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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3-15 설교/2023년 10월 23일 월요/이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말씀하신 바,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복음서 강해/Matth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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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3-15

[새번역]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에,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니,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해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 사이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15.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말씀하신 바,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NIV]
13. When they had gone, an angel of the Lord appeared to Joseph in a dream. "Get up," he said, "take the child and his mother and escape to Egypt. Stay there until I tell you, for Herod is going to search for the child to kill him."
14. So he got up, took the child and his mother during the night and left for Egypt,
15. where he stayed until the death of Herod. And so was fulfilled what the Lord had said through the prophet: "Out of Egypt I called my son."

애굽으로 피난 가심 (마태복음 2:13-15)

여기에는 헤롯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아기 예수가 애굽으로 피신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헤롯의 이 유아 학살은 박사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질문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그가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안전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유아시에 받은 존경은 그가 마땅히 받아야할 것에 비하면 매우 작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마져도 그의 백성 가운데서 공경을 받게 하는 대신 그를 드러내어 위험 속에 직면하게 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Ⅰ. 요셉에게 주어진 피신 명령(13절). 요셉은 아기가 처해 있는 위험을 몰랐으며, 어떻게 그것을 피해야 할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사"로 하여금 이전에 그에게 어떻게 해야할 것을 지시하신 대로(1:20) "꿈 속에서" 요셉에게 말씀하셨다. 요셉은 그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기 전에는 지금처럼 천사들과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였다. 이것은 믿음에 의해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은 자는 그가 전에 알지 못했던 하늘 나라와의 교통과 통신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1. 여기에서 요셉은 그들이 처해 있는 위험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지시, 즉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한다"는 지시를 받는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의 모든 잔인한 계획과 의도를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산헤립에게 "네가 나를 거스려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어린 시절부터 고통을 당하셨다. 일반적으로 만년에 고생과 위험을 겪는 사람들도 어릴 때에는 평화롭고 조용히 보낸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의 생애와 고난은 동시에 시작되었다. 그는 "모태에서부터 성별 되었던"(렘 1:5) 예레미아처럼 "다툼과 침을 당할 자"(렘 15:10)로 태어나셨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나 그의 몸인 교회는 다 함께 "내가 어릴적부터 수없이 그들이 나를 괴롭게 하였다"라고 말한다. 바로의 잔인성은 히브리인의 아이들에게 덮쳤으며, 큰 붉은 용은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려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2. 요셉은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 것을 지시 받았다. 즉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어린 시절에도 후일 그가 명하신 말씀, 즉 "이 동리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리로 피하라"(10:23)는 말씀에 대한 모본을 보이셔야만 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죽시려고 오셨지만 아직 그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피신하였다. 자기 보존은 자연법칙의 하나이므로 분명히 하나님의 법에 속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애굽으로 피신"하셨을까? 애굽은 우상 숭배와 폭정,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애굽은 "종 되었던 집"이었으며, 특히 이스라엘의 어린아이들에게는 매우 잔인했던 나라였다. 라마에서 못지 않게 애굽에서도 "라헬이 그 아이를 위해 심지어 애곡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은 거룩한 아기 예수의 피난처로 지정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신다면 최악의 장소로 하여금 최선의 목적을 위해 쓰이게 하실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땅은 여호와의 것"이므로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그것을 사용하신다. 때때로 땅은 "그 여인을 돕기도 한다"(계 12:16). 버린 자들을 위해 모압을 피난처로 주신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자신의 아들을 위해 심지어 피난처로 삼으셨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이것은 요셉과 마리아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만일이 아기가 우리가 들은 바와 같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와 같이 수치스럽게 피신하는 방법외에 벌레와 같은 인간에게서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는가?라고 생각하려는 유혹에 빠졌을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열 두 영도 더 되는 천사들과 이 생명나무를 지키기 위하여 화염검을 가진 그룹들을 소집할 수 없는가? 헤롯을 쳐서 죽게 하든지, 그를 적대하려고 내뻗친 그 손을 마르게 하므로써 이렇게 피신하는 고생을 하지 않게 할 수는 없을까?"고 계속적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요셉과 마리아는 최근에 그 아기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 될 것이라는 말을 천사로부터 들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그가 태어나자마자 여기에 있지도 못하게 그를 내어쫓는가?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불평을 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의 믿음은 시험해 본 결과, 확고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들은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이적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이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었다. 오히려 그들은 아기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흔히 쓰는 방법인 피신책을 썼다. 요셉은 동정녀 마리아의 남편이 됨으로써 큰 영광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영광에는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영광이 그러하듯이 고통이 수반되었다. 요셉은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피신해야만 했다. 이 사실에 분명히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에게 가까운 관계를 맺게 함으로 아기와 그 모친을 위해 훌륭한 준비를 마련하셨다. 박사들이 가져왔던 황금은 이제 그들의 비용을 지탱하는 데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당하게 될 어려움을 미리 아시고 그 어려움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신다.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요동하지 말라는 말씀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항상 변치 않으시고 베푸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속하는 자기 백성을 여전히 지키시는 것이다.

