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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1월 2일, 윌리엄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한국 이름 전위렴[全緯廉]) 별세, "기전(紀全: 전킨을 기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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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일 “윌리엄 전킨, 나는 지금 갑니다. 그리고 나는 매우 행복합니다.”

오늘은 윌리엄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1865-1908, 한국 이름 전위렴[全緯廉])이 별세한 날입니다. 1908년 1월 2일, 전킨은 전주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 주 크리스천벅에서 태어난 그는 버지니아 유니온 신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전킨은 재학 중에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개최된 신학교 선교대회에 참석했는데, 그때 언더우드와 윤치호의 강연을 듣고 조선선교를 결심하게 됩니다. 그는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파송한 ‘7인의 선발대’ 중 한 사람으로 내한했습니다. 전킨은 의료선교사 드루(A. D. Drew)와 함께 전라도 사역의 첫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선교부는 김제, 익산, 옥구 등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한 전킨의 과로를 고려하여 전주로 임지를 옮겨주었지만, 그는 그곳에서 급성폐렴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전킨이 폐렴에 걸린 것은 1907년 크리스마스 이튿날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심하게 앓았으며, 3명의 의사와 훈련된 한 간호사가 병의 진행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헛수고였다.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 전킨은 차분히 자신의 사역 방향을 제시하고, 둘러 있는 한국인들에게 몇 마디를 남기고는 사랑하는 이들과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그는 옆에 앉은 사람에게 “제가 만약 여기서 죽는다면, 죽는 것은 값진 것입니다”라고 말한 후 숨을 몰아쉬며 “나는-지금 갑니다-그리고 나는-매우-행복합니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죽음이란 승리로 뒤덮이는 것이었다.”……“그리스도와 조용히 연합된 그의 육신”은 군산 선교부 묘지에……안장되었다. 회색 화강암의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기 전킨 목사는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소유했노라.”……16년 동안 그와 동고동락했던 동료 선교사 레이놀즈가 “드문 인격의 소유자”라고 예찬을 아끼지 않았던 전킨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서울: 생명의말씀사, 2003), 361-62.]

동료 선교사들과 서문밖교회 성도들은 전킨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학교를 세우고 기전(紀全: 전킨을 기념함)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전킨은 15년 동안 사역하며 호남선교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전라남북도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은 선교사들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 빈대와 모기에 시달리고, 홍수와 숯불가스 중독 등의 어려움을 이겨낸 전킨과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1895년 3월에 군산에 전위렴이 도착하여 처음으로 얻은 신자는 김봉래와 송영도였다. 이때 차일선도 있었지만……그는 세례를 받지 못했다. 이때 농민들이 주동이 된 동학혁명으로 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하는데 많은 장애가 있었다. 하지만 1896년 봄부터 전위렴과 드루는 다시 전도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념하게 되는데, 이때 전위렴의 집에서 처음으로 드린 주일예배에 송영도, 김봉래, 차일선 등이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이것이 바로 군산교회의 효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교회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다. 이들 가운데 얼마는 군산선교부가 궁말로 옮기면서 세워진 궁말교회로 이적을 하게 되었다……전위렴은 1899년 12월 21일, 그의 사택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궁말교회가 시작되었다. 지금은 구암교회라 한다. 교육사역은 전위렴의 부인의 공헌이 크다.[조경현, 『초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 (서울: 그리심, 2011), 1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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