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바빙크(1854-1921)의 생애
유해무(고려신학대학원)
2011년 10월 5일에 756쪽이나 되는 카이퍼 저술 목록 해설집이 출판되었다. 그날 전임 수상까지 나서서 그 의미를 짚어보는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2주간이 지나 한국에서는 카이퍼의 동역자 바빙크의 교의학 4권의 번역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카이퍼 저술 목록을 편집한 편집자는 동양에서 나온 카이퍼 저작의 번역이나 관련 저서들의 목록을 입수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하였다. 언젠가는 바빙크 저술 목록을 편집할 때, 같은 어려움을 겪게 될까? 아니면 우리가 바빙크 저술 목록을 출판할 수 있을까?
필자는 “부흥한 교회가 신학을 생산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바빙크의 교의학 번역 출판은 한국교회가 개혁신학의 발전을 이룩하는 중요한 일보이다. 역자와 출판사의 수고와 인내 그리고 대담한 결단에 칭찬과 축하를 보낸다. 참석자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이 번역으로 큰 유익을 얻기 기대한다.
바빙크의 생애와 사역으로부터 한국교회가 얻을 수 있는 지침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출생과 학업
바빙크는 1854년 12월 13일에 네덜란드의 호오허페인에서 그 지역의 분리 측 목사인 얀 바빙크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바빙크는 비교적 내성적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1871년에 즈볼러 라틴어 문법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하여 아주 탄탄한 고전어 교육을 받았다. 1873년 7월 15일에 바빙크는 졸업시험을 치렀고, 라틴어와 불어와 네덜란드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같은 해에 아버지가 신학교가 있는 캄펀교회로 옮긴다. 바빙크는 1873-4년 한 해 그 신학교에서 공부한다. 카이퍼가 1874년 3월 24일에 캄펀의 학생들 앞에서 「네덜란드 헌법에 보장된 자유의 원천과 보장인 칼빈주의」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였다. 이것은 바빙크의 일생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두 사람의 첫 번째 조우였다.
바빙크는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1874년 9월 23일, 레이던으로 향하였다. 현대 신학의 본거지였던 레이던에는 스홀턴과 쿠우넌, 틸러 등이 있었는데, 이들로 인하여 레이던은 유럽에서 큰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특히 스홀턴에게서 바빙크는 옛 개혁신학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았고, 교의학을 명쾌하게 강의하는 방법도 배웠다. 헬라어와 라틴어 뿐 아니라, 별도로 문학부에서 셈어를 전공하기 시작하였다. 바빙크는 특히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가르친 란트의 영향을 많이 받아 평생 옵조오머의 경험주의를 경계하고, 칸트를 따라 18세기의 합리주의를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자유주의 속에서도 불구하고 분리 측의 아들이었던 바빙크는 자신의 신앙을 놀랍게도 흔들림 없이 지켰나갔고, 여러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다. 분리교회 출신 학생들과 학생회와 독서회를 조직하여, 이들과 함께 독일, 프랑스 고전들을 읽고 토론하였다.
1876년 5월 24일에 바빙크는 예과를 최우등으로 마쳤다. 1877년 12월부터 1878년 4월 사이에 신학 과정 시험에서도 우등의 성적을 얻었다. 그 해 9월 20일에 셈어 문학 졸업시험에도 합격하였다. 이 공부로써 그의 교의학은 주석적 기초를 얻게 될 것이다. 1879년 4월 4일에는 신학 석사 시험을 치렀고, 이번에도 우등의 성적을 얻었다. 석사 논문 주제는 “슐라이어마허가 성경 해석에 끼친 영향”이었다. 석사를 마치고 잠깐 캄펀에 머물 때, 겨울 내내 헤페가 편집한 개혁교의학(1861년)을 읽었다.
바빙크는 내친 김에 박사과정도 밟기로 하였다. 10월 중순 쯤에 츠빙글리의 윤리를 주제로 정하고 스홀턴에게 지도를 요청하였다. 쿠우넌은 논문에 대하여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비공개 학위수여식은 그 해 6월 10일에 있었고, 역시 우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같은 해 6월에 바빙크는 곧장 캄펀에서 신학졸업시험을 치렀다.
분리측 교회는 탁월한 젊은 신학자의 등장을 경계의 눈초리로 맞이하였다. 자기 교회의 미온적이고 유보적인 영접에 비하여 흐룬과 카이퍼가 주도하는 화란의 칼빈주의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은, 단번에 바빙크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그의 사역은 자기 교회와 이 칼빈주의 부흥운동 세력의 한 중앙에서 전개될 것이다. 카이퍼는 1880년 10월에 개교 예정인 자유대학교 고대근동언어 교수 자리를 바빙크의 학위 취득 직전에 제안하였다. 바빙크는 이 청빙을 수락하였다가 서둘러 철회하였다.
2. 바빙크의 경건과 목회 준비
바빙크의 학문적 준비 과정은 이로써 끝이 난다. 그는 레이던의 기독개혁교회의 충실한 교인으로 살아왔다. 일기장이나 메모에서는, 회의와 투쟁 가운데서 공부한다는 발언도 자주 나타나며 “그리스도의 합당한 제자”가 되고 싶다는 여망을 볼 수 있다.
상당한 세월이 지난 1902년에 바빙크는 레이던의 유익에 대하여 피력하였다. 레이던은 대적들을 이해하게 훈련시켰으며, 투쟁과 의심의 골짜기를 지나, 본질적으로 옳고 선한 것을 찾게 도와주었다. 그러나 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빈약하고 갈급하게 만들었다. 이런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빙크는 학문적으로 뒤떨어졌을 뿐 아니라, 폐쇄성의 위험을 안고 있는 캄펀을 떠나서, 레이던이 주는 유익을 획득하려고 모험을 감행하였다. 이런 투쟁의 기초 위에 다져진 그의 신학 수업은 결국 자기 교회를 위하여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3. 목회자 바빙크
1880년 9월 18일, 바빙크는 프라네커로 가서 청빙 설교를 하였다. 아버지 얀 목사는 1881년 3월 13일에 아들을 목사로 임직시켰다. 기독개혁교회 안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신학 잡지 자유교회의 편집장이 된다. 바빙크는 교인들과 교제하고 목회의 실천적인 면을 배우면서, 레이던이 주지 못하였던 것들을 많이 경험한다. 특히 아주 평범한 무학의 여자 교인들이 성경을 많이 암송하는 것에 자극을 받아 성경을 더욱 깊이 연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책들을 많이 구입하기는 하였으나 학자로서 연구할 여유는 거의 없었다.
1882년 자유대학교가 바빙크를 신약교수로 청빙하였다. 그는 캄펀신학교가 8월에 있을 총회에서 자기를 교수로 임명할 것을 기대하면서 사양하였다. 그리고 이사장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저는 저의 교회를 사랑합니다. 이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일하고 싶습니다. 신학교의 부흥이 제 마음의 소원입니다. 이 기관에는 쇄신되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기독개혁교회 대부분은 이를 공감하면서, 8월 총회에서 논의할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총회가 저에게 신학교에서 일할 자리를 제안할 것을 내심 바라고 있습니다.” 바빙크는 총회가 이런 의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공표하지 않는 한, 자기 교회를 떠나서 다른 교육 기관에 헌신할 자유가 없다는 것을 계속 역설하였다.
바빙크는 신학적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4 명의 레이던 교수의 공저인 순수신학개요를 편집하여 1881년 4월에 출판하였다. 그는 서문에서 화란 개혁교회가 고백한 신앙의 내용이 이제는 새롭게 부흥되고 있다고 썼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자신이 점차 더 “개혁파”가 되어가고 있음을 체험하였다. 이 말은 레이던 시절의 갈등이 극복되었다는 의미이다. 자기 교회의 신학적 사명을 고취하는 글에서 개혁파 원리는 모든 삶의 영역을 포괄하며, 보편적이라고 설파했다.
8월, 즈볼러 총회는 바빙크를 교수로 임명하였다. 이사회는 바빙크에게 교의학 분야를 맡겼다. 예과 과정에 속하는 철학과 헬라/로마 문화사 및 헬라어도 담당하게 되었다. 10월 8일에 프라네커교회에서 고별 설교를 하였다. 11월 6일부터 캄펀에 정착하면서 아버지의 사택에서 기거하였다.
