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편
[개 요]
주제-이 시는 “아들이신 메시아의 시”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에는 주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를 대적하고 분노하는 사람들, 아들을 높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 원수를 제압하는 아들의 궁극적인 통치에 대한 묘사가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을 이기고 승리하실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읽어야 한다. 로스(Lowth)는 이 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원수들의 대적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왕위에 오른 것이 이 시의 주제이다. 다윗에 대해 문자적으로, 그리고 비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실존했던 다윗을 염두에 두고 읽어 보면 그 뜻이 분명해지고, 구약의 역사를 노래한 시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이란 실존 인물에 대해서만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화려하고 장엄하며, 과장된 표현들이 있어서 더 중요하고 숨겨진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따라서 영적 다윗을 염두에 두고 이 시를 읽어 보면 일련의 고귀한 사건들을 묘사한 것임을 곧바로 알게 되고, 그 의미가 더 고상해질 뿐만 아니라 더 명백해진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에 대한 묘사로 보기에는 너무 장엄하고 대담한 표현들이, 그가 상징하는 영적 다윗을 묘사한 것으로 보게 되면, 합당한 표현이 된다. 이 시를 먼저 역사적 인물 다윗에 대한 묘사로, 다음에는 영적 다윗에 대한 묘사로 살펴본 후에, 종합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이 매혹적인 시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이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독특한 내용이지만 구구 절절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어떤 의미가 우선한 것이며 또 어떤 의미가 뒤따르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이제 여러 가지 어법을 새롭게 깨닫게 되고, 시편의 장엄하고 고귀한 정서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해 아래 속한 일에서 하늘에 속한 일에 대한 묘사로, 사람에 대한 묘사에서 하나님에 대한 묘사로 이해하게 되고, 마침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존전에서 일어나는 일로 이 시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네 장면으로 나누어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1-3절분노하는 열방들.
4-6절하늘에 계신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심.
7-9절아들이 명을 발함.
10-12절주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자에게 순종하라는, 군왕들에 대한 권고.
이러한 구분은 시편의 내용에 근거한 것일 뿐 아니라, 또한 3절씩 4연으로 구성되는 시의 형식을 따른 것이기도 하다.
[강 해]
1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2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3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처음 세 절에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인간 본연의 증오심이 묘사되어 있다. 사도행전 4:27, 28에 나타난 사도들의 말이 이 구절에 적합한 해설이 된다:“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1절.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이 시는 분노에 가득 찬 질문으로 시작한다. 시편 기자는 피조물이 서로 힘을 합하여 그들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을 보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가 이렇게 분노로 가득 찬 질문을 던지며 시를 시작하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열방은 하나님을 향해 분노했다. 마치 바다에 폭풍이 몰아치고 파도가 노도처럼 일렁이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 마음속에 헛된 것을 꾀한다.
2절.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분노가 많은 곳에는 잘못된 것이 있게 마련이며, 여기서는 악의가 넘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소동은 단순히 사람들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지도자들이 반역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하라.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악의를 품고서 동맹을 맺었다. 그들이 평화의 아들을 대적하기로 결심하고 나서는 것은 일시적인 분노에서가 아니며, 마음속 깊이 뿌리를 내린 증오심 때문이다.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어쩌다가 우발적으로 일어난 행동이 아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집요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며 전쟁을 벌인다. 그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지혜를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들은 바로처럼 외쳐 댄다:“그들을 지혜롭게 대하자.”
원수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혜의 절반이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할 수 있다면! 세상의 죄인들은 지혜롭지만, 성도들은 둔하다. 죄인들은 왜 이처럼 난동을 부리는가?
3절.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이렇게 외치는 듯하다:“이제 어떤 가증한 일이라도 자유롭게 하자. 이제 우리 자신이 우리의 신이 되자. 우리를 속박하는 것을 모두 벗어 버리자.” 그들은 배반자의 오만함에 더하여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라고 외친다. 마치 그들이 정말 끊어 버릴 수 있기나 한 것처럼 착각한다. 뭐라고! 너희 군왕들이 삼손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너희들이 지극히 높으신 자께서 정하신 것을 파괴하고 부셔 버릴 꿈을 꾼다는 말인가? 그렇다! 이렇게 오만했던 군주들이 있었고, 지금도 이런 권세자들이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미친 듯이 대적하려 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창조된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나라들에 무서운 심판을 내리시고 마침내 마지막 날에 영광스러운 통치를 하실 것이다. 그분의 오심은 쇠를 연단하는 불이나, 옷을 깨끗하게 하는 비누와 같을 것이며, 그날은 용광로의 불처럼 불사르는 날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당연히 통치해야 할 왕을 사랑하지 않고 배반자를 따른다. 마지막 날은 죄를 사랑하는 세상에 대해 종막을 고하고, 여호와의 나라를 그의 외아들에게 주시는 능력이 나타나는 날이다. 잔혹한 자의 목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멍에를 견딜 수 없다. 그러나 이 멍에는 구원받은 죄인에게는 가볍고 쉽다. 우리는 이것으로 우리 자신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멍에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이것을 벗어 버리기를 원하는가?
