 하는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도 자비하심으로 죄인을 거룩한 길로 인도하사 그분의 형상을 닮게 하신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은 죄인을 용서하실 뿐 아니라 죄인으로 새로운 길을 걷도록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지속적으로 죄를 범하고 방황하는 자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거룩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확신할 수 있다. 죄에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는 이 사실에서 위로를 받으라. 하나님은 죄인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신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은 실제적이다. 그분은 교리를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그 "도"로 교훈하신다.
9절.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사람들은 겸손하신 우리 주님의 아버지로부터 은혜를 받는다. 아버지는 이런 사람들에게서 아들의 형상을 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도자가 되어 주신다. 겸손한 자들은 진정 풍요로운 복을 기업으로 받는다. 이들은 진정 기뻐해야 한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게 되면 당황하게 되고, 그 결과 분별 없이 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고 바른 길을 걷게 하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기 때문에 배우려 하지 않고, 그리하여 하늘로 인도하는 길을 놓치고 만다. 그러나 겸손한 자들은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영광의 문을 발견하게 된다. 그분은 온유한 자를 지도하시기 때문이다.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얼마나 귀하고 복된 교사이신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하시다니! 내 영혼아, 이 모든 교훈을 받아들이라.
10절.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이 법칙에는 예외가 없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에게 선을 행하신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아 충성스럽게 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와 신실하심이 넘치도록 함께한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하셔서 여호와의 뜻에 순종하게 하신다면,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손해를 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는 그 시간에도 하나님의 자비와 신실하심이 늘 함께하신다. 우리는 마음으로 동요하지 말고, 여호와의 변치 않는 언약을 믿음으로 붙들자. 하나님의 언약은 변치 않는다. 이 진리를 돼지에게 던져 주어 발로 짓밟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사랑하는 자녀의 목에 걸어 주는 진주와도 같이 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주 예수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것을 믿음으로 의지하며 여호와의 언약을 지킨다. 그들은 성령으로 성결케 되어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걸어간다. 이런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지만, 죄인에게는 이런 약속이 없다. 언약을 지키는 자들은 언약으로 보호를 받는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또한 그분의 자비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11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11절.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도해야 한다. 묵상을 통해 마음을 새롭게 한 시편 기자는 다시 기도의 노동을 시작하면서, 그의 죄를 사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간구하는 기도를 항상 기뻐하시고 응답하신다. 우리의 자랑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를 드러내기 위한 기도이며, 하나님의 속성에 영광을 돌리기 위한 기도이다.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 죄를 미워하며, 그가 그의 가슴을 슬픔으로 짓누른다. 여호와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셨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자. "여호와여, 당신의 입술로 이 죄를 사하셨다는 것을 선언하소서. 나의 죄가 중대하기 때문입니다. 이 죄악이 나를 누르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옮겨 주소서. 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이것을 옮기실 수 있나이다. 내가 괴로움으로 견딜 수 없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속히 사하소서. 속히 사하시고 치료하소서. 악한 죄인을 사하신다면 당신의 영광이 더욱 드러나리니,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사하소서."
이 구절에 나타난 믿음의 논리를 잘 살펴보라. 믿음의 논리는 율법적인 삶의 논리와 정반대되는 논리이다. 믿음은 피조물의 공로를 주장하지 않고, 창조주의 선하심을 바라본다. 또한 자신의 죄로 인한 단점으로 비틀거리지 않고, 구세주께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를 바라본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기도한다.
12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13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14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15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12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이 질문을 자신에게 하면서 자기를 스스로 살펴보라. 복음의 특권은 믿는 체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진정 여호와의 백성인가? 당신은 여호와를 진정으로 경외하는가?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마음이 바른 자는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성결케 하시는 자에게, 또한 머리도 깨우쳐 주신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길을 택하여 걸어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우리의 선택하는 것을 인도해 주셔서, 우리가 자유 의지로 택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된다면, 이는 얼마나 큰 하나님의 자비인가!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춘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뜻대로 행하도록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를 부정하지 않으시고, 많은 것을 우리에게 선택하도록 맡겨 주신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의지에 교훈을 주신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택하게 된다.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마땅히 선택해야 할 길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지하여 이것을 배워야 하고, 또한 고집스러워서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효과적으로 우리를 가르칠 수 없다.
13절.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다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함 가운데 살아간다. 그는 구석에 있는 작은 침대에 누워서도 마치 큰 침대에 있는 것처럼 살 수 있다. 사람은 물질이 풍족하다고 해서 참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풍족한 가운데서도 거할 수 있고, 또 가난한 가운데서도 거할 수 있기에 항상 평안히 거한다. 이런 평안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평안이다. 이런 평안을 누리는 자는 또한 영광을 얻는다. 전쟁을 마친 군인처럼, 곳간을 가득 채운 농부처럼, 그의 영혼은 평안을 누리면서 또한 영원히 기쁨을 누린다.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인하여 이삭을 기억하셨고, 이삭을 인하여 야곱을 기억하셨다. 선한 사람의 자손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축복을 저주로 바꾸어 놓는가! 사람들이 고의로 하나님의 축복을 거부한다고 해서 이 약속이 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약속은 영적 자손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우리의 영적 후손이 "땅"을 상속할 것이다. 그들은 새 언약의 축복을 받는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많은 영적 자손을 허락하시고, 우리로 즐거움을 누리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우리의 자손들을 이 땅의 왕자들로 만드실 것이므로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14절.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친밀함"이란 부부 사이의 성관계,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함, 그리고 특별한 우정을 말한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를 다 깨달을 수 없다. 성도들도 이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은 성도들이 느껴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높은 수준의 영적 삶은 독수리의 눈으로도 살펴볼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의 지혜로도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하늘의 문자를 해독하는 열쇠가 있다. 그들은 하늘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친밀함을 나누지만, 이 비밀을 말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여호와는 그 언약에 따르는 의로움, 충만함, 은혜, 안전 등을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의 마음에 계시하셔서 알게 하실 것이다. 또한 성령께서는 그들의 영혼에 이것을 인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사랑과 구원의 계획, 신비스러운 구원의 사건을 알려 주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체험을 통해 직접 가르쳐 주시는 것이지, 주석책을 보고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알고자 하는 자는 십자가를 바라보라. 거기에 비밀이 있다.
15절.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항상 그분을 기대한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소망 가운데 기다린다. 이 믿음과 소망에, 우리는 몇 가지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추가할 수 있는 것은 순종함으로 드리는 봉사,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분께 찬송을 돌리고, 묵상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것 등이다. 하나님을 늘 앙망하는 자의 눈은 복되다. 솔로몬은 눈에 대해 말하면서, 눈은 보아도 만족함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은 만족함을 누린다.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영혼도 고난 가운데 처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의 눈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도, 그의 발은 그물에 걸릴 수도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도, 이 세상의 비극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물이란 일반적으로 유혹을 상징한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그물에 걸리는 것을 막아 주시고, 또 그물에 걸렸을 때는 구원을 베푸신다. "벗어나게"라는 단어는 거친 단어이다. 죄의 그물에 빠져 본 자는 거기서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죄의 그물로부터 벗어날 때 거칠고 힘든 것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리하여 죄는 아픈 것임을 알게 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 하나님의 자비인 것이다. 성도들이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심에 감사하라. 여호와께서는 간악한 원수들이 우리를 그물로 사로잡지 못하도록 막으신다. 우리가 연약하여 죄의 그물에 걸렸을 때는 멸망하기까지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위험한 상태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신다. 우리의 발이 그물에 걸렸을 때에도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를 간섭하고 구원하실 것이다.
16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17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난에서 끌어내소서
18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19내 원수를 보소서 저희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20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21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2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16절.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셔서 얼굴을 돌리셨다고 염려했다. 우리는 때로 믿지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셨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등을 돌리셨다고 염려할 필요가 없으며, "내게 돌이키소서"라고 담대하게 부르짖을 수 있다. 우리가 여호와의 "친밀함"을 누리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먼저 이 염려의 장애물을 제거하라. 이 장애물을 제거한 후에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누리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근거하여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선행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세리가 드렸던 기도를 우리도 드려야 한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다윗은 외롭고 괴로웠다. 예수께서도 육체를 입고 이 땅에 계실 때에 이와 같이 외로움을 겪으셨다. 어느 누구도 그분의 깊은 슬픔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분은 외로움을 실제로 겪으셨기에, 이제도 외롭게 살아가는 자들을 위로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나를 어두운 방으로 인도하시나
그분은 나보다 더 어두운 방을 지나셨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려는 자는
누구든지 이 문을 거쳐야 한다네.
17절.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근심이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면, 이것은 진정 근심스러운 일이다. 홍수가 나면 호수에 물이 가득 차듯이, 다윗의 마음은 근심으로 차올랐다. 다윗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이런 논리를 펼친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힘이 있다. 밤중에 가장 어두운 시간이 이르면, 우리는 새벽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안다. 바닷물이 썰물로 가장 낮아지면, 곧 밀물이 온다는 것을 안다. 우리의 근심이 가장 많아지면, 우리는 이렇게 소망을 품고 기도할 수 있다:"나를 곤난에서 끌어내소서."
