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발표한 95개조 반박문으로 인해 발생한, 현재의 개신교를 탄생시킨 개혁이다.
들어가면서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에 달하는 면죄부 반박문을 못박을 때에 성당 안에 울려퍼지는 소리와 더불어 중세 로마 가톨릭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교황의 일방적인 독재 아래 시달림을 받던 세속 제후들이 자유를 얻게 되었다.
중세 말기에 지식인들이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풍자하며 도덕적인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중세인들에게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신의 목소리를 듣기 원했고, 인위적인 평안이 아닌 신이 직접 전하는 평안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바로 이러한 요구를 루터가 충족시켰던 것이다.
루터는 중세의 신비주의적 경건과 예리한 지성으로 중세교회의 부정과 인위적인 가면을 벗기고서 복음의 실체를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선물했다.
독일에서 일기 시작한 개혁의 움직임은 스위스를 거쳐서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북부 유럽 지방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으로 번져나갔으며, 16세기 내내 유럽은 대변혁을 맞이 하였다. 이 사이에 국가는 점차적으로 교황청의 억압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문예부흥과 더불어서 지금까지의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변하였으며, 신학의 시녀로서 빛을 보지 못했던 철학이 과학적인 방법의 도입과 더불어서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서 무조건적인 신앙의 강요가 호소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신대륙의 발견과 더불어서 교회의 확장과 박해받던 유럽의 개신교 신자들에게 탈출의 기회가 마련되었으며, 지금까지 억압받던 노동자와 농민들이 제 몫을 찾기 위해서 조용한 시위를 일으키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새로운 양상의 변화가 일어 났었다.
그리고 공격을 받은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는 조용하게 자신들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서 개신교에 반격할 수 있는 철갑을 더욱 단단히 함으로써 내부 개혁을 실시해 쇄신되었으며, 다른 한 쪽에서는 개신교가 미처 힘을 쓰지 못하는 사이에 교황권 옹호와 해외 선교에 힘을 쏟는 교단이 시대적 필요에 부응해서 창설되기도 하였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독일과 스위스, 그리고 영국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혁운동에 만족하지 못하고서 더욱 철저한 개혁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들은 소위 말하는 초대 교회로의 복귀를 주장했던 재세례파와 신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강조하는 신령주의자들과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반(反)삼위일체파들이었다.
종교개혁의 역사는 위에서 열거했던 내용으로서 진행되었다. 종교개혁은 어떤 사상이나 제도든지 원래의 순수하였던 이념을 상실하고서 그 이념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에 메이게 되면 내부적으로 썩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개혁론자들 역시 기독교의 굳은 단결을 철저히 깨뜨려 여러 종파로 분열시켰고, 그로 인해 기독교 종파 간 갈등을 가중시켜 신앙상 혼란을 일으켰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종교개혁의 요인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잘못을 고쳐서 신약교회의 원형으로 개조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런데 16세기의 종교개혁의 모습을 보면 루터만이 아니라 그 이전 사람들이 있었다. 영국의 존 위클리프나 보헤미아의 얀 후스는 사상적인 개혁자들이었고 사보나롤라 같은 이는 도덕적인 개혁자였고 버나드나 타울러나 엑카르트는 신비적인 개혁자들이었다. 이들에 의하여 준비된 종교개혁은 성경의 절대 권위와 무오류설, 이신득의의 교리,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을 기본 원리로 하여 로마 가톨릭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루터나 칼빈은 이러한 운동을 보다 더 효과있고 광범하게 전개하였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을 준비시킨 요인은 3가지 정도로 말할수 있을 것이다.
1) 도덕적 요인
만일 루터가 대사 남용을 정당시한 텟젤과의 대결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늦어졌을런지 모를 일이다. 교회가 신령한 축복을 돈받고 파는 장사를 하면서도 그것을 합리화 시키려 할때 루터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외에도 성직매매가 성행 했다. 그리고 신부의 문란한 생활과 사회의 지탄을 받는 생활을 했다. 이러한 도덕적 타락은 일부 주교들이 교회개혁을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정식으로 건의하기에 이르기까지 했다.