4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4절. 이제 악한 자들의 은밀한 반역과 사람들의 분노에서 눈을 돌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바라보자.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모든 만물의 후사가 되신 그분의 외아들을 반역하는 사람들에 대해 왕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전능하신 자의 엄숙한 위엄, 세상의 관원들과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퍼붓는 그분의 경멸을 주의깊게 보라. 그분은 이런 사람들과 다투지 않으신다. 다만 경멸하실 뿐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이성적이며,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아신다. 그러므로 그들을 향해 단지 웃으실 뿐이다.
5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6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5, 6절. 그가 웃으신 후에 말씀하실 때가 온다. 배반자들을 후려칠 필요도 없다. 단지 입술을 움직여 말씀하시는 것으로 충분하다. 왕들의 힘과 열방의 분노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분은 그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그분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그분의 말씀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말씀이다:“너희들이 내게 적의를 품어도, 열방이 모두 모여 나를 대적해도, 너희들이 모든 지혜를 다하고 무슨 꾀를 부려도,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이것은 정말 놀랍고 장엄한 선포가 아닌가! 대적하는 자들이 막고자 하는 바로 그 일을 하나님은 이미 행하신 것이다. 그들이 꾀하는 동안, 그분은 이미 이루셨다. 사람들의 뜻은 헛된 것으로 돌아가고,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
하나님을 반역한 인류의 모든 역사를 돌이켜 보라.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했던 오만한 자들의 말, 땅의 파도 소리를 들어 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여 보라:“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예수께서 지금도 세상을 통치하시지만, 온전한 그의 나라는 앞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분이 능력을 발하시고 땅 끝까지 통치하시는 날, 아무런 고통이 없는 그분의 나라는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도 그분은 시온에서 통치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즐거이 평화의 아들에게 찬송을 돌린다. 앞으로 더 큰 투쟁이 있을 것이나, 승리는 우리 주시요 왕이신 그분의 것이다. 영광스러운 승리가 곧 올 것이다. 오, 주여! 기도하옵나니 그 나라가 속히 임하게 하소서. 왕께서 시온에 거하시고, 모든 원수에게서 보호해 주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것이 시온의 영광이요 기쁨이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교회 가운데서 영광과 능력의 보좌에 앉으셨다. 그분 안에 있으면 시온은 안전하다. 시온의 백성들은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라!
시온의 성벽은 힘이 있도다
그 성문은 하늘 군대가 지키네
그 성의 기초는 흔들리지 않으리니
그분의 권고와 사랑 위에 세워진 까닭이네.
너의 원수가 헛된 꾀를 꾀하고
하나님의 보좌에 분노를 쏟으며
성난 파도가 일어 해변을 덮치나
파도는 더 이상 나아오지 못하네.
7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이 시는 7절에서 또 다른 화자가 나타나 극적인 형태를 취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악한 자들의 모임(1-3절)과 하나님의 보좌(4-6절)를 모두 바라보았다. 이제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께서 그분의 통치권을 선포하며, 반역자들에게 임할 심판을 경고하신다.
7절. “내가 영을 전하노라.” 하나님은 악한 자들의 꾀와 분노를 비웃으셨다. 이제 기름부음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구속주로서 직접 말씀하신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은 반역을 일으킨 왕들의 분노한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아직까지도 침묵하지 못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영을 전하리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사람들이 꾀하는 것과 정반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열방이 분노하며 무너뜨리기를 원하는 그런 나라를 세우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말씀은 임마누엘이신 예수의 영광스러운 신성을 증언하는 구절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히 1:5). 우리가 참으로 신뢰할 수 있는 구세주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자비인가!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 구절이 우리 구주의 신성을 말하고 있다면, 이것을 불경스럽게 분석하려고 하지 말고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자. 만일 이 구절이 아들께서 인성을 입고 오신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또한 이 신비로운 사건을 즐거워할 것이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비밀을 불경스럽게 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헛된 생각으로 추측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삼위일체의 신비에 정의를 내리고 거룩하신 분의 신성을 벗기려고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난파를 당했다. 망망대해에서 우리의 작은 배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8절. “내게 구하라.” 위대한 군주는 신뢰하는 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주는 관습이 있었다(참조. 에 5:6; 마 14:7). 예수께서는 무엇이나 구하는 것을 받으셨다. 8절에서 그는 열방이 그의 유업이라고 선포하셨다. 그분은 열방의 면전에서 하나님의 영을 전하셨다. 기름부음을 받으신 그분은 한때는 못박히신 손에 이제는 권능의 홀을 잡으시고 이렇게 외치신다:“하나님께서는 내게 왕의 지위만 주신 것이 아니라 원수를 정복할 권능도 주셨다.” 그렇다! 여호와께서는 기름부음을 받으신 그분께 철장을 주셔서 반역을 꾀하는 열방을 깨뜨리게 하신다. 그들이 비록 제국의 힘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손에 철장을 들고 일어서시는 날에는 토기장이의 그릇이 깨어지듯 열방이 깨어질 것이다. 굽히지 않는 자는 부러질 뿐이다. 토기장이의 그릇이 깨어진 후에는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께서 죄인을 심판하신 후에는 아무런 소망도 없다.
