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발 앞에 무릎 꿇고 그 진실한 음성을 듣네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 앞에 나의 삶을 드리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 자비하심 무궁하며
날마다 새로운 그 성실한 이름 앞에 나의 삶을 드리네
나의 삶을 드리네
하나님 나 여기 있사오니주 뜻대로 날 사용하소서
하나님 나 여기 있사오니주 뜻대로 섬기게 하소서
히브리서13:1-8
[새번역]
1. 서로 사랑하기를 계속하십시오.
2.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
3.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되,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도 몸이 있는 사람이니, 학대받는 사람들을 생각해 주십시오.
4. 모두 혼인을 귀하게 여겨야 하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5. 돈을 사랑함이 없이 살아야 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셨습니다.
6.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다. 누가 감히 내게 손댈 수 있으랴?"
7.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은 분이십니다.
[NIV]
1. Keep on loving each other as brothers.
2. Do not forget to entertain strangers, for by so doing some people have entertained angels without knowing it.
3. Remember those in prison as if you were their fellow prisoners, and those who are mistreated as if you yourselves were suffering.
4. Marriage should be honored by all, and the marriage bed kept pure, for God will judge the adulterer and all the sexually immoral.
5. Keep your lives free from the love of money and be content with what you have, because God has said, "Never will I leave you; never will I forsake you."
6. So we say with confidence, "The Lord is my helper; I will not be afraid. What can man do to me?"
7. Remember your leaders, who spoke the word of God to you. Consider the outcome of their way of life and imitate their faith.
8. 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and today and forever.
7월 19일 (수) / 이집트 - 이집트의 많은 젊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이유로 박해를 받고 차별을 당합니다. 이들을 보호해주시고 취약한 젊은이들이 변한 없이 믿음을 지키고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말리 - 모든 성도가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제반 의무(히브리서 13:1-17)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주신 것은 "선택된 사람들을 그의 것으로 삼으시고 그들로 열심히 선을 행하게 하시기 위해서 였다." 이제 바울은 믿는 히브리인들에게 여러 가지 선한 의무를 행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선행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이 보다 훌륭해질 수 있음을 말하였다.
Ⅰ. 형제 사랑의 의무를 행하려고 권고하였다(1절). 바울의 이 말은 모든 사람을 같이 태어난 형제처럼 또 같은 동족들처럼 사랑하고 그들의 사랑을 친형제들에게만 베풀지 말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말에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마땅히 있어야 하는 특별하고 영적인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이 들어 잇는 것이다.
1. 이 말씀은 이 편지를 받는 히브리인들이 이미 이러한 형제 사랑을 지니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비록 히브리인들은 당시 종교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혼란되고 분열된 상태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진정한 형제 사랑이 살아 있었다. 이러한 사랑은 성령의 임하신 후 즉시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게 되었다.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모든 제물을 유구상통하였고 또 사유 재산을 팔아 형제들의 생계 유지를 위한 기금으로 내놓았다.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의 정신이다. 또한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역사 한다. 만일 믿음이 사랑에 의해 역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유명무실한 것이다.
2. 이러한 형제 사랑은 늘 상실된 위험 가운데 존재한다. 특히 그 사랑이 가장 필요한 박해 시대에 유실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 가운데는 모세의 율법이 정해 준 제의를 아직도 지킬 것이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사랑을 없애는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신앙의 관한 지나친 논쟁은 그리스도인 사이의 사랑을 약화시킨다. 그러나 이 사랑을 수호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형제 사랑은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형제처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헌신적인 애정이 자라날수록 동시에 형제간의 사랑도 더욱 증대되어야 할 것이다.
Ⅱ. 나그네 접대의 의무를 행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그네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2절)고 하였다. 우리들은 접대하기를 게을리 말아야 한다. 여기서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요구된 의무. 그것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이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과 우리와는 낯선 그런 사람들을 접대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이 말은 이 세상에서는 스스로 나그네로 여기고 저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접대하라는 말씀이다. 특별히 당시의 믿는 유대인들은 절망적이고 곤고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 즉 본문은 이런 자들을 대접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도 쉴 곳을 얻지 못하여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비록 우리가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힘이 미치는 한 그들을 진심으로 우리 가정에 영접해 들여야 할 것이다.