2) 지적인 요인
르네상스는 유럽의 지적인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고대 문학에로의 복귀, 개인주의적 각성, 지리상의 발견에 따라 동서 문화의 교류, 봉건제도의 붕괴에 뒤따른 상업인구의 격증, 스콜라 철학의 퇴조와 함께 득세한 옥감주의의 득세, 이 모든 것들이 중세의 사상적 기초를 흔들었다. 북유럽에서는 인문주의가 대학가를 휩쓸었다. 르네상스에 뒤따른 새로운 학문열은 교부신학과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를 불지르고 종교개혁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여 주었다. 중세의 긴 지적인 통제는 성서적 인문주의의 세찬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3) 사회적 요인
십자군 이후 봉건 사회가 점차 무너지면서 상업의 발달로 농업 경제가 상업 경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에 변화가 생겨졌다. 국가주의의 등장으로 에스파냐와 프랑스에서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 아래 들어오게 되고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로 인한 교황권 위신의 실추는 교회개혁을 부채질 했다. 교황청이 부과하는 조공의 상승과 지나친 사치는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했고 루터가 개혁의 봉화를 들자 독일의 농민들은 일제히 봉기했다.
십자군 운동의 결과로 동방의 사치품이 수입되고 서방 사회는 사치 풍조에 휩쓸리게 되었고 사제주의의 횡포로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교제가 단절된 무리들은 영적인 해갈을 위하여 현실 도피에 신비주의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렇듯 교회와 백성 사이에 생겨진 괴리에 새로운 개혁의 가교는 누군가에 의하여 놓여져야만 했다.
독일의 종교개혁
개관
독일의 종교개혁은 먼저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각종 모습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루터의 외침이 독일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세속 제후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교황청으로부터의 경제적·정치적 자유를 얻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1) 종교개혁 이전의 독일의 정치적 상황
종교개혁 이전의 독일의 상황은 다른 나라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교황청이 위치한 나라로서 십자군 전쟁 이후로 도시의 발달과 봉건 제도에 도전하는 단계에 있었다. 프랑스는 십자군 파견으로 전쟁 이후의 세력권에서 크게 부상하였다. 에스파냐는 1492년 이래로 통일 왕국 시대를 맞이해서 해상무역권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에스파냐의 위성국가 였으며,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의 위성국가로서 힘은 발휘하지 못했으나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청의 힘이 가장 강력히 미칠 수 있었던 곳은 독일 뿐이었다. 그리고 독일인들의 보수적인 기질마저 겹쳐져서 교황청의 시녀 노릇을 자처하였다. 각종 세금성 헌금을 바치는 등 독일은 교황청의 재정적 수입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통치 아래 대봉건 영주들의 총회의를 두고서 제국을 통치하였다. 공동의 주전법으로 화폐를 통일시키고 관세법을 통일시킴으로서 하나의 의회 아래에서 통일 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운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8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던 막시밀리안이 1519년 1월에 죽고 부르군디의 필리프의 아들이며, 에스파냐 왕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의 손자인 카를 5세가 1519년 6월 선제후들의 손에 의해서 새로운 황제로 선출되었다. 카를 5세는 독일계 에스파냐 사람이었다.
2)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교황청의 착취
문예부흥과 더불어서 각종 예술의 부흥이 유럽 전역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교회도 예술적인 감각을 도입하였다. 역대 교황들은 취임과 더불어서 자신의 임기 동안에 거대한 성당과 궁전을 짓고 그 곳을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을 일생의 보람과 업적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큰 사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 자금원은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세속 제후들이었다.