너희 죄인들은 그분의 은혜를 구하라
그분의 진노를 감당할 수 있는가?
그분의 십자가 그늘에 피하라
그리고 거기서 구원을 얻으라.
10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이제 시편의 장면이 바뀌어 마지막 연에서는 반역을 꾀하는 자들에게 권고하는 말씀이 주어진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들이 미워하던 아들께 입맞추고 충성과 애정을 맹세해야 한다.
10절. “지혜를 얻으며.” 우리는 항상 교훈을 받을 태도를 가져야 하며, 이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특별히 영혼의 구원을 얻게 하는 교훈은 당연히 받아야 한다. 원수들은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이성을 따라 행해야 한다. 너희들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나니, 헛된 꾀를 버리고 그분께 기꺼이 순종하라. 그분의 멍에를 메지 않으면 네게 심판이 임할 것이다. 예수께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가! 그분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두려운 일인가!
11절.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너는 하나님을 섬길 때에 두려움과 겸손으로 하라.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그러므로 고개 숙여 겸손히 그분께 경배를 드리고, 크신 하늘의 아버지께 두려움으로 순종하라.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에는 항상 거룩한 두려움이 함께 있어야 한다. 두려움과 기쁨이 함께하는 제물은 향기로운 제물이며, 그분의 제단에 다른 제물을 드려서는 안 된다. 기쁨이 없는 두려움은 고통스러운 고문이다. 그리고 거룩한 두려움이 없는 기쁨은 주제 넘고 뻔뻔스러운 것이다.
그분과 화해하고 순종하라. 죄 가운데서, 그분께 반역하는 가운데서 멸망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그분의 진노 아래 갑자기 멸망하지 않는가! 그분의 분노가 일곱 배나 더할 필요도 없다. 그저 조금만 분노하셔도 우리는 멸망당하기에 충분하다. 오, 죄인들아! 우리 주님을 두려워하라!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을 기억하라.
12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이 시는 축복의 말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여호와의 복을 받았는가? 그분을 신뢰하는가? 우리는 거미줄처럼 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참된 것이라면, 우리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면 할수록, 이 복을 온전히 알아 갈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기도로 이 시편의 묵상을 끝낼 수 있다:“주여, 우리 믿음을 더하소서.”
시 1편에는 의로운 자와 죄인의 대조가 나타나 있다. 시 2편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경건한 열방들이 불순종하는 것과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승리할 것이 대조되어 있다. 시1편에서, 우리는 악인이 겨처럼 바람에 날려 가는 것을 보았다. 시2편에서, 그들은 토기장이의 그릇이 깨어지듯 부서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시1편에서, 우리는 의로운 자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도 같다는 것을 보았다. 시2편에서, 의로운 자들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보다 더 귀하신 분으로 묘사되었다. 그분은 모든 나라의 왕이 되시고, 그분을 대적하던 열방은 그분 앞에 엎드려 땅에 입을 맞추게 되고, 그분을 신뢰하던 자들은 축복을 받는다.
우리는 두 편의 시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이것들은 시편 전체의 서론과도 같으며, 고대의 어느 누군가는 이 두 시들을 하나로 묶어 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들은 두 편의 시이다. 바울도 이 점에 대해 말했다(행 13:33). 시 1편은 의로운 자의 특성과 운명에 대해 말한다. 시 2편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땅끝까지 다스리실 아들에 대한 시이다. 이 두 편의 시는 앞날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는 이 깊은 뜻을 모두 다 이해할 수 없다.
[주해와 설명들]
1절.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이것은 폭동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분노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분노하며”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는 사람의 내적 감정이 아니라, 내적 감정을 나타내는 외적 소동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이나 고전 문학에서 사람들의 소동을 상징하기 위해서 바다의 폭풍과 일렁이는 파도를 언급하기도 했다. -알렉산더(J. A. Alexander, D.D., 1850).
1절. “분노하며.” 바울은 사도행전 4:25에서 이 구절을 인용했다.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 단어는 기운차고 위세가 당당한 말이 콧김을 내뿜으며 씩씩거리거나 울음을 우는 동작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말이 울음 소리를 내고 전쟁에 나갈 때의 분노나 오만함 그리고 난폭함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1절. “허사.” 디오클레티안(Diocletian)은 메달을 만들었는데, 그 메달에 새겨진 글자가 아직도 남아 있다:“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사라지다.” 스페인에서는 기념비적 기둥이 두 개 세워졌는데, 거기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1) “디오클레티안 황제, 로마에 파멸을 가져온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사라지게 한 것을 기념하여.” (2) “디오클레티안 황제, 그리스도에 대한 미신을 폐하고 여러 신들을 널리 섬기게 한 것을 기념하여.” 한 현대 작가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이방인들은 그들의 원수를 죽이고 장사 지낸 후, 그 위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던 ‘헛된 것’은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박해는 기독교가 최종적이고 영원한 승리를 취하는 전야가 되었고, 무덤을 지키던 돌문은 빈 무덤을 지킬 뿐이었다. 스페인이나 어디서도 기독교의 무덤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살아 있는 자에게는 무덤이 없기 때문이다.”