18절.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는지 주의해 보라. 여기에 나오는 "곤고"와 "환난"은 모두 화와 고난을 묘사하는 단어들이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은 더욱 하나님께 순종하며 믿음을 굳건히 한다. 그는 다만 "주여, 내가 당하는 이 모든 고난을 보소서"라고 기도할 뿐이다. 그는 고난을 당하여도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께서 바라보아 주시기만 해도 만족할 것이고, 그 이상 다른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가 이 모든 고난의 근본 원인을 알고, 그 뿌리에 도끼를 두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보다도 그 고통을 야기한 죄를 더욱 싫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통을 제거하기를 기도하기보다는, 먼저 죄를 사해 주실 것을 기도한다. 질병보다도 죄를 더욱 미워하고 견디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머지 않아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사해 주실 뿐만 아니라 병도 고쳐 주실 것이다. 사람들은 죄와 슬픔의 관계를 잘 배우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훈을 받은 마음은 이것을 안다.
19절. "내 원수를 보소서." 내 원수를 보시고, 판단하시고, 막으시고, 물리치소서.
"저희가 많고." 저들의 수는 많고 강하다. 그들을 물리치려면 헤라클레스처럼 강한 자의 팔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능력이라면 그들을 물리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옥의 마귀와 땅의 악령들이 모두 힘을 합쳐도 우리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능히 물리칠 수 있으시다.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뱀의 후손들은 성도들을 미워한다. 그들의 조상은 미워하는 자였고, 그 후손들도 그를 닮았다. 부당하고 불의하게 미워하는 것처럼 잔인한 것은 없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은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상처를 입힌 사람은 상처받은 사람을 잔인하게 미워한다. 주님은 지금도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20절.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악에서 내 영혼을 지키시고, 내가 넘어졌을 때에 나를 구원하소서. 이 구절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시편 기자는 수치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가 극한 고난을 당할 때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여호와를 믿는 그의 믿음을 조롱할 것이 두려웠다. 고귀한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수치를 견디지 못한다. 다윗은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원수들에게서 수치를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어떤 고통스러운 일이라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두려운 일을 당하여 다윗은 하나님께 피했다:"내가 주께 피하오니." 하나님의 종이 버림을 당한다면, 그분의 이름이 어떻게 되겠는가? 진실된 성도는 이것을 견딜 수 없다.
21절.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주께서 나를 보호하시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안전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성실"과 "정직"을 우리의 안내자로 삼아 당장에 성공하고 발전하지 못한다고 해도, 차라리 불행과 재난을 당하는 것이 더 낫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 사회에서도 "정직이 최상의 정책"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늘의 후계자인 우리 성도들은 이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사회에서 정직하게 살면서, 또한 은밀하게 기도하며 하늘에서 우리를 지키실 것을 간구하기 때문이다:"내가 주를 바라오니." 거룩하게 살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종교적 위선이다. 또한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우리 자신의 정직성을 의지하며 사는 것은 건방진 무신론자들의 삶과도 같다. 이 구절에서 "성실과 정직"이란 단어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을 믿고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22절.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이 기도는 무척 광범위한 기도이다. 이 기도는 충성스러운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이며, 그들이 당하는 "모든 환난"을 말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고난과 슬픔을 당했다. 이 슬픔은 시편 기자에게 동정심을 갖도록 가르쳤고,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게 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이스라엘은 시련을 받고, 시련 가운데서 씨름을 하고, 마침내 승리를 한 영웅이다. 바로 이 이스라엘은 모든 성도들의 상징과 같다. 애굽에서, 광야에서, 가나안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포로에서 온갖 시련을 이겨 낸 이스라엘은 곧 교회의 모형이다. 교회는 이 땅에서 이스라엘이 고난에 처했던 것처럼 고난을 당하고 영적 전투를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죄에서뿐만 아니라 고난에서도 우리를 구속하시는 분이다. 그분은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든 악에서 구원하시는 온전한 구세주이시다. 보혈을 통한 구속은 완성되었다. 오, 하나님이여, 온전하신 능력을 통한 구속을 보여주소서. 아멘.
[주해와 설명들]
시 25편 전체. 시편에는 히브리어의 알파벳 순서를 따라 지어진 시가 일곱 편이 있다. 이 시는 그 중 첫번째 나오는 시이다. 다른 시들은 34, 37, 111, 112, 119, 145편이다. 유대인들은 각 행의 첫 자를 모으면 특정한 말이 되도록 시를 짓기를 좋아했는데, 이 시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 -조지 필립스(George Phillips, B.D., The Psalms in Hebrew with a Commentary, 1846).
시 25편 전체. 이 시는 알파벳 순서를 따라 지어진 첫번째 시이다······여기서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교훈이 있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려 하신다. 사람이 어떤 창의력을 발휘하든지 이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인간의 모든 추구에서 하나님을 "알파와 오메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앤드류 보나.
시 25편 전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는 비밀스러운 것이다. 다른 사람은 이것을 알지 못하며 오직 택함을 받은 사람만이 알 수 있고, 택함을 받은 사람도 성령의 특별한 조명을 받은 사람만이 알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여주셔야 한다. 다윗은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4절)라고 했다. (2) 보여주시는 것만으로는 사람을 돌아오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4절). (3) 단순한 가르침으로도 충분하지 못하다. 설득하며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8절). (4) 설득하며 가르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특별히 지도하며 가르쳐야 한다.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9절). (5) 지도하며 가르치는 것도 충분하지 못하다. 세심하게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5절). (6) 세심하게 가르치는 것도 충분하지 못하다. 가르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그가 택할 길을 가르쳐야 한다.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12절).
이것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아니다. 그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1) 기도의 특별한 은혜:"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1절). (2) 믿음의 특별한 은혜:"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2절). (3) 회개의 특별한 은혜:"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7절). (4) 소망의 특별한 은혜:"내가 주를 바라오니"(21절). (5) 하나님을 의지하는 특별한 은혜:"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15절). (6) 이 모든 것들의 뿌리가 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특별하고 영원한 은혜와 자비:"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6절). 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11절). -윌리엄 페너(Hidden Manna, 1626).
시 25편 전체. 시 22-25편에서 다윗의 경건함을 나타내는 몇 가지 자태-눕고, 서고, 앉고, 무릎을 꿇고-를 볼 수 있다. 시 22편에서 그는 계속 누워 있었다. 그의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러졌으며, 땅을 기어다니며 절망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신비스럽게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며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라고 했다. 시 23편에서 그는 서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대적하는 원수들을 짓밟고 승리를 거두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시 24편에서 그는 앉아 있었다. 마치 의사가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고, 교수가 자리에 앉아서 강의를 하는 것과 같다. "여호와의 거룩한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시 24:3). 이제 시 25편에서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들고 목소리를 높여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그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겸손하게 탄식한다. -토머스 풀러(Thomas Fuller).
1절.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주를 우러러본다는 말은 이전에는 우러러보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람의 영혼은 죄와 이 세상의 염려로 눌려 있다. 마치 그물에 달린 납덩이가 그물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리듯이, 사람의 영혼은 스스로 위를 향할 수 없다. 그물에 콜크 같은 부유 물질을 달아서 위로 떠오르게 하듯이, 하나님께서 영적 기도를 하게 하시기 전에는 위로 떠오를 수 없는 것이다. 불에서 불꽃이 타오르듯, 믿음 가운데서 영혼이 위를 향하도록 해야 하며, 세상의 염려와 영혼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해야 한다. 두더지가 날 수 없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은 기도할 수 없다.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마치 힘차게 위로 치솟는 독수리와 같다. 사람의 마음은 천성이 땅에 붙잡혀 있다. 땅에 박힌 돌이 날 수 없듯이, 사람의 영혼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과 말씀으로 일으키시기까지는 스스로 하나님을 우러러볼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장 중요하게 간구할 일은 우리가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분을 추구하고, 그분을 높이고, 하늘 나라를 소망하고, 이 땅의 웅덩이에 누워 있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아치볼드 심슨(Archibald Symson).
1절.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건축가가 건물을 짓듯이, 하나님의 사람은 기도한다. 건축가는 먼저 기초를 놓는다. 하루 동안에 건축을 다 마칠 수 없기 때문에 첫째 날에는 그날 할 일만 마친다. 둘째 날이 되면 건축 현장에 와서 첫째 날에 세워 둔 골조가 그대로 있는가를 확인하고서 둘째 날에 해야 할 일을 한다. 셋째 날이 되면 앞의 이틀 동안 했던 일을 점검하고 셋째 날에 할 일을 더한다. 이렇게 해서 건축이 완성될 때까지 일을 계속한다. 이처럼 기도는 영혼이 하늘 나라에 도달하기까지 건축을 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은 기도하며, 날마다 날마다 그 기도가 높아져서 마침내 하나님에게까지 도달하게 된다. -윌리엄 페너.
1절.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영광이 충만하고 은혜가 풍성한 당신을 바라보나이다. 당신의 사랑과 성령의 위로 가운데 당신을 바라보나이다. 당신을 바라보며 가시로 만든 관을 내 면류관으로 삼고, 당신이 흘리신 보혈을 나의 향유로 삼고, 당신이 받은 저주로 나의 복을 삼고, 당신의 죽음을 나의 생명으로, 당신의 십자가를 나의 승리로 삼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여 내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기우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의 영혼과 나의 생명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오 여호와여, 당신의 선한 이름을 내게 나타내 보이소서. 여호와여, 사탄을 꾸짖으시고, 내 안에 있는 육적인 욕망을 막아 주사 나를 유혹하지 못하게 하시며, 내가 기도로 당신과 교제를 나누는 동안 내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못하게 하소서. 여호와여, 은혜로 나를 다스려 주시고, 성령으로 나를 주장하시며, 당신의 능력으로 나를 보호하시고, 당신의 구원으로 내게 면류관을 씌워 주소서. 하늘과 땅을 보존하시는 여호와여,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시 145:16). 이제 당신의 손을 펴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내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소서. 내 영혼이 주를 바라보나이다. -로버트 모섬(Robert Mossom, 1657).
