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5:11-12
[새번역]
11.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12.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NIV]
11. "Blessed are you when people insult you, persecute you and falsely say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because of me.
12. Rejoice and be glad, because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for in the same way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환란 중에 기뻐하며
12장에서 시사한 대로 11절과 12절은 10절의 진술의 확대부분입니다. 11절과 12절은 10절의 복을 확대하여 우리 주께서 그때에 말씀하신 제자들(그들을 통해서 모든 시대의 교회와 모든 교인들)의 특정상태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복의 확대부분이 그 의미에 무언가를 추가시키고 있고, 이렇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에 관한 어떤 그 이상의 진리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데에는 일리가 있다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팔복을 모두 한군데로 모으면 기독교인의 윤곽이 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팔복은 하나의 합성 인물을 묘사하므로 팔복의 각 복은 기독교인의 성격의 일부를 보여줍니다. 기독교인을 서술하기가 힘들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최선의 서술 방법은 기독교인이 나타내는 여러 자질들을 함께 묘사하는 방법입니다.
마지막 복의 이 확대 부분에서 주는 다시 기독교인의 성격에 많은 빛을 던져 밝혀줍니다. 앞서 반복해서 살펴본 대로 기독교인을 관찰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모습 그대로 그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생에서, 이 세상에서 그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그의 반응에서 그를 관찰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들을 기독교에 관해 어떤 명확한 진술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때 그리고 그들에 대한 그의 처신에서 그의 사람됨을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두 절은 이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박해에 대한 기독교인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본문에서 기독교인에 대해 말씀하신 것에는 세 가지 원칙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세 원칙은 아주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원칙들을 잊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원칙은 다시,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닌 모든 사람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다른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어하신 것이 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원칙을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려고 왔다(마 10:34)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환언하면 '나의 사역의 취지는 분열, 곧 아버지와 아들을 분열시키고 어머니와 딸을 분열시키기 위한 것이며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명명백백하게 구별하고 구분합니다. 비기독교인이 어떤 방법으로 박해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어떤 모양, 어떤 형태로든 박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비기독교인은 기독교인에 대하여 적대감을 품고 있습니다. 12장에서 살펴본 대로 마지막 복이 기독교인에 대하여 그처럼 미묘하고 커다란 시금석이 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펴본대로 기독교인의 성격에는 그 무언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리 주의 성격을 닮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항상 박해를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처럼 박해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못한 법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같은 운명을 체험합니다. 이것이 여기서 매우 명백한 원칙으로 나타납니다. 비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을 헐뜯고 박해하고 갖은 거짓말로 악담을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기독교인은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비기독교인은 이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는 다른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입니다.
둘째 원칙은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충성과 모든 일을 그리스도를 위해 하려는 관심의 통제와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받으면 너희가 복이 있다' 그들은 어째서 박해를 받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으로부터 기독교인의 전 목적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라고 추론하는 바입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서로 불쾌감을 주며 박해할 수 있으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박해가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박해의 특이한 점은 '그리스도를 위한 박해가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박해의 특이한 점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는데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제와 지배를 받아야 하며 그의 보시기에 좋은가의 원칙에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 어디서나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새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로부터 새 생명을 받고, 자기가 그리스도와 그의 완전한 사역에, 특히 그의 십자가 위의 죽으심에 모든 것을 빚지고 있음을 알고 '나는 내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바 되었다'라고 다짐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그를 위해 죽으시고 값으로 사셨고, 다시 사신 분의 영광을 위하여 남은 여생을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몸과 혼과 영'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바치고자 소원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신약 서신의 어느 곳에서나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는 기독교인의 삶을 통제하는 동기가 됩니다. 