1-4절. 여우와 같은 헤롯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그분의 사역을 방해하여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지 못하게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행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라고 기록되었다. 열방이 이것에 성공할 수 없고, 그들의 손으로 행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이것은 허사이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 허사인 이유는 이것을 행할 어떤 올바른 근거도 없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수고하여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주께서는 그들이 얼마나 바보 같은 존재인지 알고 계시며, 마침내 그들 자신들도 이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선지자는 이 점에 대해 유창하게 묘사했다:“[그들은]······거미줄을 짜나니······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사 59:5, 6). 그가 말했듯이 그들은 파리를 잡고자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거미가 배에서 거미줄을 짜 내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머리에서 실을 짜 내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이 짜 낸 옷감이다. 그러나 그들은 옷감을 자를 수도 없고, 옷을 만들 수도 없다. 그들은 힘들여 물레를 돌리며 머리에서 실을 짜 내어 음모를 꾸미고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지만, 결국에는 벌거벗어 추위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에 비질을 하게 되면 이 모든 거미들과 거미줄들을 모두 쓸어 버릴 것이고, 그들도 황급히 기어서 도망갈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와 세상의 재주를 헛된 것으로 돌리기를 기뻐하시며 사랑하신다. -조셉 캐릴.
2절. 수많은 사람들이 할 일을 마친 후, 이제는 능하신 자께서 나타나신다. -존 트랩.
2절.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그들은 왜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여 힘을 합했는가? 그에게서 무엇을 빼앗고자 했는가? 그의 재물인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소유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이 그분보다 재물이 많고 더 부유했다. 그의 자유를 빼앗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이것으로 만족할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전에 그를 결박하기도 했었다.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도록 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이미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고, 제자들도 그를 떠나 버린 마당에 이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빼앗고자 했을까? 그의 피인가? 그렇다. 마태는 “그들은 그를 죽이려고 꾀했다”고 증언했다. 그들은 마귀의 마음을 가져서 그의 죽음으로만 만족할 사람들이었다. -헨리 스미스(Henry Smith, 1578).
2절.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그들이 다윗을 여호와와 함께 취급하다니, 이는 다윗에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증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의 죄가 더해지고 이성을 잃어버린 이방이 심판을 받는다면, 비록 그들이 지금은 교만하고 오만하게 행한다 할지라도 다윗의 마음은 평안과 기쁨을 누리리라······다윗이 이 시편을 쓰던 당시에 그는 태풍 한가운데 갇힌 자처럼 되었고, 노도처럼 부서지는 파도가 그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듯 주위를 덮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사람들이 허사를 경영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들이 어찌 하나님의 뜻을 파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주의 기름 부음 받으신 자를 해할 수 없다. -데이비드 피트케른(David Pitcairn, 1851).
3절.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그들은 법도 없고, 두려움도 없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작심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한 달콤한 법을 노예에게 지우는 결박으로 간주했다(참조. 렘 27:2, 6, 7). 그러나 우리의 구세주는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날개가 새에게 짐이 되지 않듯이 이것은 거듭난 자에게는 아무런 짐이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법은 결박이 아니라 허리띠와 같아서 허리를 동이고 달려갈 길을 빨리 달리게 한다. -존 트랩.
4절. “하늘에 계신 자.” “하늘에 계신 자”라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1) 하나님은 사람들이 악한 마음으로 훼방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2) 그분은 사람들의 음모를 내려다보시며 다 아신다. (3) 그분은 전능하시며 원하시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다:“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아서 잭슨(Arthur Jackson, 1643).
4절.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죄인들이 꾸미는 음모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지혜와 능력에 견줄 수가 없다. 우리가 보기에 사탄의 왕국이 난공불락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비열한 것이고 아무것도 아니다. -매튜 헨리.
4절.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우리를 비웃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웃으신다. 그분의 웃음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다. 이 웃음은 조롱의 웃음이며, 심판의 웃음이다. 바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장자를 물에 빠뜨려 죽이면서 이스라엘의 이름을 이 땅에서 뿌리째 뽑아 버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물에 빠뜨리는 동안 그의 딸이, 그의 궁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자 모세에게 애굽의 왕자들이 받는 교육을 베풀지 않았던가?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웃고 계시지 않았겠는가? 악인의 기쁨은 잠깐뿐이다. 그들이 다곤 신을 섬긴다고? 하나님은 그들을 비웃고 다곤 신의 목과 손을 부러뜨리셔서 사람을 인도하고 보호할 지혜나 능력을 남겨 두지 않으신다······그분은 이방인들이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포위하고 약탈하도록 허락하셨다. 그래서 바벨론 사람들은 성전의 기물을 바벨론 땅으로 가져가서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웃으시며 벽에 글을 쓰시니 벨사살이 두려워 떨지 않았던가? 그분의 웃음이 이처럼 두려운 일일진대, 그분의 분노는 어떠하랴! -토머스 애덤즈.