1절.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초대 기독교 시대의 사역자들은 사람들이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 "네 마음으로 주를 우러러보라"라고 말을 하곤 했다고 키프리안은 전한다.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회당벽에 이런 글귀를 써 놓는다고 한다:"애정이 없는 기도는 영혼이 없는 몸과 같다." 그러나 그들의 헌신은 외적인 헌신에 불과하다. 마치 두뇌가 없는 머리와 같고, 영혼이 없는 몸과 같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사 29:13). 두더지가 날 수 없는 것처럼, 육적인 사람은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며 기도할 수 없다. 다윗도 이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계의 추가 아래를 향하고, 그물에 달린 납덩이가 아래로 향하듯이 우리의 마음은 둔하고 무거워서 아래를 향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히 12:1) 자석이 철을 향하듯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분께 나아가자. -존 트랩.
1절.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이 시의 앞에 나오는 시 24편에서는 영광의 왕, 만군의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시도록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라고 했다. 시 25편의 내용은 24편 다음에 나오는 내용으로 적합하다. 우리 주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승천일에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오 여호와여, 당신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것처럼 우리도 영혼과 마음을 합하여 그곳에 오르도록 허락하소서." 그리고 승천일 후의 주일에는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오 하나님이여, 당신은 외아들을 하늘에 있는 당신의 나라에서 크게 높이셨나이다. 이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 주님께서 높은 곳에 오르신 것처럼 우리도 높여 주소서."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1절.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우러러본다"는 말은 '위로 올린다'는 말이다. 이 말은 희생 제물을 염두에 두고 한 말로 보인다. 희생 제물은 위로 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가 응답을 받지 못한다거나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올라가지 못한 것으로 표현했다:"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사 기도로 상달치 못하게 하시고"(애 3:44). 기도에 대한 이런 표현을 구약에서 볼 때에는 희생 제물에 대한 암시로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희생 제물을 위로 올리고,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조셉 캐릴.
1절. "나의 영혼." 나의 영혼은 당신이 당신의 피로 사신 것이기에 당신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영혼을 나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나의 믿음을 보시고 나와 결혼하지 않으셨습니까? 성도들이 참여하는 이 성찬식은 결혼 잔치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까지는 나는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영혼은 진정 나의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확신을 가지고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버트 모섬.
2, 3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다윗은 2절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그러나 이 기도가 너무 제한적이고 폭이 좁은 기도라는 것을 알고서, 3절에서는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라고 기도했다. 이처럼 우리는 폭넓게 헌신해야 한다. 우리의 간구도 우리 자신만을 위한 제한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모든 종을 위한 폭넓은 기도가 되어야 한다. -토머스 풀러.
3절.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그들도 실망치 않고, 나도 실망치 않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이렇게 기록한 이유는, 그가 바라는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하게 되면,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스러운 일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서 잭슨(Arthur Jackson, M.A., 1593-1666).
3절.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이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누구든 무고하게 속이는 자들이다. 그들의 속이는 행동을 어떻게 해서도 정당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기에, 우리는 마땅히 그분께 경배와 사랑을 끊임없이 돌려 드려야 한다. 그분의 율법은 거룩하고 정의롭고 선한 것이며, 그분의 계명은 의롭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속이는 자들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기에 수치를 당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진실된 마음으로 회개하고 그분의 거룩한 복음을 참되게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비롭게 대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고 악한 길을 고집스럽게 걸어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자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런 사람들을 "무고히 속이는 자"라고 했으며, 이들은 자신의 죄를 가리울 어떤 의복도 없다. -윌리엄 리처드슨(William Richardson, 1825).
3절.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마땅히 수치를 당할 자가 수치를 당해야 한다. 자신은 어떠한 해도 당하지 않았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해롭게 하며 신실하지 못한 방법으로 사는 자들이 해를 당할 자들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아히도벨은 목을 매어 죽었다. 압살롬은 하나님의 손으로 나무에 매달렸고, 요압이 그를 재빨리 죽였다. 그와 함께 모반을 했던 사람들은 칼에 죽기도 하고, 그들이 행한 일로 수치를 당한 채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아, 기도의 능력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성도들이 기도하여 얻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존 트랩.
4절.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사람의 "도"가 있고, 하나님의 "도"가 있다. 죄의 "도"가 있고, 의의 "도"가 있다.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길들이 많이 있지만, 또한 내가 택할 길이 있다. 주님의 길은 진리의 길이지만, 내가 걷는 길은 실수의 길이다. 주님의 길은 주님 보시기에 좋고, 나의 길은 내가 보기에 좋다. 주님의 길은 하늘 나라로 인도하고, 나의 길은 지옥으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그리하여 나의 길을 당신의 길로 착각하지 말게 하소서. 나를 진리로 인도하시고 가르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길을 떠나 나의 길을 걷는 실수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말씀으로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성령의 인도로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당신의 은혜로 진리의 길로 인도하소서. -로버트 모섬.
4, 5, 9절. 네가 아는 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네가 행할 일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현재 네가 알고 있는 너의 의무를 다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네가 미래에 행할 의무도 알려 주시리라.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게으름을 피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두려움에서 보호하시리라.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것을 가르치는 구절들을 찾아보겠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4절)에서 "주의 도"는 내가 실수할 수 없는 길을 말하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4절)에서 "주의 길"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좁은 길, 지극히 엄격하고 어려운 명령들을 말한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5절)라는 말은 내게 명확하게 가르치사, 자신을 속이지 않게 하시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하게 도와달라는 말이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슨 근거로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가? 그 이유가 여기 기록되어 있다:"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5절). 여호와여, 당신은 나를 구원하실 구세주시니, 나를 버리지 마시고 가르쳐 주소서.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5절). 온 종일, 그리고 매일 매일 내가 주를 바라보나이다. 다윗이 드리는 기도에 대한 응답은 무엇인가?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9절). 온유한 자란 자신의 멍에를 지는 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자신을 스스로 인도할 수 있다고 자만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들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 실수하지 않는다. -사무엘 애네슬리(Samuel Annesley, D.D., Morning Exercises at Cripplegate, 1620-1696).
5절.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기도하는 영혼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 엄마가 손에 사과를 들고 있는 것을 아이가 본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사과를 무척 갖고 싶어한다면, 아이는 엄마에게 와서 손을 붙잡으며 사과를 달라고 할 것이다. 엄마가 사과를 주지 않으면 아이는 엄마의 손가락을 잡아 펴면서 사과를 달라고 할 것이다. 한 손가락을 펴고, 그래도 엄마가 주지 않으면 두 손가락을 펴고, 이렇게 해서 울면서라도 사과를 얻어 내고야 말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손에 모든 은혜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간구할 것이다. 간절히, 그리고 신실하게 기도하면 마침내 하나님은 손을 펴시고 은혜를 나누어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부모가 자녀를 대하듯이 그분의 백성들을 대하신다. 그들이 구하는 것을 잠시 동안 주시지 않으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고 싶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더욱 간절히 간구하게 하려는 것이며, 그분께 더욱 가까이 나아오게 하려는 것이다. -윌리엄 페너.
5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우리는 "종일" 주를 바라보아야 한다. (1) 그날이 긴 날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해도 우리는 주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오래 기다렸지만, 하나님께서 더 기다리라고 명하신다면 그때에도 주를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보여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때에도, 선지자의 종을 보내셔서 강물에 일곱 번이나 들어가라고 하실 때에도(왕상 18:43), 우리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2) 그날이 어두운 날이라 해도, 우리는 "종일" 주를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지 알지 못할 때, 그분이 무엇을 하시는지 알지 못하고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인지 알지 못하여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 이런 때에도 우리는 안식하며 어두움 가운데서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어떤 기색도 보이지 않을 때, 이 어두움의 기간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을 때, 그리고 그 기간이 아무리 길더라도 우리는 결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자.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지 알지 못하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비밀을 우리가 깨닫게 될 것이다······(3) 그날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이라 해도, 우리는 "종일" 여호와를 바라보자. 맹렬하고 거친 바람이 몰아쳐서 우리가 휘청거릴 때, 교회가 핍박을 당하고 배가 파선을 당하여 침몰하고 많은 사람이 순교를 당할 때, 이때에도 우리는 여호와를 바라보고 인내로 이 폭풍을 견뎌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배에 함께 계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그분이 성도들과 함께 배에 계신다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여호와를 바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1) 하나님을 사모하는 삶이다. 이것은 마치 거지가 은혜를 베푸는 자를 바라보는 것처럼, 환자가 벳새다 연못에서 물이 동할 때 누군가 그를 연못으로 데리고 가서 병 낫기를 바라는 것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다······(2)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이다. 이것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사는 것과 같은 삶이다. 우리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사모하고 사랑해야 한다. (3)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신뢰하고, 모든 염려를 아버지께 맡겨 버리고 사는 것과 같은 삶이다.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우리를 모든 악으로부터 보호하신다. 이처럼 다윗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며 살았다:"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시 62:5)······(4)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이다. 하인이 주인을 섬기듯, 주인의 뜻을 행하고 주인의 일을 하고, 주인의 명예와 이익을 생각하며 사는 삶과 같다.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온전히, 조금도 남김 없이 우리를 드려서 그분의 지혜롭고 거룩하신 뜻을 따라 사는 것이며,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의 뜻에 맞추어 사는 것을 말한다. 주인을 섬기는 하인은 자신을 뜻대로 하지 않고, 주인의 뜻을 한 걸음 한 걸음씩 따르며 살아간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그분의 뜻을 온전히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매튜 헨리(Communion with God을 요약함).