루터가 그의 논문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을 통하여 독일 내에서 개혁되어야 할 폐단 27종류를 열거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이러한 로마의 수탈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폐해가 컸던 첫 수입세, 팔리움, 보류권, 사라젠세 등은 각종 공물 제도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밖에도 조달비, 공석금, 기부금, 십자군 자금 등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교황청은 십일조를 강요하였는데 십일조란 각 개인이 수입의 1/10을 교황청에 바쳐야 하는 제도였다. 종교개혁자들의 눈에는 이러한 광경이 신의 이름으로 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흡입기를 제도화 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마르틴 루터
1) 95개조 명제를 못박기까지
종교개혁의 기폭제는 대사(大赦)였다. 대사는 사도 시대 이래로 인간 구원 과정에 있어서 보조 수단으로 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혈 공로와 성인들의 보속 공로를 갖고서 신자가 현세에서 또는 죽은 다음에 연옥에서 받아야 하는 죄의 잠벌을 없애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를 범한 신자가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의 잘못을 용서받고 영벌에서 벗어났지만 자기 죄 때문에 생긴 벌을 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죄벌은 먼저 고해 신부가 부과하는 보속의 실천을 통해서 덜어질 수 있다. 아울러 보속하지 못한 잠벌은 대사를 통해서 면제받고 영혼이 정화되어 구원될 수 있다.
1513년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대사(大赦)를 반포하고 대사부 판매 촉진을 목적으로 대사 설교를 실시하였는데, 루터는 신자들이 대사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를 망각하고 대사를 면죄부로 착각하여 남용하고 있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이 문제에 비판적인 자신의 견해를 95개조로 낱낱이 써서 비텐베르크의 교회 정문에 내걸었고, 로마 교황이 파견한 특사 요한 에크와 논쟁을 하게 된다. 루터는 에크와의 논쟁에서 교황권과 공의회의 무류성을 거부하였다.
2) 라이프찌히 논쟁
1519년 엑크와 루터 사이에 라이프찌히 신학 논쟁이 개최되었다. 이 논쟁에서 결국 엘리트 신학 코스를 받은 엑크가 이기게 되고, 루터는 우울하게 비텐베르크로 되돌아간다.
마침내 루터는 교황과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영적 독립을 선언했으며 교황에게 반감을 가진 독일의 기사 및 시민들이 그를 열렬히 지지하였다. 이날 이후로 루터는 확고한 신념으로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교황은 적 그리스도의 상징이며, 가장 악마적인 존재로 묘사되었다. 당시 독일의 정세는 루터의 개혁을 단순히 영적 차원에만 국한시키지는 않았던 것이다. 상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소집한 제국 의회에 루터가 소환될 정도로 확대된다.
3) 보름스회의
보름스회의로 추방령이 내려진 이후 루터는 작센의 프리드리히 제후의 보호로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거해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에 임하며, 당시 그의 신약성서 번역은 독일 문학사와 특히 현대 독일어 발전에 주춧돌이 된다. 루터의 과격한 설교와 저서는 곧 독일 교회를 혼돈으로 빠뜨리게 된다.
5) 농민봉기와 루터의 좌절
어떠한 일에든지 돌발적인 현상이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다가 시간이 되면 뜻밖의 현상인 것처럼 돌출하기 마련이다. 루터 개인이 보름스회의에 참석할 때까지만 해도 죽음을 각오하고 뒷일을 멜랑히톤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은신해 있는 사이에 비텐베르크의 분위기는 예상 밖에도 칼슈타트가 주도하면서 시위적 양상이 곁들어 들자 지금까지의 불만 세력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4세기부터 16세기의 대변혁기에 이르기까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농민들이 자신들의 권리 회복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지배층의 착취를 언제나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신분상 농노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농민들의 불만이 루터의 힘을 얻고 1524년 터져 나왔다. 이 농민 소요는 더욱 거세게 몰아치면서 도시의 빈민층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 운동에 농민들이 가담함으로서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은 다름아닌 루터였다. 지금까지 루터가 교회개혁을 주도하는 데에는 프레데릭의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 편에서 프레데릭은 착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힘 없는 농민들보다는 힘 있는 선제후들을 지지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지지자들을 잃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로마 가톨릭측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아우구스부르크 협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주장이 여러 동조자들과 함께 수정되어서 제출되는 등 혼자의 힘으로 반 가톨릭 운동을 이끌어 갈 수 없게 되었다.