4절.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하늘에 계신 자”라는 구절을 읽으면 하나님은 땅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무한히 위에 계신 분, 높이 계신 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높이 계신 그분은 웃으신다. 이 땅에 속한 왕들과 민족들, 그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그분의 백성들을 해하려 한다 할지라도, 그분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하찮은 것일 뿐이다. 그분은 당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가련한 모습을 보고서 두려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어리석음을 보고 웃으시며, 무능한 모습을 비웃으신다. 그분이 마음만 먹으면 어느 때고 부숴 버릴 수 있고, 한 순간에 입김으로 소멸해 버릴 수도 있다. 이러한 진리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 일인가! 아, 이 땅의 질그릇 같은 존재들이 하늘에 계신 분, 영광스러운 지존자와 겨룬다는 것이 얼마나 “허사”일 뿐인가! -데이비드 피트케른.
4절.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이처럼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반복법은 성경에 흔히 나타나는 표현법이다. 이미 확정된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반복법을 쓴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서 이렇게 말했다:“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속히 행하시리니”(창 41:32). 하나님께서 “웃으심이여,” 그리고 “비웃으시리로다”라고 반복해서 기록한 것은 이 일이 필연코 일어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이 일을 행하심은 우리로 위안과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며, 우리가 시험을 당해도 낙심치 않고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고개를 들게 하려 하심이다:“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7). -마르틴 루터.
5절. “진노하사.”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하시든 전염병이 돌게 하시든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분의 백성을 박해한 자들에게 보응하신다. -존 트랩.
5절.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하나님께서 그분의 원수를 심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바로를 보라. 그의 모사들, 군대들, 전쟁에 쓰는 준마들이 갈대가 물에 휩싸이듯 홍해 바다에 빠져 들지 않았던가?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들을 대적하는 자들은 이처럼 비참한 종말을 당할 뿐이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잔혹하게 박해하는 데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로마의 황제들, 총독들 그리고 다른 고위 관리들 중 30명을 뽑아 그들의 종말을 살펴보았다. 한 사람은 성도를 잔혹하게 고문하고서 곧 자신이 발광하고 말았다. 또 한 사람은 그의 자식에게 죽음을 당했고, 또 다른 사람은 눈알이 머리에서 튀어 나와 눈이 멀고 말았다. 물에 빠져 죽은 자, 목매어 죽은 자, 포로로 잡혀 가서 죽은 자, 차마 볼 수 없이 비참하게 넘어져 죽은 자, 더러운 병에 걸려 여러 의사들이 그가 있는 방안에 들어가지 못해서 처형을 당할 만큼 지독한 냄새를 풍기다 죽은 자, 두 사람은 자살했고, 한 사람은 자살하려다가 실패해서 다른 사람이 죽여 주어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 다섯 사람이 그의 백성이나 종들에게 암살당했고, 또 다른 다섯 사람은 가장 처참한 병에 걸려 죽었고, 여덟 사람은 전쟁에서 죽거나 포로로 잡혀 가서 죽었다. 마지막으로 배교자 줄리안은 어떠했는가? 그는 번영을 누리던 시대에 단도를 빼어 들고 하늘을 향해 휘두르며 하나님의 아들을 “갈릴리 사람”이라고 부르며 모독했다. 그가 전투에서 상처를 입고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을 알았을 때, 피 묻은 자신의 옷을 하늘로 던지며 이렇게 외쳤다:“갈릴리 사람, 당신이 이겼습니다.” 프랑스 왕 샤를 9세(Charles IX)는 기독교인을 무참히 학대했는데, 볼테르(Voltaire)의 글에는 땀구멍으로 피를 쏟으며 죽어간 그의 극심한 고통이 나타나 있다. -윌리엄 플러머(William S. Plumer, D.D., LL.D., 1867).
6절.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메시아에 대해 다음의 특성에 주의를 기울이라. (1) 영광스러운 구세주의 직위와 특성-그분은 왕이시다:“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 19:16). (2) 통치하시는 그분의 권위-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을 “나의 왕”이라 하신다:“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아들에게 모든 심판을 맡기셨다.” 세상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분이 메시아를 왕으로 세우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 (3) 그분이 다스리는 왕국-“내 거룩한 산 시온”은 교회의 모형이 된다. 성전이 시온산 위에 세워졌기에 그 산을 거룩한 산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보좌는 교회에 있으며, 이 교회는 그분의 지휘소가 되고 그분이 거하시는 곳이 되었다. 하나님의 뜻은 확고하다:“내가 나의 왕을······세웠다.” 이 세상과 사탄의 세력이 메시아를 대적해도, 그분은 아버지의 세우심을 따라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스티븐 차녹(Stephen Charnock, 1628-1680).
6절.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 가지 면에서 왕이시다. 첫째, 원수에 대한 왕이시며, 둘째, 성도들의 왕이시며, 셋째, 아버지의 왕이시다.