5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주"는 어떤 분이신가? 그분의 손은 풍성하고, 그분의 가슴은 사랑으로 가득 찼으며, 그분의 마음은 자비로 가득하여 겸손히 회개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신다. 당신의 친밀한 음성, 내 양심에 말씀하시는 평안,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순종하게 하는 당신의 은혜, 내 기진한 영혼을 소생시키고 만족케 하는 하늘의 위로, 이 모든 축복을 "바라나이다."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당신이 하늘에서 내리시는 충만한 복을 "종일" 바라나이다. 내 소망을 버리지 마시고, 나의 기진한 영혼을 새롭게 하소서. 당신이 거저 주시는 은혜를 더욱 소망하게 하소서. 당신의 감미로운 자비를 나에게 베푸사, 순간 순간 호흡을 하듯이 하늘에 계신 당신과 영원한 교제를 누리게 하소서. 주를 종일 바라듯이, 내 평생 동안 주를 바라게 하소서. -로버트 모섬.
6절. "주의 긍휼하심." 내가 깊은 곳에서 주를 불렀나이다. 나의 고난이 심하여 당신의 풍성한 긍휼하심을 바라고 불렀나이다. 당신의 긍휼하심으로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의 연약함을 도와주소서. 당신의 긍휼하심으로 내게 은혜를 베푸사 성결케 하시고, 당신의 성령으로 나를 위로하소서. 나를 지옥에서 구원해 내시고, 하늘 나라를 소유하게 하소서.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로버트 모섬.
6절.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부터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랑을 매우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한 조각 쇳덩이는 아무 가치도 없겠지만, 그것이 골동품이라면 매우 귀한 것이다. 오래된 약정서라면 사람들이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고 보존하려 하는가! 이 세상에서 일시 동안 지극히 사소한 특권을 누리게 하는 약정서도 그렇게 귀하게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생겨난 것보다 더 오래된 약정서가 하늘에서 주어졌다면 우리는 얼마나 귀하게 생각해야 하겠는가! 이 약속은 우리가 눕거나 일어서거나 매일 매일 우리와 함께한다······영원부터 있었던 그 약속은 앞으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한다. 뿌리가 영원하면 가지도 영원하다······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마르지 않고 흐르는 영원한 샘과 같다. 누구든지 이 샘에 와서 물을 마실 수 있다. 와서 물을 담아 가라. 그릇이 없다면 빈 그릇을 빌리라. 적게 빌리지 말고 많이 빌리라. 이것으로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영원토록 살아가라(참조. 왕하 4:7). -엘리사 콜스(Elisha Coles, God's Sovereignty, 1678).
7절.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다윗은 중년이나 노년기에 들어서 죄를 짓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죄를 짓고 또 지었다. 그가 지은 죄의 중압감에서 이렇게 고백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율법의 요구대로 그를 대하신다면, 그가 어제 오늘 지은 죄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심지어 유아기 때부터 지은 모든 죄에 대해 하나님의 정의가 그에게 심판을 내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심판과 분노로 우리를 두렵게 하실 때마다, 우리는 최근에 지은 죄만이 아니라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생각하면서 그것들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탄식해야 한다. -존 칼빈.
7절.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이 기도는 다윗이 쓸데 없이 중복하여 드리는 기도처럼 보인다. 다윗은 오래 전에 그가 젊어서 지은 죄를 회개하고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하셨으며, 이미 용서하신 죄를 하나님께서 다시 무효라고 선언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다윗이 무엇 때문에 오래 전에 지은 죄를 다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말인가? 다윗은 이전에 지었던 죄에 대해 벌써 잊어버렸을 것이고, 하나님도 이미 용서하신 죄는 잊으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주장하는 데 대해서 나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반론을 펴고자 한다. 첫째, 다윗은 그가 어려서 지은 죄에 대해 진정으로 슬퍼하고 회개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가 회개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빠진 것이 있는 것을 지적하신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전에 했던 참회에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에 대해 영원한 심판을 내리지 않기로 용서하셨지만, 그 죄에 대해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게 하시고 이 고통이 그를 짓눌렀다. 다윗은 이 고통을 옮기시든지 가볍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소시 때의 죄악으로 노년에 당하는 고통을 가볍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는 것과 같다. 셋째, 하나님께서 과거에 지은 죄를 용서하실 때는 용서받은 죄인이 다시는 같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용서하신 것이다. 그가 다시 같은 죄를 범하면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심판하시고 과거에 허락한 죄 사함도 그 효력을 상실한다. 다윗은 후에 밧세바와 우리아에 대해 큰 죄를 범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운 심판을 엄격하게 내리시고, 그가 젊어서 지은 죄에 대해서도 새롭게 벌을 주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윗이 그가 소시에 지은 죄에 대해 사함을 받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종 다윗은 죄 사함을 얻기 위해 기도하지는 않아도 이미 얻은 죄 사함을 감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이것은 필요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이런 기도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으로 간주하신다. 따라서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라는 말은 "내 소시의 죄를 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찬송합니다"라는 말과 동일한 뜻을 품고 있다. -토머스 풀러.
7절.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다윗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다음에 "여호와여······기억지 마시고"라고 외쳤다. 그가 부르심을 받기 전, 젊은 시절에 지은 죄악이 그의 양심을 괴롭게 했다. 사랑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이 젊어서 지은 죄악들이 노년에 이르러 그대들을 괴롭게 하고 평안을 빼앗아 갈 것이다. 젊은 시절에 추구했던 욕정과 허영, 그리고 감각적인 쾌락은 노년기에 이르러 슬픔의 근원이 될 것이다. -크리스토퍼 러브(Christopher Love, 1654).
7절.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사람들은 그들이 해를 당했을 때 해를 끼친 자들을 벌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여,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로 나를 벌하지 마소서. -윌리엄 그린힐(William Greenhill).
7절.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해 무관하게 지내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 -존 트랩.
7절. "내 소시의 죄." 본문의 핵심을 논하기 전에 사람들이 제기하는 문제를 먼저 다루겠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젊은 시절을 어떻게 지냈는가를 생각해 보면서, 그가 젊은 시절에 죄를 지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다윗은 가난했다. 그의 아버지 이새는 늙었다. 아버지가 부자라는 기록이 없고, 다만 일곱 아들이 전 재산이었을 것이다. 둘째, 그는 고난을 당했다. 다윗은 가장 나이가 어린 막내였지만, 호강만 하고 귀여움을 받고 자란 것이 아니라 거친 일이나 궂은 일을 가리지 않고 했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양 떼를 쳤다. 그는 자신이 치던 양으로부터 순결하고 단순한 삶을 배웠던 것 같다. 셋째,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시 71:5).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시 71:17). 이처럼 다윗은 어려서부터 성자로 자랐다. 또한 그는 늘 고난의 용광로를 지났다.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에 황망하였나이다"(시 88:15).
어떤 사람들은 위와 같은 주장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그가 이처럼 매일 순결케 되는 삶을 살았다면,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었겠는가? 매일 닦아 내는 쇠에 녹이 슬 수 있겠는가? 지속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다윗의 영혼이 죄로 얼룩질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비록 다윗이 전반적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을지라도, 특히 젊은 시절에는 잘못과 약점이 없지 않았고 죄도 범했을 것이다. 성경에는 그가 젊은 시절에 범한 죄를 기록하지 않았지만, 다윗의 노년에 밧세바와 지은 범죄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다윗이 혈기 방자하여 방탕한 기질을 가졌다고 결론을 내리지는 않겠다. 문제가 있는 사람을 흠이 없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 된 아첨인 것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비난하여 선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악한 것뿐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도 해로운 것이다. 그가 많은 처첩을 거느린 것으로부터 젊어서는 방탕한 기질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젊은 시절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명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도 그가 어떤 특정한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시 19:12). 다윗이 고백하기를 자신이 지은 죄도 자신이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의 죄를 내가 어찌 알겠는가?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 다윗의 생애를 보면서 우리는 이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젊어서 가난하고 고통스럽고 경건했던 사람도 죄를 짓는다면, 부유하고 방탕하고 악한 자로 성장한 자는 그 결과가 어떻겠는가?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지은 죄를 부끄러워하고, 슬퍼하며, 잠잠히 회개해야 할 것이다. -토머스 풀러.
7절. "내 소시의 죄." 어느 날 나이든 두 제자가 만났다. 한 사람은 87세였고, 다른 사람은 그보다는 더 젊었다. 더 젊은 제자가 물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신앙에 관심을 가졌습니까?" 나이든 제자는 "오십 년입니다"라고 했다. "젊어서부터 신앙을 가졌던 것을 후회해 보지는 않았습니까?" 그러자 나이든 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천만에요. 내가 젊은 시절에 지은 죄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흘린답니다." -아빈(K. Arvine, Cyclopedia of Moral and Religious Anecdotes, 1859).
