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더니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창세기 45:26-27)
야곱은 믿지 못합니다. 20여 년 전에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살아있다니, 게다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니! 야곱은 아들들의 말을 듣고는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하지만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서는 믿고 이 모든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당시 수레는 최고급 여행수단이었습니다. 말을 듣는 것으로 확신하지 못하던 야곱이, 보고서야 믿었다는 것을 유념하십시오. 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으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것은 은혜를 받는 최우선적인 수단입니다. 그러나 다른 수단도 있습니다. 비신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심하여 세례를 받습니다. 그 물의 촉감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이 선언되며, 회중은 기뻐합니다. 이 역시 은혜의 수단입니다. 예수님을 기억하며 받는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붉은 포도즙과 쪼개지는 빵은 미각과 함께 우리를 은혜로 인도합니다. 찬양은 거룩한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음악은 성도의 마음을 고양시키고 하나님께로 이끄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신자는 기도는 어떻습니까? 눈물을 흘리고, 슬픔을 느끼며, 따스한 추억에 잠깁니다. 탁월한 은혜의 수단 아닙니까! 모든 은혜의 수단은 말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양한 방편을 주시어 확신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믿음이 연약할 때, 수레를 보내시어 확신으로 이끄시는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창세기 45:1-2)
요셉이 웁니다. 서러움의 눈물은 아닙니다. 지난 세월을 생각하며,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웁니다. 우리가 주께 돌아올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무감정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분은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예표인 요셉이 시종들을 내보내고 형제들 앞에서만 우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회개한 자들에게만 당신의 마음을 보이십니다. 다시 요셉을 봅시다. 원망과 보복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렌즈로 자신의 고난을 해석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창세기 45:5, 7-8)
요셉은 3번이나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신비입니다. 형들은 팔았고, 하나님은 보내셨습니다. 누가 이 큰 그림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섭리는 당시에는 큰 고통으로 다가오지만, 아름다움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롬8:28). 이 복된 해피엔딩은 요셉의 용서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신자의 해피엔딩 역시 예수님의 희생, 낮아짐과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에 가능하게 되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로마서 8장 28절의 성취를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