첫째, 그리스도는 원수들의 왕, 즉 원수들보다 위에 계신 왕이시다. 그리스도는 모든 왕들의 왕이시다. 이 세상에 속한 권세자들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그리스도를 필적할 수 없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이렇게 표현했다:“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사 40: 15). 그렇다면 세상의 왕들이 어떻게 메시아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왕들 위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천사들 위에 계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들도 그분께 경배하라고 하지 않았는가(골 2:12; 히 1:6)······그분은 모든 왕국과 모든 나라들과 권세들과 백성들 위에 계신 왕이시다(단 7:14)······하나님은 열방을 그리스도께 주셨고, 땅 끝까지 모두가 그분의 소유이다(시 2:8).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왕이시다. 그분은 악인과 선인, 모든 사람의 왕이시다. 악인에게는 능력과 권세를 보이며 통치하시나, 성도들에게는 은혜와 성령으로 다스리신다. 아!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이며, 그분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다스리신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성도들의 양심과 의지를 다스리시며, 그들의 사랑도, 그들의 판단까지도 모두 다스리신다. 그리스도는 나라들 위에 군림하여 통치하시나, 성도들을 대하여는 그들 안에서 다스리신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왕이시다. 아버지께서도 그를 왕이라고 부르셨다:“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그분이 아버지의 왕이라면, 당연히 우리의 왕도 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아버지의 왕이 되신단 말인가?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 두 가지의 왕국을 맡기셨다. 첫째, 영적 왕국인데 이는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서 다스리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성도들의 왕이시다. 둘째,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세상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주관하신다. 그분은 나라들의 왕이시다. -윌리엄 다이어(William Dyer, Christ’s Famous Titles에서 요약한 것, 1665).
7절.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우리 주님께서 아들이 되셨다는 것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을 하는 자들은 대부분 경외하는 믿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제 넘은 호기심을 보일 뿐이었다. 이 진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경배할 내용이다. 믿음과 경외심을 보이지 않는 신학자들의 논쟁은 아무런 유익도 없다. -C. H. S.
8절. “내게 구하라.”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심에 대해 이보다 더 명확하게 표현한 구절은 없다. 그분은 왕이시며, 또한 대제사장이시다. 그분은 이 두 가지 직책을 모두 하나님에게서 받으셨다. 그분이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해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것처럼, 또한 같은 권위에 근거해서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이다.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구하신다. -스티븐 차녹.
8절.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초상화를 그리는 자들은 사람을 보고서 가능한 한 그와 똑같은 모습을 그리려고 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원형으로 보시고, 성도들이 고난과 은총을 받고 영광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닮아 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성도들보다 뛰어난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듯이 성도들도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고난과 같은 고난을 당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모든 성도들도 거룩해야 한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리스도처럼 거룩해질 수는 없다. 이는 진흙에 새겨진 것을 순금에 새겨진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또 다른 면에서 그리스도를 닮았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도를 통해 실현하셨다. 이처럼 성도들도 약속으로 받은 것을 기도로 실현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에게 “내게 구하라 내가······주리니”라고 하셨듯이, 야고보 사도는 성도들에게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가 붙드는 나의 종”(사 42:1)이라고 하시며 모든 고난 가운데서 그분을 돕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죽음의 그늘 아래 섰을 때에 ‘말할 수 없는 탄식과 눈물’로 기도하셨다. 그분은 성경에 약속된 “씨”이시며, 원수들을 이기고 승리하실 것이 약속된 분이시지만, 그분은 이 일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는 왕으로 통치하시고, 하나님을 향하여는 대제사장으로서 간구하신다. 그분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와 간구로 말씀하신다.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다. 우리는 정욕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원수들을 정복하는 정복자가 될 것을 약속받았다. 또한 위대한 약속이 실현되기를 겸손히 기도하며 간구하는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윌리엄 거놀(William Gurnall, 1617-1679).
8절.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 너의 기업을, 그리고 너의 소유, 땅 끝을 주리니.” 히브리어 성경으로부터 8절을 이렇게 직역할 수 있다. 이 구절을 깊이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라”고 부르는 자를 위해서 열방과 땅 끝을 그에게 주기로 이미 예정해 놓으신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실 때는 아들이 받을 기업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정된 기업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다. 이방은 이미 아들의 “기업”으로 예정된 것이며, 땅 끝도 그분의 소유로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으셨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내게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본문에 함축된 의미이며, 이 의미를 영적 다윗 곧 하나님의 진실된 아들, “만물의 후사로 정하신 분”에게 적용하게 되면 그 중요성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9절.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장”(杖)이란 성경에서 여러 의미로 쓰인다. 이것은 사용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물질로 만들 수 있다. 초기에는 왕권의 상징으로서 나무로 만들어진 장을 썼는데, “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홀은 그 중요성이 더함에 따라 제국이나 특정한 왕의 통치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금으로 만들어진 홀은 부와 번영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시편 45:6에 나오는 “공평한 홀”은 정의, 진리, 평등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러한 특성은 이 땅에 세워질 ‘메시아의 나라’의 특징이다. 요한계시록 19:13-15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는 이가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라는 표현이 나온다. “장”이 그분의 “홀”을 말한다면, 이것이 철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전능하신 “왕 중 왕”께서 엄한 심판을 하실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철장”이 재림하실 하나님의 아들이 소유한 ‘왕의 홀’을 의미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것은 “날카로운 검”과 함께 나타나는데, 이로 보아 “철장”도 전쟁의 도구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지 시편에 나오는 “철장”은 주권자의 손에 쥐어진 것이지만 권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교정과 책망의 도구이다. “장”은 이런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책망의 도구로 쓰이는 “장”은 주로 지팡이를 썼는데, 시 2편에서는 “철장”으로 책망하신다고 기록되었다. 이것은 책망이 얼마나 엄격하고 무서울 것인가를 말해 준다. 이 책망을 받는 자는 단순히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깨어지고 말 것이다:“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철장”으로 깨뜨린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다음 구절에 그 결과가 나타나 있다:“질그릇같이 부수리라.” 깨는 도구가 “철장”이고, 깨어지는 것이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이며, 깨는 자가 온 힘을 다해 휘두른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질그릇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시편에 나타난 이 예언과 약속은 구약 역사에 나타난 다윗을 통해서는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을 뿐이며, 온전한 실현은 영적 다윗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영적 다윗이 왕 중 왕으로서, 위엄과 영광 중에 그 손에는 철장을 쥐고 나타나시는 날이면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적그리스도의 세력들, 세상에 속한 왕들과 민족들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질 것이며,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약속하신 것, 비싼 값을 치르고 사신 당신의 기업을 취하실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징조를 볼 때,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 -데이비드 피트케른.
