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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甲申政變), "급진 개혁파와 민역익, 그리고 알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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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4일 “갑신정변, 민영익 그리고 알렌”

오늘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난 날입니다. 1884년 12월 4일에 발생한 갑신정변 때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은 자객의 칼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는 명성황후의 조카였고, 중도개화파의 후원자로서 급진개화파와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알렌은 심한 출혈로 죽을 고비에 있던 민영익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알렌이 연락을 받고 도착한 곳에는 14명의 한의사들이 있었으나 빈사(瀕死) 상태인 민영익을 치료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알렌은 외과수술을 시행했는데, 출혈이 있는 측두골 동맥과 귀 뒤 연골 및 목, 팔꿈치와 팔뚝 등을 명주실로 봉합했습니다. 민영익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고, 이는 조선 선교의 문을 여는데 크게 일조(一助)했습니다. 알렌은 고종의 시의(侍醫)가 되었고, 광혜원(제중원)의 설립을 허락받았습니다.

급진 개혁파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한국의 급속 개화정책 추진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진 수구파 인사들을 제거하고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 와중에서……당시 궁중의 신임을 받고 있던 민영익이 7군데나 칼을 맞고 피투성이가 된 채……묄렌도르프의 집으로 옮겨져 알렌의 치료를 받게 되었다. 알렌은 전통적인 의술을 사용하는 한국인 의사들의 반대와 ‘걱정과 불안 속에서’ 석 달이나 치료하여 서양의술의 신비스런 힘을 보여주었고, 민영익은 다음 달 알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처음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많은 외국인들이 서울을 떠났고 알렌 자신도 서울을 떠나야 한다고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는 부상당한 많은 사람들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바로 그러한 일을 맡기 위해 왔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을 보내신 자비로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울의 공사관에서 머물기로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알렌이 더욱 진전된 계획을 세우는 데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였다.[이만열, 『한국기독교의료사』 (서울: 아카넷, 2003), 36-37.]

1년제 의과대학을 나온 알렌은 당시 큰 수술 경험이 없었습니다. 선교사 알렌의 공과(功過)는 입체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료 활동은 개신교가 조선 정부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했습니다. 민영익 치료 4개월 후 언더우드는 제물포에 발을 디뎠고, 제중원을 사역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주권적인 하나님의 사역에 놀랄 뿐입니다.

갑신정변은 청이 베트남의 종주권(宗主權) 때문에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던 상황도 고려한 것이다. 청과 프랑스는 베트남을 사이에 두고 1883년 12월부터 무력충돌을 일으켰다. 청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1884년 8월에 조선에 주둔하던 병력 중 절반인 1,500명을 철수시켰다. 정치적으로 차츰 거세되던 개화파는……1884년 추석날 정변을 결의했다. 이들은 미국 공사 푸트(Lucius H. Foote)와 접촉하여 도움을 얻으려 했으나……성과가 없었다……10월 20일 서울에 돌아온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는 소극적이던 태도를 바꾸고 개화파 지지를 공언했다……1884년 12월 4일 밤 정변 주모자들은 우정국 건물 낙성을 축하하는 만찬회를 이용하여 부근 민가에 불을 지르고 고종이 거주하는 창덕궁 안팎에 화약을 터트려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러한 혼란을 이용하여 미리 지목했던 정적 한규직・이조연・민태호・민영목・조녕하 등을 살해하고, 고종에게는 청군의 난동이라 속이며 그들의 ‘포로’로 만들었다.[이윤섭, 『한국근대사』 (서울: 평단문화사, 2009), 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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