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1일 “요하네스 브렌츠, 복음주의자”
오늘은 요하네스 브렌츠(Johann Brenz, 1499–1570)가 별세한 날입니다. 1570년 9월 11일, 브렌츠는 뷔르템베르크(Wurttemberg)의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서 고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일 베어 슈타트(Weil der Stadt)에서 태어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수학한 브렌츠는 1518년에 루터를 만남으로 종교개혁자로서의 행보를 시작합니다. 그는 뷔르템베르크의 교회 재조직과 위계질서 확립에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슈투트가르트대학교회의 담임목사였던 브렌츠가 남긴 성경주석은 루터교 정통주의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는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가르치며, 두 본성 교리와 함께 성부와 성자의 위격상의 연합을 역설했습니다.
요한 브렌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의 속성을 소유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사시면서 실제로 신의 속성을 사용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원리 아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시면서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며 편재하실 수 있었다고 믿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라는 인간은 하나님과 동등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브렌츠는 성육신 순간부터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인성과 신성이 위격적인 연합을 통하여 매우 분명히 하나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그리스도는 편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자기를 비우면서 인간으로 사실 때에도 편재성 자체가 제거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러한 신의 속성을 사용하셨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제2위격으로서, 강보에 뉘었을 때나 무덤 속에 있었을 때나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세계를 여전히 지배하고 계셨다.[권문상, 『비움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 (서울: 새물결플러스, 2008), 45-46.]
브렌츠는 루터의 계승자였으나 추종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농민전쟁에 대한 루터의 반응을 비판했던 것입니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브렌츠는 자신을 프로테스탄트보다는 “복음주의자”로 여겼습니다. 브렌츠를 비롯한 루터파 신자들이 칭의를 소중히 여겼던 것만큼 이 교리를 아끼고 있습니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16세기 개신교인만큼 사랑하고 있습니까? 곤란 속에서 복음의 기치(旗幟)를 올렸던 개혁자들을 기억하며 옷깃을 여밉시다.
브렌츠의 성경 주석이나 교회 행정 체계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었던 것은 그의 교리문답서였다. 그의 교리문답서는……수많은 유럽의 지역에서 출판되고 배포되었다. 이미 16세기에 브렌츠의 교리문답서, 그의 교리문답서 해설서 그리고 기타 다른 책들은 라틴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영어, 네덜란드어, 덴마크어, 폴란드어, 체코어, 이탈리아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슬로베니아어로 출판된 최초의 책은 바로 브렌츠의 교리문답서에 대한 개정이었다. 그의 교리문답서는 19세기에도 동일하게 개척자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 시기에 기독교 선교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그의 책은 수많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처럼 브렌츠의 교리문답서는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는 교과서인 동시에 문맹 퇴치를 위한 훈련서가 되었다.[Carter Linberg ed., The Reformation Theologinas, 조영천 역, 『종교개혁과 신학자들』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2), 2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