이것은 우리를 다른 모든것과 구별하고 기독교 신앙고백을 철저하게 시험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우리가 실천면에서 아무리 실패하더라도 우리의 소원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 돌리기 위해 사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인의 세 번째 특징은, '기독교인의 삶은 앞으로 임할 하늘나라에 대한 생각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너희보다 먼저 온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이것은 다시 신약성경의 가르침의 기초적이며 필수적인 요소의 일부가 됩니다. 이점은 매우 중요한 교훈이며 신약성경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있는 구약성경의 훌륭한 개요를 보십시오. 저자는 이 사람들이 믿음의 영웅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비결은 그들이 '우리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를 가진 것이 아니라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한 데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지으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성을 찾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상기하는 이것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과의 명백한 차이점을 보시게 됩니다. 비기독교인은 이 세상 너머의 세계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갖은 짓을 다합니다. 이 점은 오늘의 쾌락광들의 저의를 설명해 줍니다. 생각을 억제하는 것, 특히 죽음과 내세의 생각을 회피하는 것은 하나의 큰 음모요 노력입니다. 이것은 비기독교인들에게 전형적인 것입니다. 비기독교인이 죽음이나 영원에 대해서처럼 그렇게 싫어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편 기독교인은 이런 일들을 매우 많이 생각하며, 이것을 곰곰이 유의하며, 이것은 그의 삶과 전망에 있어 큰 통제 원칙과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원칙이 기독교인이 박해에 직면할 때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떻게 예증되는가를 살펴봅시다. 주께서 이것을 제시하신 방법이 이러합니다. 기독교인이 박해에 어떻게 직면하는가를 보여주심에 있어 주는 이 세 가지 특징적인 진술을 말씀했습니다. 이 세 개를 한데 묶어 살펴보면서 이 구절들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는 점을 다시 상기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에 너무 심려하신 나머지 반복하시기까지 하십니다. 기독교인의 삶에서 오는 축복은 그의 조건을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만 약속되었으며 모든 약속에는 항상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본문에 붙어있는 조건은 어떤 의미에서든 우리가 자연인이기 때문에 받는 것이어서는 아니되며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기 때문에 받는 그런 박해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기독교인이 박해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를 살펴봅시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박해를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를 생각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는 모두 정통하고 있습니다. 박해는 폭력적인 것일 수도 있고 체포되어 감옥이나 집단 수용소에 던져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우리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박해는 총살의 형태로나 혹은 다른 어떤 형태의 살해로든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박해는 직장을 잃는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박해는 여러분이 실내에 들어갈 때 조롱과 경멸과 조소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박해는 일종의 수군거림의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피박해자들의 고난당하는 방법은 끝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일들을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여기서 말씀하십니다.
우선 이것을 부정적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보복해서는 안 됩니다. 보복하기는 매우 쉽습니다. 우리들 중 어떤 사람들은 보복하지 않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보복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는 그분을 닮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억제해야 합니다. 대꾸해서는 안 됩니다. 보복한다면 항상 대꾸하는 자연인과 똑같습니다. 본래 자연인은 자기 보존의 본능과 보복의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성격상 다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기독교인은 보복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분개감을 느껴도 안됩니다. 이렇게 되기는 매우 힘듭니다. 첫째로 할 일은 여러분의 행동, 곧 행동에 의한 대꾸를 억제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이것으로 만족하시지 않았습니다. 참된 기독교인의 삶은 억압 상태에서 사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정도를 넘어서야 합니다. 여러분은 박해를 원망하지 않는 상태에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사이의 차이를 체험에 의해서 모두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하여 불끈 화를 내거나 울화통을 터뜨리는 것은 우리 주님께 치욕이 됨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직도 이런 감정을 느낄 수도 있으며, 또 격렬하게 느끼며, 이것으로 상처를 입고 지독하게 분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우리가 이것을 초월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빌립보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봅니다. 바울은 매우 신경과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서신이 이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는 심한 상처와 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감정은 고린도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볼 수 있듯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로 이런 일들로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자아까지도 비판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비판을 하나님께 일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해지는 것에 분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일들은 매우 미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의 심리를 알고 기독교 생활의 심리를 안다면 - '심리'란 용어를 현대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본연의 의미에서 - 우리는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야함을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 부정적 표현은 우리가 박해로 기가 꺾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음 두 가지를 행한 후에 그 일 때문에 낙심하고 불행감을 느끼게 될지 모릅니다. 