7절.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다윗은 "나의"라고 하지 않고 "주의"라고 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는 자는, 그가 지은 죄에 대해 자신에게 잔인한 자가 되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인자를 저버리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욘 2:8). 자기 자신 안에, 즉 자신의 육체에는 어떤 선한 것이나 인자함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근거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따라서, 내 영혼에게 약속하신 복을 내려 주소서. -로버트 모섬.
7절.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모세도 이러한 표현을 했고, 다윗도 또한 이렇게 말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에 있는 무한한 자비를 따라'라는 뜻이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이라는 엄청난 죄를 지은 후 이렇게 기도했다:"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 51:1). 그는 자신의 성품에 담겨 있는 죄성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에 근거하여 기도했다. 시 25편에서는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라는 표현으로 만족하지 않고,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라는 표현을 덧붙였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묵상이 그의 믿음과 그가 드리는 기도의 기초가 되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묵상하고서 그는 모세처럼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라고 기도했다. 모세가 선포했던 하나님의 모습을 그도 고백했던 것이다(출 34:6, 7).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또는 "주의 선하심을 따라" 또는 "주의 이름을 인하여"라는 말은 "그분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이사야도 이렇게 표현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사 43:25). "내가 나를 위하여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사 48:11). 이처럼 여호와 바로 그분께서 그분 자신을 위하여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이 한 구절에서도 두 번, 세 번 반복되어 나타나 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그분은 심히 자비하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토머스 굿윈.
8절.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우리가 택함을 받은 것은 그분의 주권으로 인한 것이듯이, 우리가 사함을 받은 것은 그분의 자비의 열매이며, 우리에게 있는 지식은 그분의 지혜에서 흘러나온 것이고, 우리에게 있는 힘은 그분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며, 우리가 순결하다는 것은 그분의 거룩함을 받아 반사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거룩함을 반사했듯이, 새 피조물도 그분의 온전하심을 반사한다. 성경 중에서 특히 이사야서에는 하나님께서 시온을 세우시고 그분을 위하여 백성을 삼으신 분으로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스티븐 차녹(Stephen Charnock).
8절.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인들을 자비롭게 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분도 또한 그분의 원수들에게 은혜롭게 대하시지 않겠는가? 그분의 율법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도 돌릴지며"(출 23:4).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을 만나신다. 그리고 우리 죄인들은 모두 그분의 원수가 되었던 자들이다. 그분은 길을 잃고 지각이 없는 짐승과 같은 우리를 만나신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 자신에게 인도하시지 않겠는가?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것이고, 또한 우리를 구속하셨기에 더욱 소유권을 주장하시지 않겠는가? -로버트 모섬.
9절.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란 마음이 가난한 자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공의롭고 지혜롭게 살도록 지도하실 것이다. 다윗이 이처럼 행동하였기에(삼상 24장) 사울도 그를 두려워했다. 세상에서 자신의 양심만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진실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삶과 그 마음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면 그들의 머리를 굽힐 수밖에 없다. -존 트랩.
9절.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는 겸손한 자이다. 그래서 항상 배우기를 바라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하지만,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지 않을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마음도 있다. 이 구절은 이처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누가 가르치실 것인가를 말한다. -존 베리지(John Berridge, 1716-1793).
9절.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교만으로 가득 찬 사람은 하나님께서 낮추시지 않으면 겸손하고 온유한 자가 될 수 없다. 히브리 표현에서,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은 상징적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자를 가리킨다. 다윗은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겸손한 성품뿐만 아니라 억압을 통해서 그들의 고집이 꺾인 모습을 함축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낮추셨을 때, 하나님은 또한 그분의 손을 펴시고 그들의 인생을 통해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인도하시는 것이다. -존 칼빈.
9절. "온유한 자." 교만과 분노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설 자리가 없다. 선생님이신 그리스도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얼마나 더 겸손해야 하겠는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지식이든 인간적인 지식이든 그 어떤 것도 배울 능력도 소망도 없다. -조지 혼.
9절.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는 온유한 자들에게 그분의 비밀을 가르치실 것이다. 그분은 교만한 학생들에게는 가르쳐 주시지 않는다. -토머스 굿윈.
9절.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온유한 자란 주님의 발 아래에 앉아 "내게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마음이 겸손하고, 배우려는 자세가 되어 있어서 어린아이라도 이끌 수 있다(사 11:6). 오스틴은 이런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이 들어 늙었지만, 어린아이에게서도 기꺼이 배울 것이다." -존 트랩.
10절. "여호와의 모든 길은······인자와 진리로다." "길"은 히브리어로 "아르호트"(twjra)인데, 이 단어는 수레바퀴가 같은 길을 계속 지나면서 만들어 낸 바퀴 자국이나 궤도를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대하시면서 항상 인자와 진리의 길을 걸으신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항상 인자함을 보이시며 진리를 행하시기에 사람들은 그분의 모든 길을 쉽게 분별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가족에게, 그리고 개개인에게 얼마나 자주 이런 길을 걸으시며 자비를 베푸시는지! 하나님의 자비와 진리는 그분의 행하시는 길에 깊은 흔적을 남겨서,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이 흔적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계명과 언약을 지키는 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들에게는 더욱 풍성하게 자비를 베푸신다. -아담 클라크.
10절. "여호와의 모든 길은······인자와 진리로다." 그분은 사랑과 진리의 성품을 가지셨고, 인자와 진리의 길을 행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선한 것을 이루시는 분이기에 "인자"의 길을 행하시고, 그분의 약속을 충성스럽게 이행하시기에 또한 "진리"의 길을 걸으신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당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것을 그분의 사랑으로 해석하라. 사람이 행하는 것 중에는 아무리 좋게 해석을 해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행동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행하심은 사람이 행하는 것과 같지 않다. 선하신 하나님은 선한 행동을 하신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신다고 해도 그분을 신뢰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행하심 가운데서 선한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라. 아무리 생각해도 선한 것이 없어 보이면, 믿음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고 이 상황을 최선의 상황으로 만들라. -토머스 굿윈.
10절.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 그분은 이런 사람들에게는 자비를 거둬들이는 법이 결코 없으시다. -토머스 굿윈.
11절.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나의 하나님, 이 말씀이 진정 사실인 것을 고백하나이다. 우리는 모두 지극히 악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기도를 중단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모두 극악한 죄인이라는 것은 당신의 선하심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모두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의 영광에 근거한 것입니다. 나의 죄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악하다는 것보다 당신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다윗이 기도했던 것처럼 나도 기도하오니, 나의 수많은 죄를 씻어 주소서.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신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의 많은 죄를 사해 주신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씻고 싶다면, 죄인은 자신의 죄가 많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이름을 인하여, 그 영광스러운 이름을 위해 사해 주신다. 그분이 사하시는 죄가 많을수록, 그분의 이름은 더욱 높임을 받는 것이다. 다윗도 하나님의 자비가 크고 무한하다는 것을 드러냈다. 하나님의 자비는 많고, 그분의 사랑은 무한하다. 무한하다는 말은 셀 수 없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무한하시니, 사함받지 못할 죄가 없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우리의 죄가 많고 크다는 이유로 실망할 이유가 없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나이다. 어찌하여 나의 모든 죄를 서둘러 사하지 아니하시나이까? -닐(비에이라<Vieyra>의 글을 인용함).
11절. "여호와여······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이름"은 그 사람의 명예와 영광을 말한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삼하 7:9)고 하셨다. 이 구절에서도 이름이란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이 확실하다. 또한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을 히브리어로 "아느쉐 하쉠"(!vh yvna)이라고 하는데, 이를 직역하면 "이름의 사람"이란 말이고, 이는 유명한 사람을 뜻한다(창 6:4).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실 때는 그분의 이름을 위해서, 즉 그분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하신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행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분은 처음이요 마지막이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신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동도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도 그분 때문이며, 우리가 활동하는 것도 그분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시기에, 그분이 행하시는 것도 모두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서,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는 것만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은 없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이는 하나님께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분이 사하시면, 그분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이다. 사람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는 것은 사람에게는 영광이요, 이보다 더욱 하나님께 영광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행동이 그분께 영광스러운 일이듯이, 또한 그분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도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 자비, 선하심 등은 사람의 죄를 사하시는 데에 가장 밝게 비치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인내와 함께 나타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풍성을 말한다. 그분의 용서와 자비에는 그 선하심이 얼마나 풍성히 나타나겠는가? 또한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시는 데에도 그분의 자비가 영광스럽게 나타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공의도 나타나게 하셨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지혜의 산물이다. 죄를 사하심으로 하나님은 그분의 여러 가지 성품을 드러나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을 위해 용서하시기 때문에, 몇 가지 죄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죄도, 작은 죄뿐만 아니라 큰 죄도 용서하신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크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묵상한 다음, 그 자신의 죄가 많다는 것을 들어서 하나님의 죄 사함을 간구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추악한 죄를 범한다면 이는 어리석고 주제 넘는 일이다. 그러나 큰 죄를 범한 자가 진실로 회개하고, 그분의 이름을 위해 용서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또한 죄인들이 절망하지 않게 붙들어 준다. -나다나엘 하디.