4. 바빙크의 취임 강의
1883년 1월 3일, 29세의 젊은 학자 바빙크는 취임 강의 신학의 학문성을 발표하면서 교수직을 수락하였다. 그는 성경을 신학의 원리요 인식 원천이라고 천명하였다. 다른 학문은 이성, 양심, 오성, 감정 등 인간의 본유관념에서 원리를 도출하지만, 신학의 원리는 우리 바깥에 있는 성경이며, 성령께서 베푸시는 중생으로 이 원리는 우리 마음속에서 터를 잡는다.
신학은 유기체로서 통일성을 지니는데, 아무리 신학이 복잡하게 분화되어도 신학의 원래적 의미는 교의학에 있으며, 교의학의 핵심은 신론이다.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기초는 중생된 사람의 새로운 삶에 있으며, 이것이 신앙의 열매요 성령의 선물이다. 신학의 학문성을 논하면서, 그는 신학을 문학 및 종교사로 천명한 화란 고등교육법(1876)을 반박하였다. 다른 학문은 인간적인 학문의 원리에서 출발하여 창조를 다루지만, 신학은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출발하며, 그리스도와 자연에서 자기를 계시하신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전학문이 신학적이고, 신중심적이라 하였는데, 이런 발언은 카이퍼의 입장을 상기시키지만, 카이퍼와는 달리 선험적 체계를 거부한다. 그런 의미의 체계는 삶 자체를 죽이며, 진리를 왜곡한다는 것이다. 취임 강의 자체는 요한복음 17:3절을 인용하면서 마친다.
5. 신학교 교수진과 바빙크의 초기 사역
이 당시 캄펀에는 판 펠전, 그와 같은 날 동서가 된 브럼멀캄프, 헬레이니우스 더 콕 외에, 더 콕의 사위로서, 1875년에 취임한 노르트제이가 구약을 가르치고 있었다. 바빙크와 함께 임명을 받았던 빌렁하는 교회사와 교회법을 담당하였다. 그와 바빙크는 평생지기요 동반자이지만, 바빙크에게 그가 가장 필요하던 1902년에 세상을 떠났다.
같이 임명받아 신약을 담당한 린더보옴은 바빙크와 평생 공존하기 어려웠다. 그는 전도와 유년주일학교를 활성화시켰고, 총회적 차원에서 정신장애자를 위한 병원사역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관철시킨 실천의 인물이었다. 린더보옴은 스스로 원하였다면, 바빙크가 주도한 1892년의 교회합동을 좌절시킬 수 있었으나, 당파성과 분열을 혐오하는 그였기 때문에 그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와 바빙크와의 관계는 그와 카이퍼와의 관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카이퍼가 자유대학교의 설립을 추진할 때에 공개적으로 이를 비판하였으며, 필요하다고 여길 때에는, 그를 당당하게 비판한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이후의 캄펀 역사는 린더보옴이 홀로 노르트제이, 빌렁하, 바빙크와 대결하는 구도를 띠게 된다.
바빙크는 이 시절에 아주 강도 높게 연구하였다. 특히 고전적인 개혁신학, 철학사와 당대의 신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그는 자신의 교의학과 윤리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먼저 역사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학생들에게 고전적 개혁교의학을 소개하고 가르친 것도 이런 관심에서 나왔다. 글을 그리 많이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1884년 7월 목사연합회에서 발표한 논문 “윤리신학파”는 각광을 받았다. 이 글은 당시 화란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윤리신학파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였다. 윤리신학은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에 있는 절대적인 반제(antithese)만을 인정하고, 다른 반제들, 곧 신앙과 학문, 헬라문화와 기독교,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로마교와 개신교, 고백주의와 현대주의, 개혁과 혁명의 반제 등은 종합을 통하여 해소하려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신앙과 학문, 교회와 신학의 관계는 윤리신학파가 추구하는 종합의 방식이 아니라, 반제에 입각한 고립으로써 올바르게 화해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6. 또 다른 교회개혁인 애통운동(De Doleatntie)과 카이퍼
이제 바빙크와 카이퍼의 교회 투쟁을 살펴보자. 카이퍼는 지지자들과 함께 1886년에 화란 국가교회로부터 분리하였다. 1878년부터는 여하한 교리적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 때문에 당회가 교인 자격에 제재를 가하거나 성찬 참여를 막을 수 없게 되었다. 교인 자격과 당회의 자율권의 문제가 애통의 배경이 되었다. 암스테르담 교회의 당회 대다수가 이런 규정을 거부하고 회원권을 엄격하게 규제하자, 시찰과 광역노회는 카이퍼를 포함한 당회원들의 당회원권을 일시 중지시켰다. 이에 대한 반발로 ‘애통’이 일어났다. 이 개혁운동도 1834년의 교회개혁과 마찬가지로, 국가로부터의 자유와 교회의 교리적 변질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였다. 애통측은 1887년에 ‘화란개혁교회’를 조직하였다.
7. 교회합동을 위한 바빙크의 노력
바빙크는 카이퍼와 함께 두 교회가 1892년에 합동하도록 협력하였다. 그 전에 바빙크는 분리측의 50주년(1884년)을 기념하면서, “국가로부터 자유라는 원리는 이미 기독개혁교회가 채택하였다”고 역설하였다. “국가로부터 자유”는 카이퍼의 모토 중에 하나인데, 이런 발언은 바빙크가 그와 아주 가까이 서서 신앙과 신학적 투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1834년의 분리에 대해서 유보적 입장을 취하던 카이퍼에 대해서 바빙크는 분리의 정당성을 항상 주장하면서, 분리가 개혁교회의 진리를 위한 투쟁이었다면, 애통은 개혁교회의 권리를 향한 투쟁이었다고 보았다.
기독개혁교회는 애통측과의 합동안을 1888년 8월 앗선 총회에서 처음으로 다룬다. 가장 큰 문제는 합동 후의 신학 교육이었다. 캄펀신학교와 자유대학교 신학부를 당분간은 공존하게 하자는 바빙크의 안은 부결되었다. 도리어 교회가 자체 신학교육기관을 보유해야 한다는 원리는 포기될 수 없다는 판 안델의 안이 통과되었다. 이 결의를 이끌어 낸 배경에는 린더보옴이 있다. 바빙크는 이때에 “우리가 형제라 하더라도 반드시 친구가 될 필요는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8. 교회합동을 위한 교회론적/교회법적 정지 작업
카이퍼는 1889년 초 바빙크에게 자유대학교 교수직을 제안하였다. 바빙크는 신중하고, 교회의 유익을 추구하는 지혜로운 처신을 하면서도, 스스로 판단하여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결국 사양하였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이를 대처하는 모습에서 바빙크의 성격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교회합동을 열망한 바빙크는 1890년 바자운지에 기고하면서, 세 종류의 교회를 구별하였다. 즉 택자들의 회중(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제21주일), 수세자들의 회중(화란신앙고백 제34조), 그리고 신자들의 회중으로서의 교회(같은 고백 제27조)가 있는데, 카이퍼는 첫째를, 분리측 강경파인 텐 호르는 셋째를 옹호하기 때문에 문제가 어렵다는 것이다. 바빙크는 세 개념을 모두 조화시키면서 교회를 이해하려고 하면, 두 사람 사이에는 교회론적 이견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중재하고 조화시키려는 그의 성품이 잘 드러난다. 1891년 레이우바르던 총회는 이러한 고백적 기초 위에서 합동을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다.
앗선 총회 직후 바빙크는 법무장관에게 1869년의 규정을 정지할 수 있는 방안이 있는지를 질의하였다. 기독개혁교회는 1869년에 ‘십자가교회’와 합동하면서 총회의 상임위원회의 이름으로 교회법과 규정을 국가에 통보하여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그런데 카이퍼의 눈에는, 이것이 교단을 주체로 보고, 지역교회를 지교회(枝敎會)로 보는 국가교회의 이념을 수용한 오류였다. 기독개혁교회는 합동을 찬성할 경우, 1869년의 규정을 정지시켜야만 하였다. 바빙크는 이를 법무장관에게 질의하였고, 지역 교회가 개별적으로 설립과 치리에 대한 규정을 국왕에게 보내어 인가를 받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답변이었다. 정부도 기독개혁교회의 (상임위원회가 아닌) 특별위원회의 통보를 받고, 내부적으로 많이 갈등하다가 결국은 1869년 규정의 정지를 1892년 1월에 승인한다. 이로써 합동을 위한 법적인 기초도 확립되었다. 이런 일에 바빙크는 신학자들과 법률가들을 관여시키면서 합동을 향한 길을 닦아 나갔다.