10절.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예수께서 모든 왕들의 왕이신 것처럼, 복음은 가장 위대하고 지혜로운 교사다. 어느 누구든지 자신을 위대하다고 생각하여 그 교훈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낮추실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여 그 가르침을 멸시한다면, 그들의 지혜로 말미암아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 것이다. 세상의 관원들도, 군왕들도 모두 복음을 들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왕들 앞에 섰을 때에도 담대하게 선포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권세 앞에서 아첨하는 자들은 마귀의 부엌에서 접시나 닦아야 할 것이다. -C. H. S.
11절.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진정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두려움이 없는 기쁨은 경망스럽고 무엄한 것이다. 또한 기쁨이 없는 두려움은 노예의 두려움이다. -윌리엄 베이츠(William Bates, D.D., 1625-1699).
11절.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을 섬기고 즐거워하는 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안일하게 섬기면서도 어떤 두려움도 없이 기뻐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을 위하는 위선자들이며, 자신이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주제 넘게 생각하는 자들이다. 이들에 대해 시편 기자는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시 10:5)라고 했으며, 또한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시 36:1)고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의롭게 보며,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할 심판주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 중에서 그분 앞에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아무도 없다. 둘째, 두려움 가운데 섬기고 떨면서 기뻐하는 것이다. 의로운 자들은 이렇게 살아간다. 이들은 자신들이 행한 모든 일에 대해 심판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두려워하며, 또한 그들의 의로운 행동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자비가 있었음을 알고서 기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을 돌아보아 반성하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린다. 잠언은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잠 28:14)라고 했으며, 빌립보서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고 했다. 이들은 이런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자들이다. -마르틴 루터.
11절.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새벽별이 나타나면 곧 따스한 태양이 떠오르듯,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영적 기쁨을 자아낸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행하고, 성령의 위로 가운데서 살아가라.” 하나님은 두려움과 기쁨을 함께 주셔서, 우리로 노예처럼 두려워하지 않게 하신다. -토머스 왓슨(1660).
12절. “입맞추라.” 입맞춤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표시로 나누는 것이다(창 33:4; 삼상 20:41; 롬 16:16; 고전 16:20). 입맞춤은 또한 열등한 자가 위에 있는 자에게 복종하는 순복의 표시로 하는 것이다(삼상 10:1). 또한 예배하는 자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며 입맞춤을 할 수 있다(왕상 19:18; 욥 31:27). -존 리처드슨(John Richardson, 아르다의 감독, 1655).
12절.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아들에게 입맞추라고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높이고 찬양하세! 이제 이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행할 일이다. 구약에서는, 심지어 아가서에서도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아 1:1)라고 말하며 술람미 여인이 입맞춤받기를 원했는데, 이제 주님은 그리스도의 교회 중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로 그분께 “거룩한 입맞춤”으로 진실된 사랑을 보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이 진실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경외함이 따르는 사랑’이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이 아니면 주님은 “진노”하신다. 사랑의 주님은 또한 공의 가운데 진노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진노를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된 사랑으로 사랑하며 입맞추면, 그분의 진노는 속히 떠나간다.