2. 손님을 대접해야 하는 동기.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창 18장)과 롯(창 19장)이 그랬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대접한 손님 중의 한 분은 아들이기까지 하였다. 우리가 이러한 입장에 처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여 나그네를 접대하는 것을 그리스도는 자신이 대접받으신 것으로 여기시고 보상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마 25:35).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복음서에서 "너희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덕한 종들에게 그들이 "부지 중"에 행한 선까지 기억하시고 은혜와 존귀를 그들에게 부어 주셨다.
Ⅲ. 서로 동정한 것을 권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갇힌 자를 생각하라"(3절)고 하였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 보자.
1. 요구된 의무. 그것은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은 흔히 어떤 교인과 교회는 고난받는 한편 다른 교회를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신다. 그는 모든 교인이 동시에 피로써 투쟁하도록 부르시지는 않는다.
(2) 자유로운 사람들을 역경과 어려움과 처한 사람들을 마치 자신이 같은 쇠사슬에 얽매인 심정으로 동정해 주어야 한다. 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이 고통을 겪을 때 그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2. 의무를 행해야 하는 이유. 이에 대하여 본문에 "너희 자신도 가졌은즉"이라고 하였다. 즉 그들도 고난받는 자들과 동일한 육신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신비한 몸인 교회에 속한 지체들이기 때문에 그리하라는 말씀이다. 우리의 육체도 언제 고난에 처하게 될는지 모른다. 또한 우리의 육체가 시련을 겪을 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동정하듯이 우리들도 고난 당하지 않을 때는 다른 고난 당하는 사람을 동정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동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한 지체들임으로 "만일 한 지체가 고통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받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전 12:26).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짐을 나누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독교 본래의 정신에서 이탈된 태도인 것이다.
Ⅳ. 순결함과 정숙함의 의무를 권하였다(4절). 다음을 살펴 보자.
1. 혼인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한 것으로 여기고" 신중하게 취급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인정하신 혼인을 부정한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혼인은 신성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아시고 낙원에 거하는 아담을 위해 혼인을 관습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이 되는 처음 두사람을 혼인시키고 축복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모든 인간으로 혼인에 관심을 가지고 주 안에서 결혼하게 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도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첫 기적을 행하심으로 결혼을 존귀스럽게 여기고 계심을 나타내셨다. 또한 혼인은 순결치 못한 것과 침소를 더럽히는 행위를 저지한다는 점에서도 귀한 것이다. 결혼은 그 배우자들이 서로 순수하며, 정결함을 지키고, 침소를 더럽히지 아니할 때에 즉 불법적이고 부정한 사랑에 의해 침소를 더럽히지 아니할 때에 귀하고도 복된 것이 된다.
2. 부정함과 음행에 대한 두려웁고도 공정한 질책. 본문에 보면 "음행 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고 하였다.
(1) 하나님께서 누가 음행한 죄를 지은 자인지 알고 계신다. 어떠한 어둠으로써도 음행한 자를 하나님께로부터 숨길 수는 없다.
(2)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를 사랑이나 연모로 보시지 않고 음행과 간음으로 간주하시고 책벌하실 것이다. 즉 음행이라는 함은 독신 때에 행한 음란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요, 간음은 결혼한 후 행한 음란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음행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먼저 그는 그들을 이 세상에서 그들 양심에 의해서 심판 받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양심으로 그러한 죄를 깨닫게 하심으로 깊은 수치를 느끼게 하실 것이다(양심이 일깨움을 받을 때 죄인들은 무서운 가책에 시달림을 받게 된다). 또한 그는 그들을 그들이 죽은 후 마지막 심판 때에 심판대 위에 세우시고 그들의 죄를 깨우치시고 저주하사 영벌을 내리실 것이다.