11절.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사하소서." 다윗은 그의 죄가 작다는 것에 근거하여 죄 사함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죄악이 중대하다는 것을 근거로 죄 사함을 간구한다. 그가 추악한 죄를 지었다는 사실로 그는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자신의 죄악이 크고 중대하다는 것이 죄 사함을 간구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죄악이 더 크면 클수록 죄 사함을 받아야 할 이유도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기도한 것과 같다:"내 죄를 사하소서. 내 죄가 커서 내가 그 모든 심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죄가 중대하여 나는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당신이 나를 사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더욱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그의 죄가 크고 중대하다는 것을 이유로 삼아 죄를 사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재난을 당했을 때에 구조를 요청하는 것과 같다. 거지가 빵을 얻고자 할 때는 그가 극한 빈궁에 처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동냥을 한다. 고난 가운데 있는 자가 다른 사람들의 자선과 도움을 바랄 때에 그가 지극히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는 것보다 더 적절한 방법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런 간구를 들어 주신다. 하나님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비참한 가운데 처해 있다는 사실에 동정하시고 자비를 베푸신다. 그분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죄인이 불쌍히 여기심을 받을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불쌍히 여김을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이 점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가장 추악한 죄인이라도 능히 용서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속하시는 이 모든 일은 바로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를 부각시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성품에 영광을 돌리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을 구속하실 계획도 세우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추악한 죄인들도 구원하신다는 것에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가 나타나 있다. 죄인들의 죄가 더 클수록, 이것을 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영광스럽게 빛이 나는 것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사도 바울은 그가 얼마나 나쁜 죄인이었는가를 말할 때에 그의 죄가 추악함을 인해서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도 더욱 넘쳤다고 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3, 14). 구세주께서는 아무리 추한 죄인이라도 구속하실 수 있으며, 그분의 보혈은 아무리 중대한 죄라도 깨끗이 씻을 수 있다. 그분은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구원하실 수 있고, 아무리 심한 어려움에 처해 있어도 거기서 구원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아무리 추한 죄인이라도 그분께 나아오면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은 그분께 영광이 된다. 중대한 병에 걸린 환자를 의사가 치료했다면 이는 의사의 영광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리스도는 그분께 나아오는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신다. 그분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다. 그러므로 죄인이 아무리 악해도 그를 기꺼이 구원하려 하신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1절.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사하소서." 영적인 일로, 그리고 이 세상의 일로 비참한 경우를 당한 자들이 있는가? 그가 이처럼 고난을 당해 낮은 자리에 처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가 자신을 비참한 자로 보고, 그의 죄악이 무겁다는 것을 더 많이 느낄수록, 그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소망은 더 크다. 여호와는 그분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게 자비롭게 대하시지만, 이런 비참한 자들에게는 자비를 더 많이 베푸신다. 만일 사람이 스스로 자신은 비참하고 무가치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내가 심히 비참하오니"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할 수 있다. 다윗도 이렇게 기도했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더 비참한 사람일수록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 대상으로서는 더 적합하다. 세리도, 집을 나간 탕자도 모두 이런 경우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악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는 무한한 자비를 받을 수 있다. 베르나르는 공의와 자비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다. "공의는 심판을 요구하지만, 자비는 비참한 자를 돌아본다. 참된 자비는 비참한 자를 도와준다. 자비는 죄인을 심문대에 세우지 않고, 그를 도와줄 기회를 즐거이 찾는다." -리처드 스톡.
11절.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죄 사함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의 죄가 중대하다고 생각한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중대"하다는 말은 그것이 많고 크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구절은 "나의 죄악이 많고 크오니"라는 뜻이다. 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많고 커서 나를 누르오니, 나를 용서하소서······여호와께 죄 사함을 얻기 위해 나아오는 자가 왜 그들의 죄악을 중대하게 보는지 그 이유를 들어 보겠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위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능력, 엄중한 공의,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나는 버러지와 같은 존재이면서 죄를 지었고, 그것도 이처럼 위대하신 하나님을 대적하여 담대하게 죄를 지은 것이다. 벌레와도 같은 인간이 감히 이처럼 위대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것은 아무리 작은 죄를 짓는다고 해도 큰 죄이며, 이처럼 위대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엄중한 진노를 자초하는 것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용서와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죄를 짓는 것은 마치 진노를 쌓는 것과 같다(롬 2:4, 5)······(3) 그들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오, 죄인들이 하나님의 그 많은 자비와 선하심을 멸시하고, 그 자비를 이용하여 죄를 짓다니!······(4) 그들은 위대한 빛을 멸시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양심의 빛을 받았다. 양심의 빛을 무시하고 죄를 지으면, 특히 복음을 받아들인 자가 죄를 지으면, 그 죄는 더욱 중한 것이다. 이러한 죄보다 그 영혼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은 없다. 이러한 죄를 짓는 자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아 낮아졌을 때는 하나님의 죄 사함을 믿기도 어렵다······(5) 죄를 지속적으로 범하기 때문이다. "그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시 68:21). 불쌍한 영혼들은 젊은 시절, 그 황금 같은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배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터인데도, 죄에 죄를 더하면서 살아간다. 다윗도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서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7절)라고 했다. 다윗의 젊은 시절은 그처럼 흉악하게 죄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젊은 시절에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여호와를 온 힘을 다해서 섬기지 못한 것을 뉘우친 것이다. 하물며 젊은 시절에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헛된 것을 추구하며, 거짓을 말하고, 안식일을 범하며, 폭력적이고 방탕하게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이것으로 그들의 양심을 책망하신다면, 그들은 진정 슬픔을 당하게 될 것이다······(6) 지은 죄가 많기 때문이다. 다윗도 지은 죄가 많았기에 "많은 자비"를 간구했다(시 51:1)······(7) 이런 저런 죄를 버리기로 결심한 것을 무시하고 죄를 짓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때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엄숙하게 선언하고, 또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모두 깨뜨리고 죄를 짓는다. (8) 죄가 죄인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롬 5:21). 참으로 죄로 인해서 괴로워하는 죄인들은 "나는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9) 죄의 근원이 있기 때문이다. 연못이나 흐르는 시냇물보다 물의 근원이 있는 샘에 더 많은 물이 있는 법이다······사람이 외적 행동으로 죄를 짓는 것보다 그 마음에서, 성품으로 범하는 죄가 더 많다······(10) 마귀에게 포로로 잡혔기 때문이다······(11)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크기 때문이다(롬 2장). (12) 이런 진노와 심판에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피를 흘리셨다.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 치렀던 대가가 지극히 크다는 것은, 그 진노가 또한 크다는 것을 가리킨다······(13) 사람이 다를 사람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삶을 헛되이 살고, 자신을 잘 지키지 않는 영혼들에게 거짓말을 하며, 확신 가운데서 죄를 짓게 하는 자들의 죄는 더욱 중하다. -앤소니 파머(Anthony Palmer, The Gospel Newcreature, 1678).
11절.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여호와여, 나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나이다. 주께서 자비로 나를 대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설 자리가 없나이다. 나는 자랑할 것이 없사오나, 나의 허물을 바라보지 마소서. 나는 아무 쓸모가 없사오나, 나를 쓸모 없는 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주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오니, 당신의 이름대로 나를 자비롭게 대하소서. 나에게 자비롭게 대하사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나의 죄가 중대하나이다. 이는 내가 위대하신 하나님, 나에게 선하게 대하신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나를 부르시고 나에게 맡기신 사명이 큰데도 죄를 지었으니 내 죄가 중하나이다. 태양은 더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더 작게 보이나이다. 그러나 내 죄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더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당신이 보기에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내 죄는 더욱 중하나이다. -로버트 모섬.
11절.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우리는 우리의 죄가 많다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를 막는 것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를 받는 것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내 죄를 사하소서." 왜 이렇게 기도하는가? "나의 죄악이 중대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시 41:4).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렘 14:7). 진심으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강력한 기도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극히 선하시고, 자비가 풍성하시고, 죄를 사하시고, 구속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자비가 무한하신 분이라고 영광을 돌리게 된다. 여호와께서도 그분의 백성들에게 풍성하신 자비를 나타내고자 하실 때에는 백성들로 그분께 죄를 쌓게 하시고, 그분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이사야도 이렇게 말했다:"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로워하였으며······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케 아니하고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2-25). -토머스 코벳(Thomas Cobbet, 1608-1686).
11절. "나의 죄악······사하소서." 바로는 "아! 이 더러운 개구리들, 무서운 천둥을 치우소서!"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뭐라고 말하는가? "여호와여, 주의 종이 지은 죄를 사하소서!" 바로는 죄로 인한 그 심판을 면할 것을 바랐다면, 다윗은 심판의 원인인 죄를 사하실 것을 바랐다.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은 개구리나 천둥보다 죄를 더 괴로워한다. 그는 개구리보다 죄에서 더러움을 더 많이 보고, 천둥이나 번개보다 죄에서 두려움을 더 많이 느낀다. -예레미야 다이크(Worthy Communicant, 1645).
11절.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바로는 그의 안에 있는 굳은 마음보다 그를 때리는 매를 더 두려워하고 탄식했다. 에서는 장자권을 팔았던 그의 죄를 탄식한 것이 아니라, 그가 심판을 받아 복을 잃어버린 것을 탄식했다. 이것은 양파를 깎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다. 양파를 깎다 보면 눈은 저절로 따끔거리는 것이다. 폭풍이 일고 배가 파선할 위험에 처하게 되면 선원들은 배 안에 있는 화물들을 밖으로 던져 버린다. 폭풍이 잔잔해지고 귀항하기까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슬픈 일을 당했을 때 그 당한 일을 불평하지만,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슬퍼하지 않는다. 그들은 죄로 인한 심판은 두려워하면서, 죄 자체는 무서워하지 않는다. 죄는 즐기면서, 죄로 인한 심판은 무서워하는 것이다. -윌리엄 세커.