12절.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1)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이 말씀은 당신이 인생길을 걷는 동안 그분을 당신의 친족으로, 당신의 주권자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당신이 나갈 때나 들어올 때,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일에나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대할 때, 어느 때나 하나님의 아들을 당신의 주님으로 삼고 순복하라는 말이다. 그분께 입맞추되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입맞춤은 사랑하는 자가 소망하는 것이다:“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아 8: 1).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다른 사람들의 멸시를 받게 된다면 다윗을 생각하라. 그도 하나님의 궤 앞에서 춤을 추다가 다른 사람들의 멸시를 받기도 했다. 당신이 주를 섬김으로 사람들의 비웃음을 당할 때 두려워하지 말라. 사람들이 당신을 비웃고 괴롭게 할 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평강으로 채워 주시리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진노”로 인해 질서가 파괴되고 사람을 괴롭히게 된다면, 이 진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원수와 친구를 분별하는 분노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과 가리는 것을 분별하는 진노라면, 이 진노는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다. 힐러리(Hilary)는 “사람의 고난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것이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왕이시며 진노하실 때에 사람에게 벌을 주신다. 그러나 이 시편에 나오는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 우리가 입맞추어야 하는 아들의 진노이다. 우리는 아들을 대하면서 마땅히 하나님을 대하듯 해야 할 터인데 사람을 대하듯 하며, 심지어 사람보다 못한 존재처럼 너무도 쉽게 대하지는 않는가? 이렇게 하면 그분은 진노하시고 우리는 파멸에 이르게 된다······. (3)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리하면 아들은 진노를 멈추실 것이다. 그분이 진노하시면, 그분의 철장에 입맞추라. 그리하면 진노가 떠나리라. 그분이 진노하실 때에 그분을 두려워하라. 당신을 속히 회복시키시리라. 입맞춤의 향기를 통해 영적 양식을 채우고, 심판 중에 자비를 얻고, 파멸 가운데서 회복하게 되며, 참회의 기간 중에 축제를 벌이고, 진노 가운데서 기쁨을 얻게 된다. -존 던(John Donne, Dean of St. Paul’s, 1621-1631).
12절. “아들에게 입맞추라.” 아버지와 화목하기를 원한다면 아들과 입맞추라.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아 1:2)라는 구절은 교회가 드리는 기도였다. 이제 그분께 입맞추자.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비를 베푸사 먼저 우리에게 입맞추어 주시면, 우리는 경건함으로 그분께 입맞출 수 있다. 주여, 이러한 입맞춤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사 우리로 기름지고 풍성한 결혼 잔치에 참여케 하소서. 어린 양의 신부를 보며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이 결혼의 축가를 부를 때에 우리로 당신께 입맞추게 하소서. -토머스 애덤즈.
12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분의 코(콧구멍)가 조금만 달아올라도”라고 표현되어 있다. 콧구멍은 진노가 나타나는 기관이므로, 이 기관을 들어 진노를 표현했다. 코가 창백해진다거나 콧김을 뿜는 것은 진노의 표현이다. 우리들의 표현으로도 코방귀를 뀐다는 것은 분노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조셉 캐릴.
12절. “그 진노.” 그분이 조금만 진노하여도 파멸을 당하거늘, 진노가 극에 달한다면 그 참혹한 결과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존 뉴턴(John Newton).
[설교힌트]
시 2편 전체. 죄의 특성을 보여주고, 죄가 다스릴 경우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을 보여준다.
1절. 비종교적인 것보다 더 비이성적인 것은 없다. 중요한 주제이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유들, 그에 대한 반박, 그들을 향한 애도, 회개, 중보자를 향한 증오에 나타난 인간의 죄악된 모습.
1-2절. 복음에 대한 박해는 비이성적이고 비효과적이다. 존 뉴턴이 두 편의 설교를 했다.
1-2절. 이 두 구절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모두 헛된 것임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수가 많은 것도, 그들의 열심도, 그들의 능력도, 그들의 지혜도 믿을 것이 못 된다. 이것들은 그리스도를 위한다기보다는, 대부분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들이다.
2절. “Spurgeon’s Sermons,” No. 495., “The Greatest Trial on Record.”
3절.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대적하는 참된 이유-하나님께서 그들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에 대한 증오.
4절. 반역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비웃음.
5절. 진노의 소리.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 여러 가지 소리에 대한 시리즈 설교에 포함시킬 수 있다.
6절. 그리스도의 주권. (1) 주권에 대한 저항. (2) 주권의 확실성-“세웠다.” (3) 주권을 유지하는 능력-“내가.” (4) 주권이 나타나는 장소-“거룩한 산, 시온.” (5) 주권적인 축복.
7절. 그리스도에 대해 예정하시고 섭리하신 하나님의 영. 예수의 아들 되심.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사들과 부르심을 성실하게 선포하고, 겸손하게 구할 것을 가르친다. -토머스 윌콕스.
8절. 그리스도의 유업. -윌리엄 제이(William Jay). 기도는 필수적인 일이다. 예수께서도 기도하여 받으셨다.
9절. 악인의 파멸. 악인의 파멸은 확실하고, 꼭 일어나고, 참혹한 것이고, 철저하며, 다시 회복할 수 없다. 이것은 토기장이의 그릇이 깨어지는 것과도 같다. 이 세상의 잘못된 체계에 심판이 임할 것이다. 복음(철장)은 인간이 만든 그릇을 깨뜨릴 수 있다.
10절. 왕과 관원들이 들어야 할 진정한 지혜는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다. 다스리고 재판을 하는 왕과 관원들은 복음의 학교에서 배워야 한다. 그들은 이러한 원리나 본보기 등을 배울 수 있다.
11절. 여러 가지 경험들. 무덤에서 돌아오는 여인들의 경우를 참조하라(마 28:8). 성령께서 설교자의 마음을 주관하시면 이 주제는 깊은 안식을 주는 설교가 될 것이다. 참된 종교에는 여러 가지 덕과 감정들이 포함되어 있다.
12절. 간곡한 초대. (1) 명령. (2) 이유. (3)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 “Spurgeon’s Sermons,” No. 260.
12절 하반절.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속성, 대상, 그리고 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