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본카테고리

2023년 12월 14일 목요 새벽 경건회 [찬송: 오늘 이 하루도, 설교: 마태복음 5장 20절, 열방을 위한 기도: 스리랑카, 브루나이]

반응형

내게 주어진 하루를 감사합니다 내게 또 하루를 허락하심을
이 하루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며 살기 원합니다.

이런 은총 받을만한 자격 없지만 주의 인자하심 힘입음으로
이 하루도 내게 주어졌음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이 하루도 정직하게 하소서 이 하루도 친절하게 하소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이 하루도 온유하게 하소서 이 하루도 겸손하게 하소서
나의 걸음을 지치게 만드는 이들에게 용서를 베풀게 하소서

내게 주어진 하루를 감사합니다 내게 또 하루를 허락하심을
즐거운 일이든 혹 슬픈 일이든 감사드립니다
비록 이 하루가 나를 울린다 해도 원망의 맘 품지 않을 이유는
나의 주님 이 모든 일을 주관하셔서 선을 이루심이라

이 하루도 평화롭게 하소서 이 하루도 강건하게 하소서
험한 폭풍이 몰아치는 중에도 평강을 누리게 하소서
이 하루도 성실하게 하소서 이 하루도 순종하게 하소서
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이들에게 은총을 베풀게 하소서
행복을 빌게 하소서
축복을 베풀게 하소서


마태복음5:20

[현대인의성경]
20. 내가 너희에게 말해 두지만 너희 생활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의롭지 못하면 너희가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NASB]
20. "For I say to you that unless your righteousness surpasses that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you will not enter the kingdom of heaven.


스리랑카: 미전도 종족 가운데 가정교회를 세우는 목회자들을 위해

12월 14일 (목) / 브루나이: 성령 하나님이 신자들 사이의 하나됨을 위해 새로운 열망을 불러일으키시도록 기도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위해 기도합니다. 교단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의 눈이 열려 브루나이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며, 그를 위해 특히 연합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이상 브루나이 교회의 분열과 분쟁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규칙에 의해 세우려고 오셨던 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이라야만 한다(20절). 이것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을 종료의 최고봉에 도달한 사람으로 여겼던 자들에게는 이상한 교훈이었다. 서기관들은 가장 뛰어난 율법 선생이었고, 또한 바리새인들은 가장 유명한 율법 교사들이었다. 그들은 둘 다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며(마 23:2),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율법에 가장 일치된 자로 여겨졌으며, 사람들은 그들과 같이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스스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놀라움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그것을 엄숙하게 단언하고 있다. 즉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이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대해 적대하는 원수들이었으며, 큰 핍박자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칭찬 받을 만한 일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금식과 기도, 구제를 많이 하였으며, 또한 착실하게 의례상의 약속들을 준수하였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임무로 삼았으며, 그들은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그들에 대해 늘 배려를 아끼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이 천국에 간다고 하면 그 중 하나는 바리새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여기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세우려 온 종교는 사악한 것을 몰아낼 뿐만 아니라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선보다 나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이 행해야만 하고 더 나아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율법에는 편파적"이었으며, 또한 율법의 규례적인 부분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적"이어야만 하며 목사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것으로 만족하게 여겨서는 안 되며,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겉모양에만 신경을 쓰지만 우리는 "내적인" 경건을 자각해야만 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칭찬과 칭송"을 목표로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합당한 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들은 종교에서 행한 것에 대해 자만하고 그것을 "의"로 신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행했을 때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의"만 신뢰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게 될 수 있는 것이다.


=====5:20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낫지 못하면 - 은혜의 시대를 여시는 예수의 가르침은 관대하고 편리하게 되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온전하게 되는 것을 요구한다(48절). 따라서 본문의 요구는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에게서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음을 요구한 것인데, 이는 그들이 보다 많은 계명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마태는 근본적으로 유일한 계명,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축소시켰다) 그들이 새로운 의 즉, 훨씬 더 포괄적인 의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바리새인과 서기관(2:4;3:7 주석 참조)은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엄격한 종교 집단의 무리들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이 선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족할 만큼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Hill). 그들이 만들어 놓은 복잡하고 수많은 규정때문에 도덕적인 사회가 이뤄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로 인해 율법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실추되어 성경에서 요구한 성결이라는 철저한 요구에는 미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서는 바라새인들의 의가 부인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다만 예수의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의(義)의판단 기준이 되었다.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보다 한 단계, 즉 결정적인 단계를 더 나아가야 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문에 철저히 순종했는데, 그들은 모든 세금 이외에도 정확하게 수입의 10%를 헌금했으며, 하나님의 안식일과 율법의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가장 잔인한 순교(martyrdom)를 당했으며, 또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들의 삶이 진정 인간적인 삶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로는 진정 어떤 식으로도 비웃음을 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로부터는 그들보다 더 풍성하고 우수한 의(義)가 기대되었다. 즉 제자들은 형식적 삶과 선행 위주의 삶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욱 우월한 하나님께 대한 내면적인 열정과 사랑과 경건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義)의 결과로서 오직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참으로 인간적 욕망을 탈피한 하나님 중심적인 의(義)가 요청되었다. 실로 그들은 사 61:3이 말하고 있는 '의의 나무들'이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그들 안에서 세력이되며 그들을 통해서 세상 안에 들어오게 될것이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이말은 천국이 상대적으로 남보다 더 나은 자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며 또한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 정신(사랑)을 지키는 자, 율법을 지적으로 잘 아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몸으로 실천해 나가는 자가 들어갈 곳임을 강조하고 있다.


마 5:20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
라. - 이 귀절은 산상 보훈에 있어서 중요하니 우리의 심각한 사색을 요하는 깊은  귀
절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윗 귀절까지 법론을 가르치시다가 갑자기 여기서는  행
함으로야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설치하시려는 듯이 말씀하신 까닭이다.  그러나  이
귀절의 말씀은 분명히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란 것은 외식이 그 특색이므로 인본 주의의 가장  하등품에
속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인본주의이면서도 외식을 더하였기 때문이다. 인본  주의도
진리가 아니거니와 외식을 더하였기 때문이다 인본주의도 진리가  아니거니와  외식은
더욱 가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의는 실질에 있어서 불의요, 죄악인 것이다. 그
런즉 그들의 의보다 좋은 의는 그들의 의와 같은 종류의 의의 연장이나 확대가 아니고
그것의 말살이고 온전히 새 종류의 의이다. 이 새로운 종류의 의는 바리새인의 의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것이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듭난 자의의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의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고
하신 말씀과 같다. 중생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
으로 되어지는 일이다.

20231214목요새벽경건회[찬송-오늘이하루도,설교-마태복음5장20절,열방을우한기도-스리랑카,브루나이]96.mp3
17.72MB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