9. 캄펀신학교와 자유대학교 신학부의 통합 시도
분리측과 애통측은 1892년 6월 17일에 암스테르담에서 합동하고서 교회의 이름을 ‘화란개혁교회’라 칭하였다. 합동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합동한 교회들은 성경에 기록되었고, 화란교회가 전통적으로 수용한 삼대신조에서 고백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연합하였다. 그 당시 화란 인구는 약 450만 명이었는데, 로마교인이 180만명, 국가교회 교인은 약 200만 명이었고, 합동교회의 교인수는 약 40만이었다. 카이퍼는 이 합동에 힘입어서 나중에 수상(1901-1905)이 되었는데, 국가교회 내의 동조자를 20만 명 정도로 본다 하더라도 약 60만 명의 교인들이 정치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교회는 합동을 하였지만, 양 신학교육기관의 위치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었다. 다만 암스테르담 합동총회는 위원회를 임명하여 해결 방안을 다음 합동총회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바빙크도 위원으로서, 초안 작성의 책임을 맡았다. 그는 초안에서 두 학교가 공존하는 현상태의 유지는 제한적인 연구 인력과 재정의 낭비를 초래할 뿐 아니라, 각 학교의 이전의 전통을 계속 고착하게 만들어서, 종국에는 두 교회의 용해가 방해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신학의 성격을 제시하였다. 하나님은 성경을 일차적으로 교회에 주셨기 때문에 신학의 교수권은 일차적으로 교회에 있다. 자유대학교의 신학부가 교회와 공식적인 관계 속에서 감독 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신학은 인간 지식과도 전반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모든 학문은 성경을 필요로 하며, 이 때문에 신학의 조망이 요청된다. 개혁파 원리에 따르면 신학은 신학교에 감금시킬 것이 아니라, 모든 학문과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학교에서 교육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대학교가 유럽 문화를 기독교화 해야 하는 사명을 지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그가 카이퍼의 학문 이론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바빙크는 두 기관을 용해하여 각 기관이 지녔던 장점을 최대화하기를 원하였다.
이 초안의 의도는 좋아 보이지만, 바빙크가 제시한 실행 방안은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즉 그는 새로 설립될 기관의 교수를 자유대학교를 운영하는 개혁파 고등교육협회와 교회가 동시에 임명하게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는 양 편으로부터 다 오해와 버림을 받게 된다. 이전의 분리측과 애통측 안에는 각 신학교육기관을 중히 여기면서, 원칙의 문제로 접근하는 이들이 있었다. 특히 캄펀신학교 이사회는 통합논의를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바빙크의 중재 노력과 실패 과정에는 바빙크의 성격과 일처리 방식이 잘 나타난다. 그는 교회 합동 이전에는 교회론과 학문론 때문에 자신의 분리측에게, 합동 이후에는 학교 통합 문제로 옛 애통측의 오해와 불신을 받는다. 그러면서 애통측을 더 압박할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그는 애통측의 불신을 받고 옛 분리측으로부터 냉대를 받는다. 이것이 교회 정치의 냉혹한 현실이요, 그도 벗어날 수 없었다.
합동 후 첫 총회가 1893년에 도르트레흐트에서 회집하였다. 총대들의 구성을 보면 다수가 분리측 교회의 배경을 가졌는데, 이것은 바빙크의 초안에 불리한 구성이었다. 정치적 감각을 가진 카이퍼는 바빙크의 초안이 당할 운명을 간파하고 있었다. 바빙크는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옛 분리측은 19세기의 신앙과 학문(신학)의 관계에 대한 그의 입장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었다.
바빙크가 학교 통합의 방식으로 자유대학교로 올 수 있는 가능성이 좌절되었다. 카이퍼는 바빙크에게 자유대학교의 구약교수직을 제안하였다. 그는 다시 주저한다. 자신의 교의학개요를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애통의 본거지였던 암스테르담에서 분리측과 애통 교회의 융해가 지연되고 있었다. 이 사이에 바빙크는 개요가 아니라 개혁교의학 첫 권을 탈고한다(1895년). 그러면서 자유대학교 이사장에게 편지하여 청빙건은 없던 일로 하자고 썼다. 그가 청빙을 수락했다면, 4권의 개혁교의학은 출판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0. 바빙크와 카이퍼의 협력: 개혁파 원리
바빙크는 교회 합동 이후 가장 큰 현안 문제인 신학교육기관의 통합을 위하여 십년 넘게 다양한 노력을 경주한다. 그는 개혁파원리의 관점에서 옛 분리측 인사들을 설득하여, 교회가 관장하는 통합된 신학부를 목표로 삼았다. 이때에 그는 이를 반대한 린더보옴과 계속 아주 심하게 충돌한다. 또 카이퍼의 정적이었던 로오만 사건에 직접 개입한다. 린더보옴과의 관계는 바빙크 자신의 문제였으나, 로오만 사건은 카이퍼의 대리인격으로서 처리하였다. 그렇지만, 바빙크 스스로도 개혁파원리를 일관성 있게 고수하지 못했다. 카이퍼와의 협력과 갈등의 관계가 계속 문제의 핵심에 있다. 이 과정에서 신학자 바빙크는 교회정치의 험한 실상을 경험하게 된다.
11. 바빙크와 린더보옴
1894년 초에, 캄펀신학교의 이사회는 상반된 의견을 가진 바빙크와 린더보옴에게 해결책을 제출할 것을 요청했다. 바빙크는 예과 과정을 라틴어 문법학교로 독립시키고, 신학 졸업시험을 이사회가 아니라 교수들이 주관하는 것이 개혁파 원리에 상응한다고 주장했다. 교회를 대신하는 이사회의 불필요한 역할을 줄이고, 신학교가 신학부의 성격을 지니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린더보옴은 현상 유지, 곧 예과를 신학교의 일부(一部)로 유지하기를 원했다. 1894년 7월 9일 이사회의에서 두 입장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이 배경에는 1893년에 출판된 카이퍼의 신학총론에 나오는 신학적 문제들도 깔려있었다. 린더보옴은 카이퍼가 주장하는 신앙과 학문의 관계를 비판하였다. 카이퍼가 신학을 인간적 지식의 일부로 만들었고, 이를 기초로 한 자유대학교는 신학을 세속화시키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 신학은 신앙의 뿌리에서 찍혀나가고, 교회는 그런 세속적인 학문의 굴레를 메게 될 것이라는 우려였다. 이런 논거로 린더보옴은 두 학교의 융해를 거부하였다.
1896년 4월 바빙크가 동료 교수들과 함께 쓴 소책자 교육과 신학가 나왔다. 이 책은 비록 합동개혁교회 안에는 주로 카이퍼가 야기한 교리적인 이견이 더러 있으나, 원리적인 차이는 아니라고 천명하면서, 카이퍼를 변호하였다. 개혁파원리인 영역주권을 따라, 학문은 교회가 아니라 대학교에 속하며, 신학도 학문이기 때문에, 교회가 학문적 신학 연구의 주체가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신학졸업시험을 이사회가 주관할 수 없다. 신학부 중심의 신학교육기관을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이 책은 세례에 대한 카이퍼와 애통측을 비판한다. 세례가 중생을 인치며, 따라서 택한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기 전에도 중생한 것으로 전제해야 한다는 주장하는 중생 전제설은 개혁신학에서 벗어난다고 보았다. 다만, 모든 수세자들은 교리와 삶에서 그 반대를 보이기 전에는 중생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나중 1905년 총회의 결정과 일치한다. 린더보옴은 외롭게 이 소책자에 대한 반박문을 썼다.