12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 (1) 그리스도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2) 선한 양심으로 평안한 가운데 거할 것이다:"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13절). (3) 자손에 대한 소망으로 위로를 받을 것이다:"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13절). -로버트 모섬.
12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당신의 마음에 이러한 두려움이 가득하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받은 은혜에 대한 두려움, 은혜를 잃을 것에 대한 더 큰 두려움, 잃어버린 은혜를 회복하기 위한 가장 큰 두려움으로. -베르나르.
12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여호와를 경외하면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된다. 모든 사람들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리하면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어거스틴.
12절.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하나님은 그분을 경외하는 자를 가르치사 어떤 일에든지 좋은 것을 선택하게 하시고, 또 성공하도록 인도하신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존 트랩.
13절.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준다. 이것은 모세의 뱀이 바로의 술사들의 뱀을 삼킨 것과도 같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다른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생을 지나 영원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살다가 하늘의 집에 거하기까지, 영적 평안을 누리다 영원한 축복을 받기까지 평안과 인내 가운데 안식한다. -로버트 모섬.
13절.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불가타 역본은 이 구절을 "좋은 일에 머무르리로다"라고 번역했다. 아담은 낙원에서 거하는 기쁨을 누렸지만, 며칠 또는 몇 시간만 그곳에서 머물렀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아담과 같지 않을 것이다. -닐(게르호후스의 글을 인용함).
13절.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시편 기자는 "그는 좋은 일에 머무르리로다"라고 말하며 감미로운 영적 선언을 했다. 세상적인 즐거움은 잠시 동안 쾌락을 주지만, 이 쾌락은 그들과 함께 오래 머무는 것은 아니다. 이 쾌락을 맛보는 동안은 즐겁지만, 이것을 삼키면 자신이 소망하고 바라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그러나 영적 기쁨은 맛을 보는 동안 사라져 가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영혼을 새롭게 하면서 그 기쁨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며,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고 이것을 소유한 자와 영원히 함께 머문다. -닐(빅토리누스<Victorinus, 1130>의 글을 인용함).
13절.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때에 그들은 감사하는 마음도 없이 그저 받아 삼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진정 감사하며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아무리 큰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아주 작은 것으로도 만족한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만족하고, 인내와 안식 가운데 하나님의 선물을 즐거워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영혼은 평안히 거한다고 할 수 있다. -존 칼빈.
13절.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이 땅은 가나안 땅을 말한다. 이 땅은 은혜의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기로 한 것이다. 이 땅과 함께 다른 모든 축복의 약속들이 언약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약속은 단순히 땅을 차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튜 풀.
14절.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의인이 하나님의 친구가 된다. 하나님은 이런 의인들에게 그분의 친밀함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흥왕하는 악인들을 위해 예비하신 심판을 말씀하시며, 이 의인들에게 그분의 비밀을 나타내 보이신다. 사람이 마음의 완고함을 가증한 것으로 여기고 이것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그를 친구로 여기시고 의인에게 보이시는 그분의 비밀을 나타내 보이신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그를 신뢰한다는 뜻이며 이는 그에게 큰 영광이 된다. 그런데 왕이 그 비밀을 털어놓는다면 그에게는 더욱 큰 영광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비밀을 알려 주시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이 영광이 얼마나 크겠는가? 하나님의 비밀이 있는 곳에 그분의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비밀을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셨다. 베르나르는 요한복음에 대해 기록하면서 이렇게 썼다:"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내부로 헤엄쳐 들어가, 거기에서 그분의 비밀과 숨겨진 지혜를 가져온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바울에게도 그분의 비밀을 보여주셨다:"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고전 2:7, 8). 그레고리(Gregory)는 하나님의 비밀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은 의인과 대화하시며 이 대화를 통해 그분의 비밀을 사람들의 마음에 전하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비밀을 알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비밀을 갖지 않은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경건한 체하지만, 사실은 겉으로만 경건을 가장한 것이며, 이들은 하나님의 참된 비밀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한 가운데 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비밀을 보여주신다. 사람이 보지 않는 중에도 의로운 자가 진정 의로운 자이며, 하나님의 비밀은 이런 사람들과 함께한다. -마이클 저민(Michael Jermin, D.D., 1591-1659).
14절.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고전 2:14)라는 말에는 심오한 뜻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대화, 죄 사함의 의미, 천국에 대한 소망, 성령의 증거, 그리고 영적 삶의 투쟁에 대해 말하는 것은 소경에게 색깔을 말하는 것과 같고 귀머거리에게 음악의 화음을 말하는 것과 같다. -존 모리슨.
14절.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하나님께서 교회와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을 알고, 또 그 안에 있는 세세한 부분까지 다 안다고 할지라도, 성도들의 영혼이 이 언약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감미로운 교제에 대해서는 신비로 남아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이 신비를 체험한다. 그저 교회에 출석이나 하는 정도의 성도들은 이 신비를 알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그분의 친밀함이 있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딕슨.
14절.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복음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고 해도 이 복음은 여전히 신비롭게 숨겨져 있다. 왜냐하면 성도들 외에는 이 신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고 하셨다. 이 구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비밀스럽게 가르치시고, 이것을 비밀스럽게 배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도들을 가르치신다. 그분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마다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세상 사람들도 그들이 배우고자 하면 복음을 배워서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알 수 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복음서에 쓰여져 있는 내용은 알 수 있지만, 그 내용이 얼마나 부요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는 알지 못하며, 그러므로 그들은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전 1:26, 27). 어린아이와 보석 감정가가 같은 진주를 보면서, 같은 이름으로 불러도, 어린아이는 보석 감정가가 그 진주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보듯이 보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는 보석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 13:45에 보면, 성도들을 진주를 찾는 상인에 비유하고 있다. 그가 지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하게 되면, 그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진주를 산다고 했다. 그는 진주의 값을 알기 때문이다. 당신은 또한 "세상 사람들도 복음서 안에 있는 내용의 가치를 알고,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알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 교리를 이론적으로 알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의 의로우심과 그분이 베푸시는 은혜, 성도들이 받을 영광 등은 알지 못한다. 이것들은 모두 영적으로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토머스 굿윈.
14절.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마음을 여시고 명백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다. 이것이 그분의 진실함과 신실함을 증거한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고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면, 그 친구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투명한 창문을 통해 안을 바라보듯, 자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자는 신실치 못한 사람이라고 의심을 받지 않는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분의 성도들에게 마음을 열어 놓으셨다:"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분은 우리에게 열쇠를 주시고, 우리로 그분의 마음에 들어가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품었던 그분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게 하신다. 바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 11).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세우신 계획을 성령께서 말씀으로 기록하셨다. 그리고 그 성령께서 이제는 성도들 안에 거하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면서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대언하듯이, 성령께서는 말씀을 해석하시며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거울을 통해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본다. -윌리엄 거놀.
14절. "여호와의 친밀함." 여호와의 친밀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과 함께한다. 그러므로 이 친밀함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이다. (1) 그리스도의 은혜는 이교도들에게는 비밀이다.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최소한 복음의 껍데기는 알지만, 이교도들은 이것도 모른다. (2) 그리스도의 은혜는 무식한 성도들에게는 비밀이다.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도 육신에 속한 자들은 그 껍데기만 알 뿐, 그 속은 알지 못한다. (3) 그리스도의 은혜는 거룩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비밀이다. 많이 배운 자이든 배우지 못한 자이든, 거룩하지 못한 사람은 복음의 핵심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은혜에 대해 말하고, 그 은혜에 따르는 영광에 대해 논하며, 말씀을 조금 맛보고, 일반적인 내용을 이해한다고 해도, 영적인 지식은 그들에게는 비밀로 남아 있다. -윌리엄 페너.
14절.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그분은 그 언약을 저희에게 가르치시고, 그 의무와 조건과 축복과 특권을 명백히 알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이것들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분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 약속을 위반한 것을 알게 하신다. "사십 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민 14:34).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그분의 말씀이나 은혜를 분명히 나타내 보이신다. -매튜 풀.
14절.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하나님의 비밀은 학문을 연구한다거나 열심히 노력한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천국의 비밀"(마 13:11)이나 "그리스도의 마음"(고전 2:16)은 사람의 이성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오며,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 알아야 한다. 그분을 부지런히 찾고 또 찾는 자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그분과 은혜롭고 친밀한 우정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존 트랩.
14절.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고 그를 방주에 보존하시겠다는 큰 비밀을 그에게 보이셨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그분의 뜻을 숨기지 않으셨다.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그리스도께서 성찬을 나누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듯이(눅 24:35),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영혼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다. -토머스 왓슨.
15절.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래도 그분을 늘 앙망하고 그분의 영광이 있는 천국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분과 그분의 뜻을 더 알기를 소원하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행하기 위해 그분을 바라야 한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매튜 헨리.
15절.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우리의 시신경은 무척 빠르게 움직인다. 이 시신경이 우리의 육체가 행동하는 데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눈"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그의 애정을 나타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존 칼빈.
15절.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새 사냥꾼이 쳐 놓은 그물에 발이 걸린 불행한 새는, 이 세상의 염려와 쾌락에 붙잡힌 영혼을 잘 상징해 준다. 새가 그물에서 벗어나듯이, 이 영혼은 은혜의 능력을 힘입어 염려와 쾌락의 그물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며, 영광스러운 구세주와 함께 안식하기를 바란다. -조지 혼.