(2) 애굽에로의 피신은 심지어 우리 주 예수님이 낮아지신 겸손의 한 실례이다. 베들레헴에 있는 사관에서 누우실 방이 없었던 것처럼, 유대 땅에는 그가 조용히 계실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이와 같이 그가 지상의 가나안에서 추방되신 것은 죄로 인해 천상의 가나안에서 추방된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추방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어느 때라도 곤경을 당하게 될 때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유아시에 당하셨던 곤경을 기억하고 그것을 달게 받아 들이자.

(3) 애굽에로의 피신은 그리스도를 전혀 무시해 버렸던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의 표식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무시했던 자들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신 것은 정당한 일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진정한 호의를 볼 수 있다. 또한 후일에 사도들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배척했을 때 이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스도를 유대 땅에서 추방하였을 때 애굽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내 백성 애굽이 복 있도라"(사 19:25)라고 한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질 날이 그리 멀지는 않았을 것이다.
Ⅱ. 이 명령에 대한 요셉의 순종(14절). 이 여행은 아기나 모친에게 다 같이 불편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 일에 대한 준비가 거의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애굽에서도 냉대를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요셉은 "하늘의 환상에 불순종하지 않았으며," 반대의사를 제기하거나 지체하지도 않았다. 요셉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자마자 즉시 "일어나서," 아마도 명령을 받은 그날 "밤중에" 길을 떠났던 것 같다. 이 사실은 틀림 없이 순종하려는 자는 모름지기 그 일을 빨리 서둘러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이제 요셉은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히 11:8)도 하나님만을 절대로 의지하고 나아갔다. 요셉과 그 아내는 가진 것이 별로 없었으므로 이렇게 급히 서둘러 길을 떠났으나 걱정할 것이 별로 없었다. 재물의 풍성함은 급히 피신할 수밖에 없을 때 큰 걱정거리가 된다. 부자들은 그들이 재물을 소유하고 있는 동안 가난한 자들보다 유리하다면, 가난한 자들은 재물을 버려야할 때 부자들보다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요셉은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갔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에서 아기가 주요한 인물로서 먼저 언급되고, 마리아가 "요셉의 아내"로 불리우지 않고 그녀의 더 존귀한 신분인 "그 모친"으로 불리운 사실에 유의한다. 이 요셉은 그의 형제들의 분노를 사서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피해 쫓겨간 그 요셉은 아니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요셉은 옛날의 요셉을 보아서라도 애굽에서 마땅히 환영을 받았어야만 했다.

만일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들이 애굽에 들어가 우연히 어떤 신전에 들어갔을 때 모든 우상의 신상들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무너졌으며, "여호와께서 애굽에 임하실 것이며 애굽의 신들이 그 앞에서 요동할 것이라"(사 19:1)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마치 법궤 앞에서 다곤의 신상이 넘어진 것처럼 넘어졌다고 한다.

그들은 헤롯이 죽을 때까지 애굽에 머물러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7년, 또 어떤 사람들은 몇 달이 못된 기간이었다고 한다. 애굽에서 이들은 성전과 멀리 떨어져 있게 되었으며, 성전에서 섬기지도 못하고 우상 숭배자들 가운데 머물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이곳으로 보내신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아니 하시고 자비를 원하신다." 비록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였으나 그 성전은 주님을 그들과 함께 모시고 있었다. 하나님의 규례들로부터 어쩔 수 없이 떠나 있게 되는 것이나, 악한 자들과 어쩔 수 없이 함께 있게 되는 것은 운명의 탓이라고 할 수 있으나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선한 사람들에게는 슬픈 일이 될 수밖에 없다.

Ⅲ.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성경의 성취. 즉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노라"(호 11:1)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모든 복음서 기자들 중에서 마태는 특히 그리스도에 관한 일에 있어서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사실을 가장 주목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복음서가 처음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이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이 강력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 예언자의 말씀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그의 맏아들로 삼으셨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신 사건을 가리킨다(출 4:22). 그러나 여기에서는 유추의 방법에 의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경에는 여러 가지 사실들이 성취된 기록들이 있는데, 이들은 한 가지로 완전하고 풍성하며 또한 질서가 정연하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성경을 이루신다. 성경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 그 전체적인 범위에서 생각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였고 내가 그를 사랑하였지만 애굽에서 오랫동안 고통받도록 내버려두었으나, 그를 사랑하였으므로 때가 이르매 그를 애굽에서 불러내었노라." 이 말씀을 읽는 자는 옛 일만을 생각하고 돌아볼 것이 아니라 앞을 내다보며 생각해야 하며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으리라"(전 1:9)는 말씀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그 표현 방법이 이 같은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내가 그를 불렀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내 아들을 불렀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낯선 땅, 속박의 집인 애굽에 있게 되는 것이 새로운 일은 아니며, 그들은 반드시 속박에서 벗어나 그곳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애굽에서 숨어 지낼지는 모르나 거기에 내버려둠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은 본래 진노의 자식으로서 영적인 애굽에서 태어났으나 회심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그곳에 부름을 받아 나오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애굽에 계신 사실을 있을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할지 모른다.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가 흑암의 땅에서 나오시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러나 이 사실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더 고귀한 영광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애굽으로부터 나왔으며 그리스도가 애굽에서 나오신 사실도 이와 같은 뜻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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