1896년 8월과 9월에 합동개혁교회의 미덜부르흐 총회는 바빙크가 1894년에 이사회에 제출한 안을 그대로 채택하였다. 즉 졸업시험은 교수회가 주관하며, 예과와 신학본과를 분리함으로써 사실상 신학교가 신학부가 되게 한다는 결정이었다. 나아가 그는 신학자문위원회와 접촉하여, 3년전 도르트레흐트 총회의 결정에 의하여 린더보옴이 작성한 위원회보고서가 채택되지 않고, 카이퍼의 신학을 비판하는 안건도 상정되지 않게 하였다. 바빙크는 자신의 초안 부결 사태와 자유대학교 청빙 좌절 사건 이후 이번 총회를 통하여 완전히 회복하는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12. 바빙크와 로오만 사건
카이퍼는 자신과 갈등 관계에 있는 로오만의 진퇴를 결정하는 일을 바빙크에게 맡겼다. 로오만은 애통운동의 동역자였고, 자유대학교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요, 이사로서, 1884년에 자유대학교 법학부 교수가 되었다. 카이퍼와 로오만은 적어도 두 사안에서 상반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1887년 헌법 개정으로 불가피하게 대두된 가장(家長)선거권 문제 때문이었다. 1894년 자유당 정권은 선거권의 확장을 골자로 하는 선거법 개정안을 의회에 제출했는데, 카이퍼는 찬성하였다. 로오만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자에게 선거권을 주면 국가가 위기에 처한다는 입장이었다. 말하자면 반혁명당 내에 있는 귀족정치와 민주정치간의 노선 투쟁이었고, 로오만이 전자를, 후자는 카이퍼가 대표하였다. 그런데 로오만의 입장은 흐룬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교회 내에 남아있던 흐룬의 추종자들은 점차 카이퍼를 떠나가고 있었다.
둘째는, 칼빈주의 및 개혁파 원리에 대한 이해의 차이였다. 카이퍼는 칼빈주의를 개혁파 원리로부터 연역하여 구성하는 체계로 보았으나, 로오만은 이런 태도에 동의하지 않았고, 성경에서 어떤 학문적 원리를 연역하는 것 자체를 불신하였다. 1895년 6월에 열린 개혁파고등교육협회의 연례대회는, 협회의 정관 제 2조에 나오는 “개혁파 원리”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그런데 로오만의 입장에 대해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안이 난데없이 상정되었다. 대회는 바로 9인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바빙크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이 일은 카이퍼와 루트허르스가 꾸민 음모몄고, 카이퍼는 위원장까지 미리 정해 놓고, 자기에게 유리한 보고서의 작성을 유도하였다. 게다가 바빙크는 이들로부터 사전에 통보를 받았다. 자유대학교 행정처장 호비는 바빙크에게 이 조사 자체의 부당성을 토로하면서, 카이퍼와 루트허르스를 비난하였다.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자, 로오만은 자신이 정관 제 2조를 따라 법학부에서는 강의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이전보다 더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카이퍼와 그의 추종자들이 인간의 죄로 변질된 창조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개혁하지 않고, 도리어 성경에서 도출한 체계를 가지고서 세상을 개혁하려 든다고 비난하였다.
13. 카이퍼가 주장하는 개혁파 원리의 승리에 기여
로오만 조사위원회는, 각 학문 분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기 분과에 대해서 개혁파 원리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칼빈주의와 칼빈주의자들이 그 말씀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도출하고 적용한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로오만이 원리를 너무 쉽게 성경 말씀과 일치시켰으며, 그의 교육이나 교육 방법론에는 제 2조의 규정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사실 자유대학교의 설립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가진 로오만이 정관을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은 의도적인 처사였다. 설립자들은 칼빈주의의 역사로부터 학문을 위한 규범을 찾으려 했다. “개혁파란 고백적 개념이요, 따라서 교회적 성격을 지닌 개념”이라는 카이퍼의 입장을 로오만은 지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협회의 정관도 개혁파 신조들을 언급하고 있었고, 이것은 신학부를 포함한 모든 학부에 해당되는 선언으로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로오만이 이를 인정하고 동의하였다면 그 논쟁은 훨씬 더 유연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개혁파고등교육협회는 1896년 연례회의에서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채택하였고, 로오만은 즉시 사직하였다. 그렇지만 이 보고서는 의장인 바빙크의 생애에 적지 않은 오점을 남겼다. 비록 바빙크가 객관적인 조사와 보고서를 시도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가 카이퍼의 영향권 하에 있은 것은 정당하지 못하며, 그의 인품을 보아서도 그 처신은 이해할 수 없다.
이런 바빙크가 1901년에는 개혁파 원리를 성경과 개혁신조에만 국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배경에는 카이퍼와의 갈등이 있는데, 이런 변화는 신학 연구와 발언도 상황에 좌우된다는 좋은 실례이기도 하다.
14. 바빙크와 카이퍼의 갈등: 신학교육기관의 통합 문제
로오만 사건을 거치면서, 바빙크는 카이퍼의 신뢰를 전적으로 받고 있었다. 그런데 서로 신뢰하고 칭찬하던 카이퍼와 바빙크 사이에 갈등의 관계가 형성되고 말았다. 물론 카이퍼와 로오만 간의 관계 결렬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두 사람 사이에도 치유되지 못할 괴리가 1899년 1월에 일어났다.
신학교이사회는 1898년 여름에 신학교로부터 분리되는 라틴어 문법학교의 조직을 위하여 위원회를 구성하고, 바빙크와 보스 등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새로운 기회를 잡은 바빙크는 위원회에서 신학교와 자유대학교의 통합을 추진하자고 제안했고, 보스조차도 동의하였다. 소수 위원들은, 개혁파고등교육협회가 이 안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표하면서, 미국에 출타 중이었던 카이퍼의 의견을 청취하자고 하였으나, 바빙크는 조급하게 이런 의견을 무시하고, 1899년 1월 초의 이사회의에 자신의 제안을 제출하였다.
이사회 다음 날 바빙크가 루트허르스를 설득하려고 보낸 편지에 그의 제안이 잘 요약되어 있다. 분리측의 양해가 필요한 내용이 먼저 나온다. 즉, 캄펀은 먼저 문법학교를 독립시켜 별도의 협회에 넘기며, 독립될 신학 본과를 적당한 지역으로 옮겨 새 학교로 개교한다. 그리고 자유대학교 신학부 교수들을 새 학교의 교수로 임명한다. 양 학교의 신학교수는 한 교수회를 구성하게 된다. 총회는 교육을 감독하는 5인의 이사들과 5인의 재정위원을 임명하고, 다음 세 가지를 자유대학교 행정처에 요청한다. 즉, 자유대학교 신학부 교수들을 교회에 임대해 줄 것과, 새로 설립될 신학부를 교회가 설립한 교회의 학교로 인정하는 것과, 자유대학교 신학부로서 다른 학부들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할 할 것을 요청한다. 결과적으로 이 학교가 대외적으로는 개혁파 원리에 기초한 자유대학교의 학부이며, 대내적으로는 5인의 이사들과 자유대학교의 행정처와 신학교수들은 함께 집단운영체제를 형성한다. 신학 교수의 임면은 총회를 대신하여 이사회가, 다른 학부들의 운영은 정관을 따라 협회를 대신한 행정처가 하며, 이사회와 행정처는 상호 협의는 하되 구속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고 제안하였다. 그는 후보지로 하알렘을 제시하였다. 그렇게 할 경우에, 자유대학교는 신학부에 별도의 재정을 지출할 필요가 없으며, 다른 학부의 확장과 특히 의학부의 신설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합동개혁교회 밖에 있는 신자들도 내적으로는 독립한 비신학부를 지원할 것이요, 나아가 협회의 정관 제 2조에 동의만 하면 비신학부에 개혁파 신자가 아닌 학자도 교수로 임명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물론 양 편이 각각 양보할 것도 있다. 즉, 옛 분리측으로서는 예과를 독립시켜 자유대학교 문학부에 이관해야 하며, 옛 애통측으로서는 그렇게 하여 새로 설립된 신학교가 한 편으로는 독자적이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자유대학교의 신학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카이퍼와 루트허르스는 갑자기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자유대학교의 이념을 담당했던 것이 신학부가 아닌가. 과연 그 신학부를 포기하고 통합학교를 신설하는 도구로 내어주어야만 하는가. 게다가 린더보옴, 보스 등 옛 분리측 인사들이 바빙크의 안을 동의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유쾌하지 않았다. 루트허르스는 먼저 협회 및 교수들과 더불어 의논하겠다고 답신하였다. 그러나 바빙크는 일을 바로 추진하겠다고 하였다. 자유대학교가 아니라, 옛 분리측 인사들을 설득의 대상으로 보았던 그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귀국한 카이퍼에게도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이었다. 이들은 바빙크의 제안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고, 도리어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카이퍼는 바빙크가 미리 보스 등과 입을 맞추고 나서 비로소 루트허르스에게 연락한 것을 꺼림칙하게 받아들였다. 루트허르스가 미국에서 돌아온 카이퍼에게 부정적인 얘기를 한 결과이었다. 이런 반응에 충격을 받은 바빙크은, 자신이 옛 분리측 인사들 및 동료 교수들과 유지했던 관계가 손상 받는 아픔을 감수하면서, 양편의 주장을 종합하여 대안을 제시하였다고 답장하였다. 그러나 카이퍼는 1899년 2월 12일자 편지에서, 내용 자체가 아니라, 바빙크의 일 처리 과정을 문제로 삼았다. 바빙크는 동지로부터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주저하는 성격을 가진 그가 지나치게 서두르는 실수까지 저질렀다. 그것이 교회 정치의 현실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이전의 친밀한 관계를 다시는 회복할 수 없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칼빈주의 부흥 자체도 여러 모양으로 피해를 받게 될 수밖에 없었다.