그 일 자체 때문만은 아닐지라도 어쨌든 여러분의 영혼이 억압감이나 압박감에 덮일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어떤 특정인에 대하여 분개감을 느낀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어째서 이래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이런 취급을 받고 있는가?'라고 자신에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억압과 우울감으로 억눌리고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제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 역시 주께서 시인하시지 않는 일입니다. 주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명쾌히 말씀하심으로써 밝히 천명하셨습니다. 우리는 팔복을 살펴보는 가운데 팔복이 신약성경의 다른 무엇보다 그들 스스로,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의 철저한 오류와 쓸데없음을 더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거듭 살펴보아왔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 됨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박해를 받으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받을 때 여러분은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자연인에게는 이것이 전혀 불가능합니다. 자연인은 자기의 보복 정신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분개감을 제거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그로서는 이런 형편에서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기독교인의 위치요 기독교인들은 이런 위치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일들에서 우리가 주를 닮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있는 기쁨을 바라보고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이상은 우리가 첫 번째 명제로서 살펴본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인이 실제 생활에서 박해에 대처하는 방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두 번째 질문을 던져 봅니다. 기독교인은 어째서 이렇게 즐거워해야 하며 이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우리는 문제의 핵심에 도달합니다. 기독교인이 단순히 박해를 직면했다는 이유만으로 기뻐하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 자체는 항상 슬퍼해 마지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독교인들의 전기를 읽어 볼 때 어떤 성도들은 이런 시험을 매우 정확히 대처한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박해를 당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즐거워한 듯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바리새 정신이었으며, 우리가 그래서는 결코 안될 것이었습니다. 박해 자체를, 그 자체로써 기뻐한다면, 만일 우리가 '아, 좋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훌륭한 것이 즐겁고 기쁩니다. 그들이 우리를 박해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바리새인이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항상 유감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 때문에, 사탄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처럼 비인간적이며 마귀같이 행동하는 것은 기독교인에게 있어 큰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기독교인은 어떤 의미에서 박해하는 사람들의 죄의 결과를 보고 가슴이 터지는 듯한 감을 느껴야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박해에 직면할 때 박해 자체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박해를 기뻐합니까? 우리 주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기독교인이 주를 위해 받고 있는 박해는 그가 누구이며 어떤 신분인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보다 먼저 온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를 받고 욕을 당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종들이요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영광중에 기뻐하는 선지자들과 같음을 아십니다. 기뻐할 것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만사를 승리로 변화시키는 한 방법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주는 마귀마저도 축복의 원인으로 만드십니다. 마귀는 주의 중개작용을 통하여 기독교인을 박해하며 불행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올바로 보신다면 여러분은 즐거워해야 할 원인을 발견할 것이며 사탄에게 향하여 '고맙다. 너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를 받지 말아야 했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이것이 여러분의 부르심과 자녀됨의 증거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실히 알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논증을 통하여 이것을 증명해 봅시다. 두 번째 논증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일한 신분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중상과 박해를 받는다면 우리 삶이 주의 삶 같이 되었음을 의미함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받은 대우를 받고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편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갖는 셈입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주는 이 땅을 떠나가시기 전에 이 일이 일어나리라고 예언하셨으며 이 가르침은 신약성경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당하는 특권도 받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박해를 받을 때 기독교인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의 두 번째 증거를 발견하는 셈입니다, 이것은 그가 누구이며 어떤 신분인가를 확정시켜 준 것이며, 그는 이것을 기뻐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두 번째 원인은, 박해가 장차 우리가 가게 될 처소가 어딘가를 증명해 준다는 점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어째서요? '하늘에서 상이 큼이라' 여기서 여러분은 성경에 일관되어 흐르고 있는 위대한 원칙중 하나를 보십니다. 이 원칙은 너희에게 일어난다면 사실상 그것은 너희가 천국에 가게끔 되어 있다는 사실의 각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붙은 천국행 꼬리표요, 여러분의 궁극적 결말이 결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을 이렇게 박해함으로써 여러분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음과 여러분이 별개의 인간이며, 다른 영역에 속하여 있음을 말하며 이로써 여러분이 천국에 가게되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는 것이 이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생활과 신앙고백에 대한 또 하나의 큰 시금석이 됩니다. 