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3일,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 별세, “프랑스 종교개혁의 선구자”
오늘은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이 별세한 날입니다. 1565년 9월 13일, 파렐은 스위스의 뇌샤텔 주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프랑스 종교개혁의 선구자이며, 칼빈의 오랜 동지였던 파렐은 뇌샤텔에서의 27년 사역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가프(Gap)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교육받았으며, 열렬한 로마 가톨릭 신자로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성경과 교부들을 공부하면서 복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로마교의 교리와 결별하기로 결심한 파렐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쁜 구원의 진리가 더욱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는다면, 사람은 의심 속에서 방황하거나 이성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이것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교황주의의 미신 속에서 진리의 눈이 멀어져 버린 영혼 속에서 무서울 정도로 끔찍한 것들만이 발견된다……명예도 부귀도 나를 교황으로부터 자유케 하지 못하고, 도리어 나를 묶어 두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자유케 하셨다. 세상의 어떤 통찰력과 학식들도 내 마음속에 있는 교황주의의 미신을 제거하지 못했다. 성경만이 나로 하여금 교황주의의 미신으로부터 빠져 나오게 만들었다.[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6세기 종교개혁과 개혁교회의 유산』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316.]
파렐은 탁월한 사상가나 저술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같은 개혁가였으며, 열정적인 설교자였습니다. 무엇보다 파렐은 칼빈을 설득하여, 제네바의 종교개혁가로 정착하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실천적 종교개혁가였던 파렐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작인 『신학총론』(15242)의 서문에서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오히려 추천하였습니다. 자신보다 20살이나 어린 동료의 탁월함을 간파하고 겸손히 자리를 내어준 파렐을 통해 배웁시다.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이면서 “꼰대”가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한계에 주저앉지 말고, 주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은사”를 잘 활용합시다. 비진리와 오류 앞에서 담대하게 저항합시다. 형제들이 부르심에 따라 살 수 있도록 격려합시다. 파렐처럼 말입니다.
칼빈의 거절에 단념치 않고, 파렐은 칼빈의 이기적인 계획을 무섭게 비난하면서, 그가 제네바에 남아서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그의 학문적인 삶을 저주하실 것이라고 선언했다. 칼빈은 이 선언에 압도되었다. 훗날 이 사건을 두고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렐은 충고나 간청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명령으로 나를 제네바에 남게 했는데,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높은 곳으로부터 당신의 손을 뻗으셔서 나를 사로잡으시는 것과 같았다.”[Carter Lindberg, The European Reformations, 조영천 역, 『유럽의 종교개혁』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2), 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