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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10월 6일, 고봉 김치선(高峯 金致善, 1899-1968)출생, "300만 구령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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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6일 “김치선, 한국의 예레미야” 


오늘은 고봉 김치선(高峯 金致善, 1899-1968)이 태어난 날입니다. 1899년 10월 6일, 김치선은 함경남도 함흥읍 서호리에서 출생했습니다.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한 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정도 옥고를 치렀던 김치선은 연희전문학교, 고베중앙신학교,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달라스 신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김치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 박사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영재형(Lither Lisger Young, 榮在馨)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김치선을 양아들로 삼아 도와주었던 영재형은 캐나다 연합교회에 동조하지 않던 개혁파 선교사였습니다. 김치선이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자리를 잡지 못하자 일본에서 초청장을 보내준 사람은 영재형이었습니다.


김치선 박사는 신호중앙교회를 설립하고 목회 사역을 시작하였다. 물론 재일조선인을 중심으로 한 목회였다……일본에서 소외 받고 무시 받으며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던 동포들이 신호중앙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렇게 많은 성도들이 신호중앙교회로 온다는 것은 그 당시 쉽지 않은 반응이었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노예나 미개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무시하던 시대였다. 일부 조선인은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일본인으로 행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이 주일이 되면 우리 고유의 한복을 입고 당당히 교회에 출석하는 특이한 풍경이 일어났다.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속속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은 김치선 박사의 설교에서 힘을 얻은 성도들이……압제 속에서도……신앙생활에 활력을 얻었기 때문이었다.[김치선・이은선・최선, 『오경(五經)과 모세』 (서울: 개혁주의출판사, 2011), 255.]


‘눈물의 선지자’로 불렸던 김치선 목사는 신학 교수이자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1944년에 귀국하여 1948년에 신학교(현재 대한신학교)를 설립했고, 1961년에는 대신교단의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전쟁을 피해 피난을 가면서도, 그는 목회를 쉬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목회할 당시, 김치선은 우리말로 설교한 죄로 경찰에 연행되어 감금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한국최초의 신학박사(논문박사를 의미함)는 격랑(激浪)의 역사 속에서 활동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처럼, 김치선처럼 웁시다. 비난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웁시다. 우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는 해방 후 혼란한 정국과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이 민족이 살길은 오직 기도, 회개 그리고 전도뿐이라고 여겼다. 이를 위해 그는 구체적으로 300만 구령운동을 조직화하였다. 해방 당시 기독교 인구가 30만 정도에 불과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펼친 300만 구령운동은 이 땅의 복음화에 쏟은 그의 열정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다……300만 구령운동을 지속하면서 그는 신학도들에게 “2만 8,000여 우물을 파는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오늘 여러분이나 내가 할 일은 이 우물 파는 사업이다”라고 했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여겼다. 신학도들이 다른 것을 그만두고 일생 우물만 파는 자들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300만 구령운동, 2만 8,000 동네에 우물을 파라는 그의 열정은 이 땅과 민족을 위해 흘렸던 뜨거운 눈물의 표출이었으리라.[KIATS 엮음,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설교: 김치선』 (서울: 홍성사, 2011), 15. 김성봉의 머리말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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