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4:1-2
[새번역]
1.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2. 예수께서 밤낮 사십 일을 금식하시니, 시장하셨다.
[NIV]
1. Then Jesus was led by the Spirit into the desert to be tempted by the devil.
2. After fasting forty days and forty nights, he was hungry.
예수님의 시험 (마태복음 4:1-11)
이곳에는 백중지세(伯仲之勢)의 유명한 백병전, 즉 천사장 미가엘과 용,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아니 뱀 그 자신과의 싸움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에서 여인의 후손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함으로써 그의 발꿈치를 상하였다. 그러나 뱀은 그의 시험에서 완전히 실패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머리를 깨어졌던 것이다. 우리의 주 예수님은 정복자가 되심으로써 그를 따르는 충실한 추종자들에게 확실한 위로를 보장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시험에 관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을 관찰할 수 있다.
Ⅰ. 이 시험이 일어난 시기, "그 때에"란 말이 강조되어 있다. 그리스도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내려와" 하나님의 아들과 세상의 구세주로 선포된 바로 직후, 우리가 그에 관하여 들은 소식은 "그가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때에" 그는 시험과 더불어 맞붙어 가장 잘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큰 특권들이나 특별한 신적 은혜의 표적이 우리를 "시험"받는 곳으로부터 굳게 지켜 줄 수는 없다.
2. 아니 오히려 큰 명예가 우리들에게 주어진 후에도 겸손케 하는 어떤 것을 기대해야 만 한다. 이것은 마치 바울이 삼층천에 갔다온 후 사탄의 사자(使者)가 그를 때려눕히기 위해 찾아왔던 사실과 대동소이하다.
3. 하나님은 흔히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시기 전에 그 시험을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시키신다. 그는 "날을 따라 힘을 주시며," 쓰라린 시험 전에는 평범한 위로보다 더 큰 능력을 부여하신다.
4.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확신은 시험에 대처할 수 있는 가장 큰 준비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선한 성령이 우리의 양자 된 것을 친히 증거 하신다면 양자권에 대한 확신은 우리를 타락시키고 불안케 하려는 계획을 가진 악령의 모든 제안들에 대해 응답해 주실 것이다.
"그 때에," 즉 그리스도께서 엄숙한 세례식을 마치시고 새로이 오셨을 그 즈음에, 다시 말하면 그가 세례를 받으셨을 때 바로 "그때에 시험을 받으신"것이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를 가지도록 허락된 후에는 사탄에 의해 기습을 당하리라는 것을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부요 해진 영혼은 두 배의 감시와 경계를 해야한다. "너희가 먹고 배부를 그때에 조심하라."
"그 때에," 즉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어 보이기 시작하셨을 바로 그때에 "시험을 받으셨으며," 이와 같은 시험은 그가 홀로 계실 때에는 결코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귀는 유용한 사람들, 즉 선할 뿐만 아니라 선행을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그들이 처음 시작할 때에 특별한 악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시락의 아들에 대한 충고이기도 하다. 즉 "내 아들아, 만일 네가 주님을 섬기려 한다면 시험에 대처할 준비를 하라"이다(Ecclesiasticus ii. 1). 젊은 교역자들은 앞으로 다가올 것과 이에 따른 무장을 단단히 하라!
Ⅱ. 이 시험이 있었던 장소. 그 장소는 "광야"였다. 이 광야는 아마도 모세와 엘리야가 "40일 간 금식하였던 시내"의 대광야인 것 같으며, 그 이유는 유대 광야가 아니라면 마가복음 1장 13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이 들짐승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으신 후 예루살렘으로 그에게 주어진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가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광야로 후퇴하여 물러가셨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진 후에는 우리가 받은 것을 많은 군중과 세상적인 번잡함 때문에 잃어버리지 않도록 잠시 동안 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좋다. 그리스도께서 광야로 물러가신 목적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그 자신에 유익을 얻기 위함이다. 물러남(후회)은 하나님과 더불어 명상과 교제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가장 활동적인 생활을 한다고 일컬어지는 자들일지라도 명상할 시간을 가져야 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홀로 있는 시간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그 자신 스스로 은밀하게 하나님의 일들에 관하여 대화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 공공연하게 그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으로 나타나셨을 때 그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는 여행에서 최근에 돌아왔다. 그는 해외에 다녀왔으며 세상을 살펴보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는 광야에서 최근에 나오셨으며, 하나님과 그 자신의 마음과 더불어 대화하시면서 홀로 계셨다"고 말해야 한다.
2. 그가 광야로 물러가신 것은 시험하는 자로 유리하게 하여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을 때보다는 시험하는 자에게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선한 마음에는 고독이 친구이지만, 사탄은 우리들을 대항하여 그 고독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홀로 있는 자에게 화가 있도다." 성결과 헌신을 가장하여 토굴과 광야로 물러가는 사람은 그들의 영적인 원수들의 미치는 활동범위를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과 또한 거기에서 성도 교제의 유익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물러가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일을 하기 위함이었다.
(1) 즉 사탄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승리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하여 자기편에서 해와 바람을 원수에게 제공하였으나, 그 원수는 그를 좌절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리스도가 마귀를 유리하게 하신 것은 "이 세상의 왕은 그에게 있어서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으므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고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2) 그리스도께서 물러가신 것은 그 자신이 전력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위하여, 즉 그 자신의 힘을 돋우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홀로 포도 짜는 틀을 짓밟으리니," 사람들 중에 나와 같은 자가 없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단번에 마귀와의 접전에 돌입하였다.