앞서 지적한 대로, 우리가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 우리가 기뻐할 원인인지, 그리고 세상이 우리에게 준 바 우리가 천국으로, 하나님께로 가게 되어 있다는 증거가, 이 유쾌한 기대감으로 우리를 충만케하는 원인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표현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원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보상 때문임을 믿으십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이것을 이런 방법으로 살펴봅시다. 이 논증에 의하면,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나의 전망은 이 세 가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누구이며, 내가 어디로 갈 것이며, 내가 거기에 이를 때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논증을 성경에서 많이 보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언젠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시적인 가벼운 환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큰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고후 4:17-18). 기독교인은 항상 이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점에서 몇 가지 반대론을 취급해 봅시다. 어떤 사람은 '이런 보상개념이 기독교인들이 누릴 올바른 보상관인가?'라고 묻습니다. 기독교인의 동기는, 그를 위해 천국에 준비되어 있는 보상에 관한 생각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가? 여러분은 다음의 경향이 있음을 아십니다. 이것은 특히 20세기 초기에 그랬습니다. (요즘에는 자주 들어볼 수 없지만) 즉 '저는 보상을 구하고 처벌을 두려워하는 따위의 이런 개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은 그 삶 자체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천국이나 지옥에는 관심이 없으며 그들은 기독교의 이 놀라운 사람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한 손에는 물 한 동이, 다른 손에는 불이 붙고 있는 연탄불 한 동이를 들고 다니는 동방 어떤 나라의 여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여인에게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고 물었더니 그 여인은 한 손으로는 지옥을 물바다로 만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천국을 불태우려 한다고 했습니다. 보상이나 처벌에는 관심이 없고 죽음 건너편에 대한 동기없이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순전히 기쁨만을 누린다는 관념은 많은 사람들에게 매혹적으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네가 특이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주님의 대답은, 그들의 자세가 아예 비성서적이며, 성경에서 빗나가는 모든 가르침은 그것이 아무리 멋지게 보여도 항상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시험을 해봐야 합니다. 그 시금석이 본문에 들어있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린대로, 히브리서신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앞에 놓여있는 기쁨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도 상관하시지 않으셨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참으신 것은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디서나 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그의 삶, 특히 그의 사역을 지배한 것은, 그날에 모든 사람의 일이 '불로' 시험받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저는 이 한 기초 위에 무엇을 세우고 있는지 조심합니다. 저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우는가 금속으로 세우는가 매우 조심합니다. 그날이 오고 있으며 그날이 오면 사실을 선언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행한 일이 판단을 받을 것이며, 그의 일에 따라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고전 3:10-15). 보상은 기독교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다시 고린도후서 5장에서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우리가 육신으로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 그대로 보응을 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를 두려워할 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을 권면합니다'(고후 5: 10-11)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에서 자기의 생활을 돌이켜 보는 대목에서 바울은 자기 앞에 놓여있는 면류관, 주께서 자기 머리에 씌어 줄 면류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할지어다. 이런 일들은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복음은 비인간적이며 어떤 특정인과만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보상관념이 성경에 있으니 우리는 이런 일들을 생각하고 묵상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성경과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 대신 어떤 이상주의 철학을 제시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으로 '이 보상이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은혜로 말미암으며 사람은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째서 보상을 말하는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서는 이 보상 자체도 은혜로 말미암는다고 대답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공로로 얻는다거나, 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들처럼 대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이 하기를 바라는 일들이 있으며 그것이 그들의 의무임을 그들에게 말씀해 줍니다. 아버지는 또 그들이 그 일들을 한다면 그들에게 보상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이가 보상을 공로로 받을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상은 은혜로 주시는 것이며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무한하신 은혜로 '이런 일들에 계약을 맺어' 우리를 격려하며 사랑과 감사의 생각으로 가득 채워줍니다. 어느 누가 천국을 얻을 자격이 있다거나 공로로 얻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서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보상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더 나아가서 보상에는 차이가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누가복음 12장의 말씀을 예로 듭시다. 거기에 매를 많이 맞은 종들과 덜 맞은 종들의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신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보상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아무도 손해감이나 부족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지만 보상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보상'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맙시다.