17절.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의인은 그가 받는 고난이 크다고 해서, 그리고 왜 고난을 당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고 해서 놀라지 말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이렇게 살아왔다. 하늘로 가는 길은 성도들의 눈물과 피로 젖어 있다. -윌리엄 플러머.
17절. "나를 곤난에서 끌어 내소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불평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 불평할 수는 있다. 그분의 거룩하신 뜻에 순복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간절히 기도할 수 있다. -윌리엄 플러머.
18절.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몸이 아프고 약한 것은 죄로 인한 것이며, 죄의 열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므로"(고전 11:30)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다고 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을 여러 곳 찾아볼 필요도 없다. 신명기 28:27이하에서 모두 이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시 107편도 이것을 말하고, 이와 같은 내용을 말하는 다른 시편도 있다. 사람의 영혼이 병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육체의 질병으로 징계하신다. 영혼을 고치기 위해 육체에 고통을 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프게 하실 때에 우리는 우리 육체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과 천국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이 우선 순위를 갖는 것이다. 다윗도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 때에 영혼의 치료를 받았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그때까지 다윗의 육체는 고통을 당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시 32:4). 그러나 다윗이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자, 하나님께서는 곧 육체의 병을 치료해 주셨다.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의 죄를 인하여 우리의 육체를 치실 때는 먼저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당신의 영혼부터 고치라. 그분이 우리의 육체를 치시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고치기 위한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고전 11:30). -리처드 십스.
18절.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몸이 아플 때에는 예수를 바라보라. 그분은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사람들을 도와주셨듯이, 지금도 돕고자 하시고 또한 도우실 능력도 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그분이 단지 말씀만 하셔도 모든 폭풍과 풍랑이 잠잠해진다. 하나님보다 의원을 믿었던 아사처럼 행하지 말자(대하 16:12).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모든 의사도, 의료 행위도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약을 쓰면서 그리스도께 나아가자. 그분은 이런 의료 행위를 도와주실 것이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어떤 방법을 쓰든지, 축복과 저주가 모두 그분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라. -리처드 십스.
19절. "내 원수를 보소서." 그분은 불기둥을 통해서 애굽 사람들을 보시고, 그들을 괴롭게 하셨다(출 14:24). 그분은 진노와 심판의 눈으로 보신 것이다. 다윗은 그의 원수에 대해 양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어떠한가를 묘사한다. "저희가 많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대부분 압살롬을 향했다(삼하 15:12, 13). 이처럼 우리 주님의 영적 원수들도 많다. 그들의 죄와 타락, 사탄과 그를 따르는 세상의 권세자들, 이 세상의 사람들이 많다.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그들의 증오가 잔혹한 방법으로 나타났다. 사탄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 대해 아무런 이유 없이 잔혹하게 대했다. 그들은 잔혹한 호흡으로 숨을 쉬며, 피에 굶주려 성도들의 피에 취했다. 그들의 자비도 잔혹한 것이라면, 그들의 증오는 어떠했겠는가? -존 길.
19절. "내 원수를 보소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한 도구로 다른 피조물을 쓰실 필요가 없다. 사람에게 가장 해로운 존재는 바로 사람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물들은 다른 종류의 동물들을 해하고 같은 종류의 동물들은 보존하지만, 사람은 사람에게 온갖 해를 끼치고 결국에는 자신을 멸망시킨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이리보다 더 교활하고, 호랑이보다 더 잔인하며, 사자보다 더 맹렬하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마귀가 된다. -윌리엄 스트러더(Christian Observations, 1629).
19, 20절. "내 원수를 보소서 저희가 많고······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인간의 욕정이란 통상적으로 범하는 다른 범죄로 인하여 더 강력해졌다. 그 이름을 군대라고 하는데, 이는 그 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히드라처럼 한 몸에 많은 머리가 있는 괴물과도 같다. (히드라는 헤라클레스가 죽였다는 괴물로서 머리를 하나 자르면 그곳에서 두 개가 나온다는 전설적인 괴물이다-역자 주.) 우리가 불경건이라는 머리를 하나 잘라 내면 거기에서 이와 비슷한 괴물 같은 머리가 다시 자라난다.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트로이 목마의 뱃속에서 군대가 나오는 것처럼, 그 배에서 더러운 욕정의 군대가 나와서 영혼과 육체를 포위하고 공격한다. -로버트 모섬.
20절.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이제 20절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코리올라누스(Coriolanus)는 아티우스 툴루스(Attius Tullus)의 홀에 나아가, 그곳에 앉아서 왕의 자비를 간구했다. 그는 왕의 손에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시편 기자는 이와 비슷한 감정으로 상처받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에 맡겼다.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앤드류 보나.
21절.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세상을 계속해서 보존하신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창조하시는 것과도 같은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을 계속해서 바란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 믿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소망 중에 기다린다. 이처럼 신뢰란 믿음과 소망이 함께 합해진 것이다. -로버트 모섬.
22절.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여호와여, 당신이 나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나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당신의 백성들, 내 고난에 동참하는 그들을 살려 주소서. -매튜 풀.
22절. "이스라엘을······구속하소서." 내가 사는 동안, 그리고 내가 죽은 후에도 이스라엘을 구속하소서. 이 기도는 선한 사람의 기도이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지 못한 자는 어느 누구도 교회를 위해 기도할 수 없다. -매튜 풀.
22절. 이 아름다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은 감미로운 간구로 끝을 맺는다.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은 누구든지 이 기도를 입술에 담고 떠나고자 할 것이다:"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이 기도는 늙은 시므온이 드렸던 기도에 나타난 거룩한 열망을 그대로 담고 있다:"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눅 2:29, 30). -바르통 부시에.
[설교힌트]
1절. 땅에 붙잡힌 영혼을 들어올리는 하늘의 방법.
1절. 참된 헌신.
2절. 영혼의 닻.
3절. 수치를 당하지 않을 자, 수치를 당할 자.
4절. 경건을 위한 가장 좋은 학교. 하나님은 가장 훌륭한 선생님, 기도는 입학을 하는 방법.
4, 5절. 은혜의 학교에 있는 세 학급:보이심, 가르치심, 지도하심.
5절. (1) 성별되기를 소원함. (2) 지식을 추구함. (3) 확신을 누림. (4) 인내함.
5절.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설교를 위한 풍성한 자료가 이 구절에 포함되어 있다.
5절 하반절. 하나님과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매튜 헨리.
6절. 오래된 자비.
6, 7절. 세 가지 기억.
7절 상반절. 망각의 은혜. -토머스 풀러.
7절. 주께서 잊어버리시고 또 기억하실 것을 바람. "내"와 "주의"를 주의해 보라.
8절. 어울리지 않는 자들의 협동. 하나님께서 죄인을 교훈하심-놀라운 일.
9절. "온유한 자." 누가 온유한 자인가? 그들이 얻는 특권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그들과 같이 되는가?
9절 상반절. 균형 잡힌 판단을 위해서는 도덕적 순결이 필요함.
10절.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체험하는 자.
11절. 모범이 되는 기도-고백, 논리, 간구 등.
11절. 회개하는 죄인에게는 아무리 큰 죄라도 죄 사함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조나단 에드워즈.
12절. 거룩한 삶은 성공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길. 자유 의지에 대한 교훈.
13절. 영원히 평안할 자.
14절. (1) 비밀을 아는 자. (2) 놀라움을 체험하는 자.
15절. (1) 우리는 무엇과 같은가? 어리석은 새. (2) 우리가 당한 위험은 무엇인가? "그물." (3) 누가 우리의 친구인가? "여호와." (4) 우리의 지혜는 무엇인가? "내 눈" 등.
16절. 외로운 영혼이 하늘의 친구를 구하고, 고난받은 영혼이 하나님의 자비를 부르짖는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신다.
16-18절. 고난당하는 다윗, 기도하는 다윗. 그가 기도하는 세 가지는 무엇인가? (1) 나를 구원하소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태도로 구원을 바라보아야 한다. (2) 나의 곤고를 보소서. 어느 때든, 어떤 상황에서든 나를 바라보소서. 그러나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는 나를 보시는 것은 마치 죽음 중에서 생명을 찾는 것과 같다. (3) 용서하소서. 고난은 지은 죄를 생각하게 한다. -윌리엄 제이.
17절. 특별한 고난의 기간에 특별한 기도로 특별한 구원을 간구함.
18절. 우리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 (1) 우리가 당하는 슬픔이 우리의 죄를 생각나게 한다. (2) 고난에서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처럼 또한 죄 사함을 얻기를 바란다. (3) 우리의 슬픔과 죄를 모두 하나님께 기도로 아뢴다. (4) 우리가 슬픔을 당할 때에도 순복하고-"보시고,"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분명히 아뢴다-"사하소서" 등.
19절. 성도들의 영적 원수들. 그들의 숫자, 악의, 계교, 능력 등.
20절. 영혼의 보존. (1) 두 가지 특성-"지켜", "구원하소서." (2) 보존되지 않을 때에 당할 무서운 일-"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3) 영원한 보증-"내가 주께 피하오니."
20절. 초인적인 보존, 당연한 두려움, 영적 신뢰.
21절. 안전을 위해 주를 바라봄, 주께서 나를 보호하심.
22절. 야곱의 삶은 우리의 삶의 표본과도 같다. 그의 삶을 생각하면 이 기도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22절. 전투를 벌이는 교회를 위한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