Ⅲ. 이 시험을 위한 두 가지 준비.
1. 그리스도는 전투를 하도록 명령받았다. 그는 자발적으로 시험에 그 자신을 내맡기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비둘기와 같이 내려온" 성령은 그를 "온유하게" 만들었지만 "담대하게"는 만들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게 조심해야 하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 우리를 연단 시키기 위해 시험의 환경 속으로 들어가도록 명령하신다면 우리는 이러한 것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되며, 이에 대한 방어를 갑절이나 튼튼히 해야한다는 사실이다. "주안에서 강건하라, 신앙 안에서 견고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잘되어 나갈 것이다. 만일 우리 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마귀로 하여금 우리를 시험하도록 시험해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게 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 곳으로 인도하시든지 우리는 그가 우리와 함께 동행하실 것과 "정복자들보다 더욱" 우리를 데려가기를 희망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오직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이끌리셨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다"(약 1:14). 마귀는 그 핸들을 잡고 있으며, 그 암송아지로 밭을 간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은 타락한 성품을 소유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마치 전사(戰士)와 같이 아무런 두려움이나 떨림이 없이 순전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담대하게 이끌리셨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신 것은
(1) 그 자신의 겸손과 비하(卑下)의 본보기이다. 시험은 "급격한 돌진이요, 육체의 가시이며, 돌연한 타격이며, 체로 치는 것이며, 씨름하는 것이며, 전투하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은 어려움과 고난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감수하셨으며, 이는 그가 "이 모든 일에서 그의 형제와 같이 되시기 위하여" 그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치는 자에게 기꺼이 등을 돌려주었다."
(2)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신 것은 사탄을 당황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투 없이 정복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신 것은 시험하는 자를 이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탄은 첫 아담을 시험하여 이겼지만 언제나 승리할 수는 없었으니, 곧 둘째 아담이 그를 쳐부수어 승리함으로써 그를 포로로 사로잡아 결박해버린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신 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위안을 준다. 그가 시험받으신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원수는 교묘하고 사악하고 매우 대담하게 시험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원수는 타도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 원수가 아무리 "강하게 무장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 구원의 대장은 "그보다 더 강하다."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시면서" 고난 당하신 것은 생각만 해도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왜냐하면 시험이란 그것에 굴복하지만 않는다면 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험들은 단지 고난에 불과하며 때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자들의 신분(몫)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대제사장이 있으니 그는 실제로 시험을 받아 고난 당하셨으므로 "시험받을 때에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지 않고" 더욱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주실 것이다(히 2:18; 4:1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받으시되" 우리를 위해 승리하신 것을 생각하면 더욱 위로가 된다. 즉 우리가 맞붙어 싸우는 그 원수는 정복당하여 좌절되고 무장이 해제된 원수일 뿐만 아니라 그 원수를 쳐부수어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를 통하여 우리는 "더 큰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이기기를 다투는 자가 절제하듯이"(고전 9:25), 전투를 위해 음식을 조절하셨다. 그가 보통 사람들과 달리 더욱 빼어나신 것은 "사십 주 사십 야"를 주리신 것인데, 이는 구약에 나타난 두 인물, 즉 위대한 율법 수여자 모세와 위대한 개혁자 엘리야의 모형과 실례에 준하는 사실이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로 왔으며 금식한 사실은 단지 도덕적인 것이었고 이적적인 것은 아니었다(요 10:14). 그러한 영예는 그리스도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금욕이나 고행을 위해 주리실 필요가 없으셨다(그는 억제해야 될 타락된 욕망을 소유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그가 "주리신"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주리신 것은 그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시고 또한 "아무도 흠모하지 않는" 버리운 자로 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2) 사탄에게 그리스도를 대적할 수 있는 계기와 장점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귀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함이다.
(3) 거룩케 하거나 우리에게 금식하도록 권장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 이 일을 명하실 때는 우리가 궁핍한 지경에 처해 있을 때, 일용한 양식이 모자랄 때, 육신을 억누를 필요가 있을 때, 생기 있는 기도를 해야할 때, 즉 시험을 위한 특별한 준비를 해야 할 때이다. 만일 선한 사람이 낮아지거나, 친구나 구원자가 없어지게 될 때에는, 그들의 주님 자신도 동일한 처지를 당하셨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떡이 궁핍하더라도 하늘의 총아(寵兒)가 되거나, 성령의 지배 아래 있을 수 있다. 가톨릭교도들이 예수님께서 사십 일간 금식하신 날을 사순절(四旬節) 금식일로 기념하는 논거는 영구의 법 반대하는 일종의 겉치례와 추측에 불과하다(Stat. 3 Eliz. chap. V. sect. 39, 40). "그는 사십 일을 주리셨지만" 배고프신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늘과의 대화가 곧 고기요, 양식이었다. 그러나 "후에는 시장기를 느끼셨다." 이것은 그가 참으로 인성의 소유자이심을 나타내 보여 준다. 또한 그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육신적인 연약성을 취하셨다. 사람은 먹는 것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며 그 때문에 종종 범죄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굶주리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