15. 성급하게 쓴 두 소책자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한 바빙크는 신학교육기관의 통합문제를 신학교의 입장에서 서서 자유대학교측을 직설적으로 압박하는 소책자 신학교와 자유대학교(1899)를 급하게 썼다. 개혁교인들은 여하한 협회보다는 교회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어떤 협회가 신학부를 설립하는 것보다는 교회가 신학교를 설립할 권리가 앞선다. 이런 입장은 이전의 린더보옴의 입장에 근접한다. 바빙크의 대안은 자유대학교가 신학부를 일단 양도하고, 새 신학교를 대학교의 소속으로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신학교육의 양분이 종결되고, 다른 학부들은 확장의 기회를 가지며, 캄펀신학교도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1896년에 이미 학문적인 신학부로 변모한 캄펀신학교를 위하여 학문의 유기체인 대학교 안에 입지를 확보해주기만 하면, 합동개혁교회는 이전투구의 긴장관계를 청산하고, 20세기를 맞아 칼빈주의를 보다 왕성하게 부흥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바빙크는 많은 반응들을 정리하고,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담은 두 번째 소책자 교회의 권리와 학문의 자유를 1899년 5월에 출판하였다. 그는 협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거론하지 않고, 교회의 권리만을 강조하였다. 학교 통합은 합동의 면류관이 될 것이요, 통합의 실패는 합동의 실패를 의미할 수 있다. 1896년에는 신학의 권리와 자유가 핵심이었다면, 1899년에는 교회의 권리와 자유가 핵심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바빙크는 전례 없이 커다란 불신을 받게 되었다. 그가 이전의 분리측 인사들과 협의했다는 것이 비판의 초점이었다. 이런 논평은 주로 옛 애통측 배경에서 나왔고, 다행히 카이퍼가 논쟁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논의가 중단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알력이 곪고 있었다.
16. 계속 타격을 받는 바빙크
이런 와중에, 1899년 8월 흐로닝언에서 모인 총회는 바빙크에게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총회는 단 하나의 지역 교회도 공식적으로 반대하는 편지를 총회에 보낸 적이 없지만, 협회가 분명하게 반대하니 두 학교의 융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자신의 안이 거부되었음에도 바빙크는 바자운에다 신학교의 독립적 존속이 강하게 확인되었다는 글을 기고하였다. 결과적으로 캄펀신학교의 위치는 확고해졌다.
바빙크의 실패의 원인은 무엇일까. 애통측은 린더보옴, 보스 등의 반대에서 자유대학교의 관심사에 대한 항구적인 위협과 칼빈주의의 진전에 대한 훼방을 읽었다. 반면에 분리측은 애통측이 신학교의 의미를 무시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위협과 무시에 대한 불안은 도무지 풀 수 없는 입장의 대결로 나타났다. 비록 바빙크의 중재안이 성사된다 하여도 애통측과 자유대학교측은 새 신학교의 주도권을 옛 분리측이 쥐게 될 것이라는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카이퍼와 루트허르스는 바빙크가 1895/6년의 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자유대학교의 정관의 제 2조를 해석한 것과, 1899년의 해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1896년 이후 상승하던 그의 활동은 침체기를 맞게 된다.
17. 개혁파 원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
1899년 늦여름에, 상처(喪妻)한 카이퍼에게 바빙크는 위로의 편지를 쓰면서, 서두에 이전에는 항상 부르던 ‘친구’라는 말을 빼버렸다. 이것은 린더보옴에게 “우리가 형제라 하더라도 반드시 친구가 될 필요는 없다”고 던진 말을 상기시킨다.
1899년 12월 6일, 교장 임기를 마치면서 행한 특강 박사직분에서, 그는 신학교수직은 곧 박사직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직분의 회복을 옹호하면서, 학문의 유기체와 대학의 통일성은 추상적인 철학적 관념일 뿐이요 원리가 될 수 없다고 아주 냉소적으로 논평하였다. 이것은 카이퍼를 겨냥한 발언이었고,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담은 표현이었다. 그는 “학위 없는 사람들이 사람 없는 학위보다는 낫다.”는 자기 동료 빌렁하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특강을 마쳤다.
바빙크는 1890년 연초부터 바자운의 편집장의 일을 맡았다. 그의 필치는 대체로 온건하였으나, 카이퍼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선택론을 출발점으로 삼아 잠재적 중생, 영원 칭의 등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비록 카이퍼는 자기의 입장을 절대 유일하다고 주장하지 않았지만, 추종자들은 그런 입장에 빠졌다고 비난하였다. 유아세례의 기초가 중생 전제나 잠재적 중생이 아니라, 은혜언약에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임을 분명히 밝혔다. 중생이 소명보다 앞선다면, 설교를 통하여 회개를 촉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목회적 관심에서 카이퍼와는 신학적인 대립의 각을 세운 셈이다.
바빙크는 구체적으로 규명되지 않은 개혁파 원리 위에 세워진 학문은 모래 위의 성이라고 화답했다. 평화로울 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일단 갈등 상황이 발생하면, 도대체 어떤 개혁파 원리인지가 불분명하여 사태 해결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보았다. 만약 신조가 신학부에만 원리이고 다른 학부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면, 칼빈주의는 교회 밖에서 일반은혜를 원리로 삼아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자유대학교는 일반은혜의 영역을 지배하는 원리를 탐구하며 규정하는 임무를 갖게 될 것이다. 결국 종교로서의 칼빈주의로부터 철학으로서의 칼빈주의로 중심축이 옮겨가고, 이 현상은 제도로서의 교회로부터 유기체로서의 교회로, 특별은혜로부터 일반은혜로 옮겨가는 데에서도 나타날 것이다. 이런 발언은 몇 해 전의 로오만 조사위원회 위원장의 말이 맞는지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이다. 그가 개혁파 원리를 말하면서도 그 원리를 끝까지 따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8. 통합의 좌절과 교회 정치의 피해자
1902년 아르넴 총회는 40명의 총대들로 구성되었고, 바빙크는 다른 교수들과 함께 자문위원이었다. 외국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수상 카이퍼는 편지를 보내어 바빙크를 겨냥하면서 한 학교가 교회의 신학교요, 동시에 신학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였다.
