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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보다 강한 죽음의 능력, 루비켄드릭 (선교 130주년, 복음의 씨앗을 기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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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 켄드릭의 기쁨의 헌신

정리: 김재우선교사 


버지니아 출신의 존 켄드릭과 텍사스 정착민이었던 케이트 바넷은 1875년 12월23일 텍사스의 플래노 지역에서 결혼합니다. 그리고 1883년 1월28일 루비 켄드릭이 태어납니다. 루비의 부모는 신앙이 깊은 부부였습니다. 하지만 4살때 루비의 어머니 케이트가 죽고 루비 켄드릭과 2자매는 고모 레이첼에게 맡겨져 자라게 됩니다. 레이첼은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며 신앙으로 교육했는데 고모의 집에는 중국선교사였던 커닝햄씨가 자주 와서 세계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루비는 어렸을때부터 열정적이고 다른 사람들을 돕기 원했습니다. 루비의 주일학교 선생님은 어린 루비가 “저는 선생님이 저의 엄마를 닮아서 선생님을 사랑해요.”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루비는 텍사스의 플래노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아버지의 검은 머리와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를 닮은 아담한 소녀는 늘 주위의 주목을 받았다고 합니다. 루비는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온화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루비와 루비의 단짝 친구였던 메이는 부흥회 참석중에 세계선교에 헌신하게 됩니다 (루비는 후에 한국으로 메이는 브라질로 파송됨). 그 후에 루비는 텍사스의 콜린카운티의 머피학교에서 교사로 섬겼습니다. 당시 그학교의 교장이었던 모슬리씨에 의하면 루비는 학생들을 사랑하는 교사였고 또 학생들로부터 사랑받는 교사였다고 합니다. 


그후 루비는 캔사스시티의 스카렛 성경대학을 다니며 학생회장으로 영적 리더쉽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선교지로 떠나고 싶었지만 그녀가 당시 왕성히 활동하고 있었던 북텍사스 엡워쓰(존 웨슬리의 고향인 엡워쓰를 의미) 청년선교회에서는 그녀의 나이가 너무 어린 관계로 아직 선교사 파송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루비는 텍사스의 테렐카운티에 위치한 바톤 박사의 교회에서 1년간 목회지원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에서 사역하는 동안 루비는 주일저녁 메세지를 성도들과 나누곤 했는데 루비의 삶에 실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바톤 박사는 회고합니다. 


1년간의 목회지원 사역을 마치고도 나이가 어려 선교사 파송을 받을 수 없었던 루비는 바톤박사의 추천으로 웨슬리 대학에서 1905년부터 1906년까지 성경교사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 친절함과 열정에서 발산되는 매력은 많은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특히 그녀 주변에 가까이 있고 싶어하는 남학생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다가온 남학생들조차 그녀에게 영적으로 도전을 받고 경건한 삶을 살게 될 정도로 루비는 신앙적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또 많은 여학생들이 루비를 찾아와 아픔과 고민을 나누며 영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때부터 오직 한국선교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었던 루비는 인기가 많은 20대 초반의 여성임에도 편안하고 안락한 삶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1906년부터 루비는 사우스웨스턴 대학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루비는 오로지 한국선교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었지만 선교회에서 선교지를 정해주어야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루비가 할 수 있는 일은 선교회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당시 옆에서 루비를 지켜보던 찰스 바운스 목사는 1906년 여성선교대회에서 루비가 학생들에게 메세지를 전하는 것을 듣고 이렇게 회고합니다. “루비에게 주님은 실제하는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루비가 전하는 메세지를 들으며 그녀가 매일 주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는 사람임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중 1907년 5월 선교회에서 드디어 루비가 한국으로 가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루비는 믿을 수 없을만큼 기뻐하며 한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선교회에서 5년동안 한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했기에 5년동안 입을 옷을 꾸리던 루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에 가면 무슨 옷을 입을지, 어떤 헤어스타일을 해야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을거에요. 한국 사람들은 천오백년 동안이나 같은 옷, 같은 머리스타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거든요.” 