Ⅴ. 자족의 의무를 권고하였다(5,6절). 여기에서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하나님은 은혜와 우리의 의무에 반대되는 죄가 바로 "탐욕"이다. 탐욕이란 우리보다 더 많이 가진 자를 시기하여 세상의 부를 모으려 하는 지나친 욕망을 말한다. 우리는 이 탐욕의 죄를 우리의 생활 속에 허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비록 이러한 탐욕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은밀하게 작용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만일 그것이 제압되지 않으면 우리의 생활 속에 그것이 침투해 들어와 우리의 말과 행위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탐욕의 죄를 제압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완전히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한다.
2. 우리의 행할 의무. 그것은 탐욕과 상반되는 것으로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 번 없어진 과거의 것은 다시 오지 않고 또 미래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장중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비록 우리가 현재 누리고자 하는 것보다 작은 것이고, 장래에 대한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현재의 환경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현재의 형편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만족할 수 있는 길이다. 현재에 만족할 수 없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 환경을 좀 더 좋게 해 주셔도 역시 만족해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환경이 향상되면 그들의 욕망도 역시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만은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위치에 있었으나 만족해하지 않았고, 아합은 왕좌에 있었으나 만족해 하지 않았고, 아담 역시 낙원에 있었지만 만족해 하지 않았다. 또한 하늘에 있던 천사들까지도 만족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은 비록 낮은 지위에 있었고 가진 것이 없었지만, "어떠한 상태에 처하더라도 자족하는 것을 배웠노라"고 하였던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해야 하는 이유.
(1)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않으리라"(5,6절)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이었다(수 1:5). 그렇지만 이 말은 하나님의 모든 신실한 종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구약의 약속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본문의 약속, 즉 "내가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희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5,6절)는 것은 모든 약속의 본체요 중심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 말씀을 강조어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였다. 진심으로 믿는 자들은 그들이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나 또는 영원히 하나님이 은혜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
(2)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믿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겠는가?"(6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그의 백성들을 해하려고 행한 모든 행위를 오히려 그의 백성에게 유익되게 하실 수 있다.
Ⅵ. 그들이 그들의 사역자들을 보고 행해야 하는 의무에 대해서 바울은 권고한다.
1. 죽은 사역자들에 대한 의무. 이에 대하여 본문은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기억하라"(7절)고 하였다. 여기에서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죽은 사역자들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가?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치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에게 가르쳤던 자들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 인도자이며 치리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백성들의 치리자와 지도자가 된 것은 그들 자신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의해서임을 알아야 한다. 이들 사역자들은 그들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그들을 멀리 있으면서 교인들을 치리해서는 안되고 다른 사람을 세워 치리를 시켜도 안 되며 그들이 직접 교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훈을 교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2) 사역자들이 죽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해야 하는 의무.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되고 있다.
[1] "그들을 기억하자. 즉 그들의 설교와 기도와 사적으로 나눈 대화. 그들이 보인 본을 기억하라."
[2] "저희의 믿음을 본받으라. 그들이 너희에게 전해 준 신앙에 든든히 서있고 그들이 그것에 의해 살다가 죽어간 그 신앙의 은혜를 본받도록 노력하라. 또한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자. 즉 그들이 얼마나 빨리, 안락하게, 즐겁게, 그들의 생애를 마쳤는가를 기억하라." 교인들이 가르침을 받은 그 진실한 믿음의 본을 따라야 하는 의무를 말하면서 바울은 이 의무를 확대하여 진지하게 강조하였다. 바울은 히브리인들에게 그들이 먼저 간 신실한 사역자들을 기억하고 의무를 지켜야 할 뿐 아니라 다음의 여러 동기에서도 그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 첫째, 그들이 사역자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하는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서 불멸하시고 또한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역자들은 어떤 이는 죽었고 또 어떤 이들은 죽어가고 있지만, 교회의 대제사장이 되시고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시는 "그들의 영혼의 감독"은 늘 살아계시며 늘 불변하신다. 교인들은 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굳게 서 있어야 하고 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는 늘 살아계셔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고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지켜 보시며 또 보상해 주시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는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교인들을 벌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에나 복음시대에나 불변하시는 분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영원히 한결 같으신 분이다. 둘째, 그들이 사역자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을 늘 위협하는 잘못된 교훈이 교묘하여 자칫 잘못하면 거기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