총회는 신학교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회장단에게 자문위원회의 구성을 일임하였다. 바빙크는 다시 중재안을 내었다. 즉 교수 임면권은 총회가 가지도록 하여, 협회를 완전히 배제한다. 이것은 분리측의 입장이다. 바빙크는 신학의 학문성을 표방하면서도 신학교육은 오직 교회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수 임명 추천권은 교수들에게 주어서, 교회가 임명한 이사회는 그 추천에 찬반 의사를 밝히고 총회에 보고함으로써 자유대학교 교수들의 염려를 불식시키자는 것이다. 대다수 총대들이 이 안에 동의했고, 심지어 보스도 찬동하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보스가 새 안을 발의하였다. 보스는 차근차근 되새겨보니, 루트허르스가 심약한 바빙크에게 영향을 미쳐서 나온 안이라는 사실을 늦게 깨닫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두 안을 축조하여 표결에 붙이니 26대 14로 바빙크의 안이 통과되고, 보스의 안은 부결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총회가 일괄 표결할 직전에 보스는 14명의 총대와 노르트제이 및 린더보옴의 서명을 담은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즉, 바빙크 안은 교회가 자체 신학교육기관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한 합동정신과 합동의 조건을 위배하기 때문에, 자기들은 총회가 달리 결의할 경우 책임을 질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자기들의 선언서를 총회가 채택해주기를 요청하였다. 판 안델이 나서서 서명한 총대들을 설득한 뒤에 이 안을 표결에 붙이니 부결되었다. 이로써 바빙크 안이 통과되었다. 총회장이 소수 반대론자들에게 다수의 의견을 따르도록 권면하자, 보스가 소수파를 대신하여 교회의 화평을 위하여 결의된 내용을 추진하지 않기를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이 때에 옛 애통측 출신이었던 총대 판 쉘펀은 이 발언의 심각성을 간파하고, 위 결의를 추진하지 않기로 하자는 안을 공식적으로 발의하고 그의 안이 통과되었다.
판 쉘펀 안의 배경은 명백하였다. 즉, 카이퍼가 합동개혁교회를 배경으로 하여 수상이 되어, 견고한 우파 연정을 수립한 상황에서 개혁교회가 분열한다면, 이것은 그에게 큰 타격을 줄 것이 너무나 명백하였다. 자문위원회는 신학교를 교회의 고유한 기관으로 유지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로써 바빙크의 모든 시도는 최종적으로 좌초되고 말았다. 10년 간 교육기관의 통합을 성사시키려고 백방으로 애쓴 그에게는 크나큰 좌절을 안겨다 주는 결정이었다. 바빙크는 곧장 총회 회의장을 떠나버렸다. 1899년의 경험이 재현되었다. 차라리 바빙크 안을 폐기하지 말고 다음 총회로 미루었으면, 교회 분열의 위험도 막고, 계속 남게 될 긴장도 풀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긴 총회였다.
바빙크가 양 교육기관의 통합에 그렇게도 집착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자기의 신앙적 배경인 분리측을 고립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었다. 그는 신앙과 학문, 경건과 세상적인 삶의 균형적 조화를 추구하였다. 이런 자세는 보편성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나왔다. 레이던으로 가는 모험을 감행하였고, 역사적인 개혁신학을 연구하여 적극적으로 세상 속에서 기독자의 삶을 살고 싶었다. 바빙크가 자유대학교로 옮긴 이후, 그가 교육이나 정치에 관여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개혁신학에 기초하여 화란을 기독교화하기 위하여 자유대학교라는 학문 기관을 활성화시켜야 하며, 이를 위하여 제한적인 재원을 결집해야 한다고 보았다. 동시에 그는 옛 분리측의 입장을 따라 신학 교육의 주체는 교회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나 옛 분리측 인사들과 자유대학교의 교수들은 고유한 입장만을 고집할 뿐, 바빙크가 원하는 방식으로 보편성을 가진 학문과 신학을 추구할 기회를 쉬 베풀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시도와 좌절의 배경이었다.
19. 자유대학교 교수, 카이퍼의 비판자가 된 바빙크, 말년
아르넴 총회 이후 합동개혁교회는 불안감에 쌓인 위기 국면에 들어섰다. 바빙크와 린더보옴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은 갈등 관계에 빠져들었다. 린더보옴은 바빙크가 흐로닝언(1899) 이후 다시 루트허르스와 연합하였다는 사실을, 바빙크는 린더보옴과 노르트제이가 추호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용납할 수 없었다. 20년간의 동역 이후, 쌍방은 더 이상 공존할 수 없게 되었다. 린더보옴은 바빙크를 신뢰할 수 없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로, 바빙크는 린도보옴을 극단주의자로 보았다.
총회가 끝난 수주 후에 그는 자유대학교의 교의학 교수로 청빙을 받았다. 이사회는 난상 토론 끝에 그에게 1903년 1월 1일부로 명예로운 퇴직을 허락하기로 결의하였고, 그이 후임교수를 결정하였다. 바빙크는 자신의 안이 회생할 수 있도록 이들이 임명을 수락하지 않기를 내심 바랐다. 이로써 옛 분리측 소수파는 뜻을 관철할 수 있었고, 이를 끝까지 제지하려 한 바빙크는 캄펀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주 힘겹게 보냈다.
20. 바빙크의 왕성한 연구와 결실
바빙크는 캄펀 교수로 임명된 이후 1892년까지, 기초를 쌓아가는 연구를 지속하였다. 다양한 주제를 심도 있게 연구한 기초 위에, 그의 개혁교의학 4권은 형성되어 갔다. 4권은 각각 1895, 1897, 1898년과 1901년에 출판되었다. 이 개혁교의학은 그때까지 화란에서 나온 어떤 교의학도 능가하는 대작이었다. 그는 자신이 다루는 교의마다 그 역사적 발전을 상세하게 다룬다. 또 19세기 철학과 슐라이어마허 이후의 독일과 화란의 신학의 발전을 폭 넓게 소개할 뿐 아니라, 교부와 개혁자들의 입장도 광범위하게 취급한다. 그는 이처럼 자료를 섭렵하고 요약하는 데 뛰어났다. 나아가 개혁교의학은 강력한 체계 구성의 특징을 지닌다. 비록 그가 주제별로 구성하지만, 배후에는 창조주, 구속주, 완성주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이 깔려있다. 당대의 철학의 발전도 잘 소화하여 싣고 있는데, 놀랍게도 그는 新칸트철학에 대항하기 위해서 당시의 新토미즘에 영향을 받고, 아우구스티누스에게로 소급되는 기독교화된 이데아론을 옹호한다. 마지막으로, 당시의 현대 신학이나 불가지론을 논박하면서, 공교회적이고 개혁적인 교의를 변호하는 실존적인 긴박감이 감돌고 있다.
21. 계속 쓸쓸한 바빙크
바빙크는 1901년 12월 17일에, 예배와 신학이라는 특강으로 자유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바빙크는 대도시 암스테르담에서도 분리측을 이루었던 평범한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바빙크는 동료들 사이에서 비교적 외로웠고, 주도적인 동료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
바빙크의 강의는 전임자 카이퍼보다 훨씬 덜 구성적이고 덜 사변적이며, 더 주석적이며, 역사적 접근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캄펀의 강의실에서 그가 누렸던 환호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교회 안에서도 이전만큼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는 옛 분리측 인사인 린더보옴과 보스의 신뢰를 잃어버렸고, 루트허르스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대학교의소수 핵심세력에는 들지도 못했다.
22. 1905년 총회와 바빙크의 역할
1905년 우트레흐트 총회는 옛 애통측의 일부 인사들의 신학적 문제들을 논의하고 처리하였다. 기실은 카이퍼의 신학에서 파생된 문제들이고, 그의 추종자들이 더 강하게 고수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옛 분리측 인사들은 합동 이전부터 문제를 제기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전택설, 영원 칭의, 즉각적인 중생과 중생 전제설 등이다. 이 문제들은 언약 이해와 유아세례 등의 실제적인 사안들과 직결되어 있었다. 바빙크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 카이퍼를 동정적인 입장에서 비판하였다. 1905년의 총회에서 그의 이런 태도가 반영되었고, 당분간은 합동한 교회들이 이 문제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되었다. 결국 중생전제설은 1942년의 총회에서 제기되어, 급기야는 1944년에 교회 분열을 야기하게 된다. 이 외에도, 바빙크는 화란신앙고백 36조에 나오는 21글자를 삭제할 것을 제안하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36조에서 정부는 경찰권을 가질 뿐 아니라, 거룩한 종교에 대한 책임도 져서 “모든 이방종교와 그릇된 예배를 추방하고 근절하며, 적그리스도의 왕국을 궤멸해야 한다”고 그 임무를 규명한다. 분리나 애통운동은 국가의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교회를 추구했다. 이 보고서는 정교분리의 원리를 신앙고백서에도 반영하기를 제안하였고, 총회는 이 보고서를 그대로 채택하였다.