한국으로 떠나기 일주일전 루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을 떠나기가 어렵지만 그분께서 이미 모든 것을 아시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주실것을 압니다. 돌아올 집이 있고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떠난다면 십자가는 없는 것이겠지요.” 당시의 선교사들이 그러했듯 그녀 역시 한국으로 떠나는 것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떠나기 이틀전 텍사스의 맥키니의 한 감리교회에서의 모임에서 루비는 조용하고 온화한 목소리로 기쁨 넘치는 미소와 함께  한국선교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나누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울었지만 그녀는 미소지을뿐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그녀를 잘알던 조지 브라운씨가 고생스러운 여행길,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것에 대한 염려를 보이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은 저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에요. 걱정 마세요. 도착하면 브라운씨 아이들에게 카드를 보낼께요.”


1907년 8월28일 루비 켄드릭은 시애틀에서 아시아로 출항하는 미네소타라는 배에 올라 한국으로 떠났습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송도에서 이미 운영중인 학교일을 도왔고 선교회에서는 루비에게 언어공부에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루비는 주님과 교제하고, 언어와 노래 학습, 가사일을 하고 노인들과 아이들을 돌보며 보냈습니다. 루비는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한국 사람들은 그녀를 “예쁜 부인”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녀는 한국의 문화를 배우기 원했고 존중했습니다. 그녀는 한국의 것들을 존중하고 습득하기 원했습니다. 그녀의 친절함과 온화함에 그녀를 가까이서 경험한 한 한국노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는 그녀에게서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은 통역이 필요없는 언어입니다.”


송도에서 학교사역을 하던중 루비는 학교에서 가장 어린 한국 고아소녀를 돌보게 되었습니다. 그 소녀가 폐렴에 걸리자 루비는 헌신적으로 소녀를 돌보았고 어린 소녀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혼신의 힘을 다했던 것인지 루비의 육신은 급속도로 연약해졌고 그 후 얼마 안되어 충수염(맹장염)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1908년 6월20일 그녀는 25세의 짧은 생을 마치고 주님 품으로 갔습니다. 죽기전 대부분의 시간동안 그녀는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편지를 썼고 그 내용은 한국에 더 많은 일군을 보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북텍사스 엡웨쓰 청년선교회의 정기모임 중에 그녀의 동료들은 그녀가 주님 품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게 되었습니다. 그 모임은 루비 켄드릭을 애도하고 그녀의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는 모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루비와 같은 또래인 선교회의 자매, 메이 퍼거슨에 의해 Rudy Kendrick Memorial fund와 Ruby Kendrick Council of Mission이 조성되어 이후에도 청년들이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고 후원하고 선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죽기 한달전 텍사스의 청년선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저에게 선교사의 삶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설명할 단어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있으라고 한 곳에 있는 것에 비교할만한 더 기쁜 삶은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지요. '치뤄야할 희생은요?' 맞아요, 저도 그것들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그것들은 너무 많고 너무 크지요. 하지만 지금 그것들은 어디있나요? 주님이 주시는 보상에 비해 그것들은 너무 작고 사소하답니다. 제가 잠시라도 머뭇거린것이 얼마나 창피한지요. 선교회 여러분, 만약 주님께서 당신을 추수할 곳으로 부르신다면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빨리, 기쁘게, 그리고 온 마음으로 응답하세요...한국에는 추수할 것은 많고 일군들이 너무 적습니다. 여러분들이 십수명씩, 이십명씩 이곳으로 올것을 부탁합니다...나에게 천개의 생명이 있더라도 저는 한국을 위해 모두 바칠것입니다.” - 1908년 5월11일 송도에서 


*루비 켄드릭에 대한 자료들은 텍사스 달라스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Perkins School of Theology의 Bridwell Library에서 열람할 수 있습니다. Mary Hay Ferguson Eller papers, 1897-1949, bulk 1906-1930.

출처: https://m.facebook.com/notes/jaewoo-kim-worship-arts-mission/%EB%A3%A8%EB%B9%84-%EC%BC%84%EB%93%9C%EB%A6%AD%EC%9D%98-%EA%B8%B0%EC%81%A8%EC%9D%98-%ED%97%8C%EC%8B%A0/37915511886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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