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디오클레티아누스,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이방신들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
오늘은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가 죽은 날입니다. 311년(혹은 313년) 12월 3일, 은퇴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아스팔라토스(Aspalathos)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일루리곤 서부 출신인 그의 본명은 디오클레스(Diocles: 제우스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는 황실의 친위대장이었으나, 황제의 동생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안은 자신을 제우스 신의 아들이라 부르며 황제 신격화 작업을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정책은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갈등을 일으켰으나, 디오클레티안은 처음부터 그들을 박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303년 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4번의 칙령을 발표하며 이방신 제사를 거부하는 성도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는 앞날에 대해 예견을 하고 싶을 때, 신(神)들에게 제물로 바치는 짐승의 내장으로 점을 치는 장복술사(臟 卜術師)에게 의존하는 때가 많았다. 디오클레티안이 이 의식(儀式)을 행할 때, 궁정에서 일하는 종들이 참여했는데, 그 중 그리스도인이 있었지만, 그들은 신앙 양심 때문에 이 의식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이 의식을 집전하던 장복술사들의 대표가 미래에 대한 징조를 잘 볼 수 없자, 그 책임을 그리스도를 믿는 궁정의 종들에게 돌렸다. 이에 디오클레티안은 불같이 노하여, 궁정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이방신들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명하고, 그 명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태형(笞刑)을 가했다. 그는 이 조치를 궁정뿐 아니라 군대에도 확대 적용하여, 그 명을 거역하는 군인은 군문(軍門)에서 추방하고, 이렇게 추방당한 군인은 공무(公務)를 담임할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안은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더 이상의 심한 조치는 내리지 않았다.[김광채, 『그림으로 본 10대 박해』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0), 155-56.]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부인 프리스카와 딸 발레리아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측근들의 부추김을 받아 마지못해 신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무고한 피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빌라도와 비슷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끝으로 로마의 기독교 대박해는 사라졌습니다. 핍박이 사라진 교회에는 부패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의 서쪽 부분을 정복하자마자, 그곳을 동료 장군이자 친구인 막시미아누스에게 맡겼다. 자식이 없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를 양자로 삼고, 그를 아우구스투스(선임 황제의 아들이나 후계자의 일반적인 칭호)에 임명했다……디오클레티아누스는 293년에 첫 제국 분할처럼 대담한 해결책을 시도했다. 각 아우구스투스가 위협받는 두 국경 중 한 곳의 책임을 각기 양자가 된 새 카이사르에게 맡겼다. 막시미아누스의 카이사르인 콘스탄티우스는 라인 강을 맡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카이사르인 갈레리우스는 처음에는 안티오키스에 본부를 두고 시리아 사막을 맡았다. 이것은 종종 사두 정치체제(tetrarchy) - 네 명의 황제의 통치체제 – 로 불리지만, 각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와 협력하는 동쪽과 서쪽의 주요 분할 상태는 그대로 보존되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 전체에 걸쳐 계속 권위를 유지했다.[Warren Treadgold, A Concise History of Byzantium, 박광순 역, 『비잔틴 제국의 역사』 (서울: 가람기획, 2003), 25, 2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