1914년, 헤이그 총회는 그에게 신학교의 박사학위 수여권에 대하여 자문을 요청하였다. 린더보옴도 자문위원이었는데, 그간에 흐른 세월로 상처는 치유되고, 두 사람은 서로 협력할 수 있었다. 바빙크은, 학문기관이 아니라 교회의 회합인 총회는 순수한 학문적 사안을 다룰 수 없기 때문에 교회의 학교인 신학교가 박사학위를 수여할 없다고 보았다. 총회는 바빙크의 자문에 따라 박사학위 수여권을 신학교에 부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바빙크는 1906년에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1908년 8월에 그는 화란을 출발하여 9월 7일에 뉴욕에 도착하였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스톤 특강 계시철학을 강의하였다. 1911년에는 상원의원이 되었다. 1913년 개혁교회 전도집회에서 전도는 감리교적이 아니라, 개혁파적 의미로 죄인을 십자가 아래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그러므로 전도는 국민 전체의 개혁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23. 신학을 등지고 정치와 교육학과 교육 현장 등에 몰두
1911년에 바빙크는 상원의원이 된다. 그는 상원에서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연설하였다. 종교학부가 된 국립대학교의 신학부를 명실상부한 신학부로 개정할 것을 촉구하였고, 식민지를 기독교의 정신으로 통치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여성참정권도 주장하였다. 또 정치 영역에서도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국민생활이 죄로 인하여 철저하게 부패한 것을 지적하면서, ‘회개’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구제는 국가가 아니라, 교회의 사명이라는 논거로써 사회주의를 반대하였다. 1919년에 마지막 연설을 하였는데, 정치 성향의 좌우를 막론하고 정부는 기독교적 원리를 적극적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교육 쪽에서 바빙크의 활동은 두드러졌다. 1870년대의 기독교학교투쟁은 종결되었기 때문에 1904년에 그는 쇠퇴 일로에 있는 개혁파학교협회에 관한 보고서를 썼다. 이 협회는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개혁파학교를 지원하던 단체였다. 그러나 모든 학교가 국고 보조를 받게 된 상황에서 이 협회의 존재 이유는 사라지고 말았다. 바빙크는 보고서를 통해서, 이제는 연맹을 구성하여 기독교학교가 동일한 신앙고백과 사명과 관심 위에서 상호 협력하고 도우며, 정보를 교환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래서 지역적인 기구를 만들고, 연례대회에서 강의를 들으며, 새로운 자료를 교환하고, 또 사범학교와 교육학 연구소를 세우자고 제안하였다. 1904년에는 교육학원론을 출판하였다. 기독교학교는 투쟁의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지적한 이 책은, 권위서가 되었다. 교육은 문화와 삶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 심리학이 교육학에서 지니는 의미를 잘 해명하였다. 그러나 교육학을 심리학 위에 정초하는 것은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심리학보다는 종교와 신학이 교육학 정초에 기여할 것이 더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다윈의 이론에 기초한 심리학이나 교육학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특히 그는 종교교육을 중심으로 삼고, 언어 영역과 자연과학 영역을 정위시키는 전반적인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구상하였다. 언어와 역사는 산수나 자연과학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지식획득을 주로 삼는 그의 입장은 19세기적이라 하겠다.
이런 다양한 관심과 활동으로 인하여 신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는 1906, 1908, 1910, 1911년에 개혁교의학 4권을 차례로 개정하였다. 여러 곳을 보완하고, 새로운 자료를 첨부하였으나, 원리면이나 내용면에서 1판의 기조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1911년에 현대주의와 정통을, 1912년에는 기독교를 소책자 형태로 출판하였다. 전자는 자유대학교 총장퇴임 특강이었는데, 현대신학의 문제점들을 다룬 수작으로서, 그 당시 화란의 현대신학자들과의 대화라 하겠다. 기독교는 교의를 복음의 헬라화라고 보는 교의사가 하르낙의 명제를 반박하면서, 교의의 관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계시의 실재와 궁극성”이라고 밝혔다. 1909년 칼빈 탄생 400주년에는 칼빈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고, 일반은혜를 영역하여 기념논문집에 기고하였다. 그는 자기 교의학을 대중적으로 요약한 하나님의 크신 일들과 기독교중등교육을 위하여 기독교교육입문을 출판하였다. 1913년에 사실상 그의 교의학적 작업은 막을 내린다. 강의 준비에 필요한 극소수의 책만 남기고, 심지어 고전적인 개혁신학자들의 저작들을 처분하기까지 하였다. 신학과 교의학 대신에 교육학과 철학이 그의 새로운 주제가 되었다. 1904년에 그는 소책자 기독교학문과 기독교세계관을 출판하였다. 전자에서 그는 다시 칸트와 대결한다. 칸트가 형이상학을 추방하였기에 유물론과 불가지론이 득세하였다고 본다. 화란의 경험주의자 옵조오머도 이 영향 하에 있다. 그러나 신칸트주의는 그래도 종교의 여지를 남겨두었으므로 개선이라고 보았다. 그의 대안은 비판적 실재론인데, 신토미즘의 영향과 심지어 칸트의 흔적도 보인다. 기독교세계관에서는 불가시적인 세계와 감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세계와의 대치를 용납하지 않았다. 불가시적인 것은 가시적인 것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경험계 뒤에는 이데아계와 규범계가 펼쳐져 있다. 그는 조화를 추구하는 사상가로서 중세의 흔적도 보이지만, 역시 현대인으로 고민하였다. 자연과학, 특히 다윈의 이론에 정통하여 그 허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진화론은 작업가설로는 가능하지만, 결국은 세계관이 되었다는 것이 그의 반론의 핵심이다. 철학적 작품들을 읽으면 그의 종합적인 작업 방식이 눈에 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칼빈과 칸트와 셸링을 인용하면서, 이들을 상호 조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바빙크의 신학과 철학적 작업은 1914년을 기점으로 하여 종결된다. 따라서 1920년 전후에 등장한 바르트나 브룬너 신학, 셸러와 훗설의 현상학이나 실존철학과는 대결하지 않았다. 그는 역사적인 개혁신학을 당대의 현대신학과 대결시켰고, 철학자로서 19세기의 실증주의와 유물론을 반박하였다. 신학과 신앙의 세속화에 휩쓸리지 않고, 역사적인 개혁신학의 보편성의 관점을 가지고 여러 신학자와 철학자의 사상을 소화하고 현대화하려고 노력한 신앙고백자이다.
24. 바빙크와 소장층의 운동
1892년 합동 이후부터 개혁교회 안에 상존하던 제반 문제들이, 1914년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카이퍼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드는 반면에, 바빙크가 자유대학교에서 배출한 목회자들이 주동이 되어 다양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하였다. 이 때에, 이른바 ‘소장층 운동’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당시 합동개혁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수구적 자세와 외형주의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추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공식적으로 천명하지는 않았으나, 대표적 인물에 속하는 빌렁하는 새로운 성경 번역, 예전의 갱신, 신앙고백의 확대 등을 내세웠다. 어쨌든 이들은 자기 교회 안을 지배하고 있는 자족감을 부수고 싶었다. 이 운동은 바빙크에게서 자극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바빙크가 현대 문화와 변화된 세계를 뛰어나게 요약하면서 기독교가 처한 상황과 의미를 제시함으로써 구시대에서 새시대로 향하도록 영감을 주었다고 하였다.
이들은 1920년에 창간된 새로운 잡지 개혁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하였고, 바빙크 사후에 이 잡지의 창간이 바빙크의 소원이었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하여, 바빙크가 이 운동의 전면에 나선 것은 아니며, 측면에서 호의적인 태도로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사실 카이퍼의 영향이 감소하고 있는 시점에서, 바빙크는 60세(1914년)를 맞이하였다. 소장층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그는, 개혁파 신자들에게 새시대의 실상을 바로 알려주고 싶었다. 그는 세계대전이라는 서구 기독교의 위기를 예의주시하면서, 도덕적 가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여러 가지 매체와 글을 통하여, 그는 전쟁의 문제를 다루면서, 1917년 로테르담 총회에서는 총회가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을 결의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대학/청년 조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특히 국립대학교에서 공부하는 개혁교회 학생들에게 큰 관심을 기울였다.
25. 말년의 바빙크는 변했는가?