기독교인은 항상 종말을 생각해야 할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은 보이는 것들을 보지 않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에 있는 사람들의 비결이었습니다. 모세는 어째서 바로의 딸의 자식으로 계속 머무르지 않았습니까? '일시적인 죄의 향락을 즐기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종말을 바라보고 그 후의 보상을 미리 내다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생의 생각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과 영원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영속하는 것들을 보았고, 보이지 아니하는 분을 보았습니다. 그가 계시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두 계속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시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정죄감을 받지는 않으십니까? 이 말씀이 우리가 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것을 너무 많이 보는 성향을 어리석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헛되며 사라져 없어질 것임을 완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저편의 일들은 얼마나 적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주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십니다.
이 보상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보상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영광스럽고 놀라웁기 때문에 사람의 말은 필연적으로 그 영광을 감손시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언어마저도 오염된 사실을 아십니까? '사랑'이란 말을 예로 들어봅시다. 이 말은 가치가 평가절하되었으므로 우리는 잘못된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영광'이니 '찬란함'이니 '기쁨'이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성서가 천국이 어떤 것인지를 표현할 수 없다는 데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천국을 오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그 모습대로 볼 것이며, 그의 영광스런 존전에서 예배를 드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몸도 변화되고 영화되어 아픔이나 질병이 없어질 것입니다. 슬픔이나 탄식이 없을 것이며, 모든 눈물이 씻겨질 것입니다. 만물이 영원한 영광이 될 것입니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도, 이별도, 불행도, 사람을 질질 끌고 불행하게 하는 일들이 한 순간도 없을 것입니다.
순수한 기쁨, 영광, 성결, 순결,경이! 이런 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순간에 살아있는 것처럼 확실히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과 제가 맞이할 보상은 이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오, 우리는 얼마나 이 불행하고 비참한 세계에 집착하여 이런 일들을 생각하지 않으며 묵상하지 않는 것입니까! 기독교인이라면 저 놀라운 영광과 순결과 행복과 기쁨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다른 사람들이 불친절하고 잔인하고, 악의롭다면, 우리가 박해를 당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다짐합시다. '아, 불행한 사람들이여, 그들이 이 짓을 하는 것은 그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내가 그분에게 속해 있으며 그분과 함께 있을 것이며, 그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게 될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해에 분을 내고 되받아치거나 그것으로 기가 꺾이기는커녕, 박해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더욱 더 인식시킬 따름이다'라고 말입니다. 기독교인은 말할 수 없는 기쁨,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으로 충만합니다. 이 모든 박해는 모두가 일시적이며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것을 하나님께 감사해 합니다. 바울이 표현한 대로 '박해는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시적인 가벼운 환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큰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오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에 대해 하나님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얼마나 자주 생각하며, 천국 생각을 하면서 얼마나 기뻐합니까? 이 생각이 여러분에게 이상한 감과 두려움과 천국을 피하려는 욕망을 줍니까? 만일 이런 감을 어느 정도로든 느낀다면 우리가 너무 낮은 차원에서 살고 있음을 자복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천국 생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참된 기독교인의 삶은 바울과 같이 되어 '내게 있어서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째서 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그분을 보고 그와 같이 되는 것이 훨씬 더 낫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을 점점 더 많이 생각하면 할수록 더 많이 깨닫게 되며,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이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항상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이런 것을 더 소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