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스 선교사(John Ross, 1842. 08. 09.-1915. 08. 06.),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자. 중국 영구에서 성경을 번역심양에와서 동관교회에서 추가 번역및 인쇄하여 한국에 전함
존 로스 선교사 가족
1842. 08. 09.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출신으로, 스코틀랜드 서북쪽에 위치한 조그만 영구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60년대, 글래스고대학교 수학하고 1860년대 중반에 에딘버러에 있는
연합장로교의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872. 02. 27. 해외 선교부는 존 로스를 중국 선교사로 선택했고, 3월 20일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인 인버네스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같은해 3월 25일에 스튜와트와 결혼하였다(30세). 30세의 나이에
중국 대륙을 향한 선교사로 출발하게 된다.
1872. 08. 23. 중국 산둥성 지부에 도착하였고, 9월에 만주 영구에 정착하였다.
1873년말, 영구 지방을 순회 선교했는데 이 때 그의 선교 방법이 성립되었다.
1874. 10. 09. 로스 목사는 영구를 떠나 순회전도하였고, 처음으로 조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고려문(Corean Gate)을 방문하게 된다.
1876년, 4월말과 5월 초에 고려문으로 두번째 여행을 하였다.
1876년 말, 로스 목사는 그의 첫 저서인 '만다린 프라이머(Mandarin Primer)'
라는 선교사들을 위한 중국어 교본이었다.
한국 개신교의 첫 세례자는 1876년 즈음이었으며 그들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와 백홍준 이었다.
자선 사업가 '로버트 아링톤'은 종이와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3,000권의 인쇄 비용을 돕겠다고 했고, 그는 두 번째 고려문을
방문하도록 도왔다.
1877년, 그의 두 번째 저서인 '조선어 교재(Corean Primer)'를 발행하였다.
1878년, 로스목사는 봉천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맥킨타이어 목사는 영구를
담임하였다.
1879년, 첫 번째 안식년으로 로스목사는 이 기간 중에 펴 냈던 두 책의
원고와 4복음서, 사도행전 및 로마서의 첫 번역 원고를 가지고 갔다.
로스 목사의 조선어 교사는 이응찬 이었다.
1881. 02. 24. 로스 목사는 재혼하였고 두 번째 아내 이사벨라스트랩
맥패디언은 8명의 아이들을 출생했지만 그 중 네명만 생존하여
성인이 되었다(39세).
동양학 연구의 이정표인 '조선의 근대사'를 저술하였다.
1882년, 만주 심양에서 최초의 한글 성경인 눅가복음이 출판되었고1,000권을
일본에있는 스코틀랜드 성서회 앞으로 보냈다. 곧이어 요한복음이
출판되었다.
1887년, 한글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전서'를 번역, 출판하였다.
1888년, 두 번째 안식년을 맞아 런던 선교 수양회에 참석하여 중국과 한국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여 하였다.
1890년, 둘째 딸 캐티지인이 죽는 불운을 맞았다.
1894년, 로스목사는 글래스고우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8년, 로스목사는 불굴의 여행자였다. 1월에 다시 여행했고 중국인
122명과 조선인 95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1899년, 로스 목사는 대부분의 시간을 신학생 고학년을 가르치며 보냈다.
20세기 초, 만주 교회의 교인 수는 11,000명이 되었다.
1902년, '만주에서 선교방법' 이라는 책을 썼다.
1907년, 6월에 로스 목사 부부는 안식년을 맞아 영국으로 갔다.
1909년, 5월에 '중국의 원시 종교'라는 책을 썼다.
1910년, 7월 초에 외국 선교부에서 퇴직할 의사를 발표했고 38년간의 봉사는
끝났다(68세).
1915. 08. 06.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주님께로 갔다(73세). 8월 11일에
에딘버러의 뉴윙턴 묘지에 묻혔다.
묘비명: '만주와 중국에서 40여년 간 사역한 선교사 존 로스'
1930. 12. 19. 15년 후, 그의 부인 이사벨라가 글래스고우에서 죽었다.
⇒ "고려문"이란 마을은 청과 조선 사이에 있는 세관이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고, 그것은 봉황성에서 떨어진 봉황산이라는 산맥 옆에 위치하였다. 세관은 일년에 네번씩 열렸고 3, 9월에 여는 장이 가장 중요하였다.
⇒ 로스 목사가 신약을 번역할 때에 현재 교회가 사용하는 하나님, 성령, 천사 등의 용어 선택이 제일 어려웠다고 했는데 현재 교회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용어를 로스 선교사가 택하고 만들었던 것이다.
⇒ 존 로스는 11개 국어를 구사할 만큼 탁월한 언어능력의 소유자로서 미지 세계에 대한 강렬항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로스의 한국 선교에 대한 본격적인 시도는 1차 고려문 방문으로 보는것이 타당하다(1874).
⇒ 로스 목사는 저술을 많이하는 선교사였다. 첫 안식년에 그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였고 또한 영어로 동양 역사에 관한 책 등 두 권을 썼고, 연합 장로 교인들을 위해 중국에 대한 소개의 글도 썼다.
⇒ 로스 선교사는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쳤는데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글 신약 선경을 완역한 것이다(1887).
대표적인 저서들: Mandarin Primer: Being Easy Lessones for Beginners, Transliterated According to the European Mode of Using Roman Letters(1876), and Corean Primer(1977), 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rden(1879), Korean Speech with Grammar and Vocabulary(1882), Mission Methods in Manchuria(1903), The Original Religion of China(1909) etc.
⇒ 로스는 1879년도에 한국의 역사책을 영어로 저술 출판할 정도로한국 역사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 그는 말하기를:
"신앙심 깊고 지식있는 토착 전도자를 이용하는 선교회는, 발전이 있고 그것이 없는 선교회는 발전이 없다."
⇒ "로스 선교사는 그의 부인과 4명의 아이들을 중국땅에 묻었지만, 그는 슬픔을 선교의 열정으로 승화시켰다."
⇒ 로스가 한국 선교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한 말:
"a new people, a new country, a new language opening up to the Christian church"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나라, 기독교 교회를 위한 새로운 언어를 여는 것"
⇒ 로스 선교사는 50세가 되어서도 아직 모험가였으며 선교사역을 돌아보기 위해 넓은 지역을 여행 했고 교회가 더 확장될 수 있는 새로운 지역이 없을까 하고 찾아 다녔다.
⇒ "Without Jesus no Paul and no Nazarenes; but without Paul no world Christian."
"예수님이 없으면 바울도 나사렛사람들(기독교인들)도 없다; 그러나 바울이 없으면 세계 기독교는 없다."
⇒ 로스 목사는 교회를 세울 때 선교사의 지식과 열심 보다는 그의 인격이 더 중요하며, 희생하는 마음 없이 자기 문화의 가치와 개인의 쾌락을 선행한다면 전도인 마음에 방해될 것이라고 했다. 교회가 먼저 예수님의 마음으로 희생하는 자를 착는다면, 다른 선교 문제는 해결 될 것이라 했다.
⇒ 로스는 40년 선교사역 기간 중 단 한번만 한국을 방문하는데 그것은 1887년 9월에 새문안 교회의 직분자를 세우는 자리였다.
⇒ 한국 초기의 장로교회 공동체의 형성에서 주된 요인은 네비우스 선교방법론에 의한 평가라기 보다는 존 로스의 토착선교이론에 입각한 균형잡힌 삼자원리에 의한 것 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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