말년에 바빙크는 변하였는가? 20세기 초에 사회와 교회는 변화의 한가운데에 처해 있었다. 1905년 우트레흐트 총회가 여러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화해안을 이끌어 낸 뒤에는 합동개혁교회 안에서 진지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신학적 논의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고, 교회와 신학은 서서히 보수화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전 분리측은 잡지 파수군을 창간하여 옛 분리측 전통만을 고수하는 폐쇄성을 노출하였다. 아들 카이퍼도 이전 애통측의 노선을 보수할 뿐, 갱신 운동에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소장층은 이런 보수화에 반기를 들었지만, 자체 내에 뛰어난 신학적 인물이 없었다. 바빙크도 보수주의를 경고하였지만, 그 조차도 자신의 개혁교의학에만 정주하고 있었다. 1918년 스스로 교정한 제 3판은 제 2판의 복사본 이상은 아니다. 국내외에 등장한 수많은 변화를 감지하였으나, 그 대안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바빙크가 별세하기 1년 전인 1920년 여름에, 총회가 레이우바르던에서 모였다. 이 총회는 시대 상황을 여실하게 노출시킨 회의였다. 바빙크는 젊은이들의 방문을 많이 받았고, 시대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자기의 논문을 편집하여 출판한 자기 동생에게 개혁파 교인들에게 시대의 상황을 알리고, 조속하게 단합과 신뢰를 회복할 것을 촉구하는 소책자를 쓰겠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총회에 상정된 신조와 예전 갱신 청원건 등, 쉽게 풀 수 없는 문제들로 인하여 답답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한바탕 소용돌이가 닥쳐올 줄 알면서도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총회는 시대정신에 대하여 토론하고 입장을 밝히기 위하여 진지하게 움직였다. 캄펀의 그의 후임자 호너흐는 이 입장 표명에다 극장출입, 카드놀이와 춤추는 것까지 포함시켜 경고하자고 제안하였으나, 바빙크는 교회 안에는 이보다 더 끔찍한 범죄가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고리대금업이나 전쟁물자 투기와 삶의 세상화 등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신조를 그대로 유지하되 확장하여야 하며, 특히 영감과 성경의 권위, 참교회와 거짓교회, 국가와 교회의 직무에 관한 신앙고백은 개정할 필요성이 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1921년 7월 29일에 그는 영면했고, 8월 2일 장례식에서, 학생들이 그의 관을 운구하였다. 개혁교회는 한 해 전에 카이퍼를 잃고, 다시 바빙크를 떠나보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도 되기 전에, 이전 역사는 종지부를 찍고 있었다.
26. 바빙크의 삶에 대한 평가: “내 학문이 아니라 오직 신앙만이 나를 구원한다”
교수로서의 바빙크는 어느 학교에서도 빛날 학문적 선생이었다. 박학하였고, 독서량은 엄청났지만, 잰체하지 않는 화법으로 전달하였다. 문제를 파악하는 예리한 감각을 지녔으며, 터놓고 표현하였다. 성급하지 않고, 깊은 성찰을 통해서 해결책을 알게 되면, 스스럼없이 이를 알렸다. 불필요한 논쟁을 야기하는 위장 해결책을 항상 경계하였다. 논리학을 철저하게 공부했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서는 말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요인의 의미도 잘 알았다. 교의학자로서 그는 개혁신학이 칼빈신학과 동일하다는 자세로 캄펀과 암스테르담에서 사역하였다. 단순히 칼빈에게로의 회귀는 아니며, 그 이후의 발전을 고려하면서 비판도 하고, 유보적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1750년부터 경직되기 시작하던 개혁신학을 그는 이런 자세로 활성화하였다. 레이던에서 철학도 공부했기 때문에 종교와 철학의 고유성과 차이를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기독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사상을 공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삶과 세계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서 이성과 감정을 충족시키는 계시 철학을 추구하였다. 그는 칼빈처럼 개혁파 사상 뿐 아니라, 개혁파 생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아름다움의 감동을 봉쇄하는 경건주의적 폐쇄주의를 폭로하고 비판하였다. 그는 일반은혜의 관점에서 예술과 과학 기술 분야의 위대한 발견과 유익한 발명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재세례파를 거부하는 칼빈주의 정신의 발로였다. 연구와 교수에 지장을 받지 않는 한, 교육과 사회 문제, 교회와 국가의 관계 등 실제적인 문제들을 설명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전국을 여행하였다. 이 모든 사역의 기초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특별 계시였다.
바빙크는 반대자에 대해서는 항상 포용성을 가지고 상대방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당대의 기라성과 같은 많은 신학자와 기독교 사상가들을 존경하였다. 이들보다 어려운 시기에 칼빈주의의 기치를 올린 흐룬을 더 존경한다고 말하였다. 캄펀과 같은 소도시에서 활동하였으나, 그는 폭넓은 공교회적 정신을 지녔다. 이런 자세는, 그가 1888년 12월 18일에 행한 특강 기독교와 교회의 보편성에서 이미 잘 나타난다. “복음은 개인 뿐 아니라, 인류 전체, 가정과 사회와 국가, 예술과 학문, 전 우주, 바로 신음하고 있는 모든 창조물을 향한 복음이다. 신앙이 받은 약속은 세상을 이김이다. 이 신앙은 보편적이어서 때와 장소, 어느 국가와 민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신앙은 모든 상황에 적합하며, 본연적인 삶의 모든 형편과 연관되고, 모든 시대에 합당하며, 유익하며, 모든 환경에 적당하다. 오직 죄에만 대항하면서, 십자가의 보혈로 정화되는 것 외에는 어느 것과도 충돌되지 않는다.” 그는 자연과 은혜의 균형 있는 관계를 제시하면서, 분리측 교회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분리주의의 흔적을 경고하였다.
이처럼 온건한 바빙크였으나, 신학교육기관의 통합 문제에 있어서는 카이퍼와 큰 상처를 입었다. 카이퍼와도 갈등 관계에 빠졌고, 옛 분리측 인사들과도 등을 지고 말았다. 개혁파원리를 확고하게 따랐던 그가 이 과정에서 그 원리를 비판하는 지경에까지 나아갔다. 그는 교회 정치의 현실을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개혁파원리에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부패도 들어있는데, 교회정치는 종종 이 진리를 철저하게 체험하고 고백하도록 강요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그는 죄와 은혜, 죄과와 사죄, 중생과 회개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세태를 비판하였다. 이런 표현은 온건한 바빙크가 가장 신랄하게 표현한 예라고 볼 수 있다.
교회의 분리와 합동이라는 교회적인 문제뿐 아니라, 세기가 바뀌어서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되는 시대에 살면서, 신앙으로 헤쳐나간 바빙크가 임종시에 한 말은 그의 일생을 잘 요약한다: “내 학문이 내게 준 유익은 무엇인가. 내 교의학 또한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직 신앙만이 나를 구원한다.”
27. 바빙크와 한국교회
교회의 신학자 바빙크로부터 한국교회는 신학이 교회를 위하여 존재함과 세상을 향한 성도의 책임을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함을 배울 수 있다. 신학을 교회의 사안으로 확실하게 규정하되, 그 교육을 받은 목사들이 성도를 가르치고 이들이 세상에서 행해야 하는 사명을 잘 부각시켰다.
교회 합동과 학교 통합 논의 과정, 또 1905년 교리적 토론에서 보인 그의 중재적 자세도 흠모할 만하다. 교회 정치에 대한 측면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약한 바빙크는 교회 정치를 비교적 단순하게 접근하였다. 비록 교회정치의 희생자라는 면이 있지만, 이것이 말씀대로 사는 자의 진면목이 아닐까?
자기 교회와 그 신조와 경건을 사랑하면서 신학한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신학자였다. 교회의 주인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학이라는 이름을 경배하고, 그것을 목회 현장과 세상에서 구현하려고 애썼던 그는 경건과 신학의 좋은 귀감이다.
차제에 신조를 중시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바빙크 신학은 개혁파 신조를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지역교회를 기초로 한 교회회의와 정치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상회와 하회라는 위계적 제도도 사라질 것이다. 이런 기초 위에서 한국의 개혁신학도 발전할 것이며, 또 개혁신학의 전통 위에서 기도와 전도의 열심도 보태면, 개혁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ttp://chirosung.net/index.php?document_srl=33869&mid=etc_th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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