소요한 농민들은 짧은 시일 내에 결성된 모임체였기 때문에 내부적인 결속력이 없었으며, 운동 자체나 외부의 대항 세력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었다. 농민들의 소요 사태는 독일 북부로부터 진압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526년에 거의 진압이 되었다. 진압 과정에서 소요군의 사망 수는 100,000-150,000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루터였다. 루터는 농민들이 잠잠해 줌으로서 원하는 독일교회의 개혁이 달성될 수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소요 지역들을 찾아 다니면서 농민 운동을 당장 그만두라고 하였다. 이것이 실패할 경우 자신의 반 가톨릭 운동에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설교 여행을 떠났으며, 이 기간 동안에 그토록 자신을 지지했던 프레데릭이 사망했다.
루터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 "농민들로 이루어진 살인과 도적 떼를 반대하며"라는 소책자를 발표했다. 심지어 루터는 이 책자에서 제후들에게 농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말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힘이 되었던 제후들, 특히 선제후 프레드릭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선무 설교 여행까지 감행했던 것을 볼 때에 손을 씻은 빌라도를 연상케 된다. 아무튼 농민 소요는 루터에게 치명타를 가한 것은 사실이다.
6) 루터의 개혁 평가
루터는 본래 로마 가톨릭을 개혁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교황청에 의해 등 떠밀리다시피 해서 하게 된 것이 종교개혁이다. 루터는 근본적으로 보수파였으며, 루터의 개신교는 보수적이고 소극적이었다. 어쨌든 루터의 종교개혁은 종교를 탈피한 점에 특색이 있고, 그것으로 지도권을 행사해 온 로마의 지적 문화에 대한 반발심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그 반발심에는 질투심이 내포되어 있었다.
덧붙여 당장 루터를 믿고 봉기에 나선 농민들에게 "인간은 신 앞에서는 평등하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는(현실에서 차별은 있다고 하는 의미) 고사에서 알 수 있듯이 루터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와 상관 없이 귀족 기반의 개혁을 추진하게 된 관계로 일반 민중들에게 깊숙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
스위스는 역사적으로 유럽의 오지에 속하는 척박한 땅으로서 산업이 발달할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자유를 원하는 농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자주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다 각종 박해받던 신앙인들이 몰려들게 되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고 1291년 연방체계로 발전하였다.
스위스는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으며, 서쪽의 프랑스어 사용권 지역과 북쪽의 독일어 사용권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종교개혁 즈음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의 박해를 피해서 많은 개신교도들이 피난와서 슈트라스부르크를 중심으로 이민사회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며, 제네바도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산업의 발달이 거의 불가능한 지역이었으나, 지리적인 조건 아래에서 단련된 신체적 강인함으로 인해서 스위스인들은 오래전부터 교황청의 용병으로서 재정적 수입을 충당 하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용병제도는 프랑스의 아비뇬 교황청 시절에 양쪽으로 용병이 팔려감으로서 상호 전투를 겪는 민족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챨스5세와 프란시스 1세 사이의 전투에 다시 한번 용병으로 팔려가서 동족끼리 살상하는 모순을 겪었다. 그래서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용병제도의 근절이라는 재정적 수입원의 차단으로 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크게 틀렸다고 말할수 없다.
1) 츠빙글리의 개혁
울리히 츠빙글리츠빙글리는 독일의 개혁자 루터와는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루터는 개인의 구원의 확신을 위한 영적 투쟁으로 부터 출발해서 복음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다음에 로마 가톨릭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는 순서를 밟았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처음부터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고서 이것들을 에라스무스적인 풍자와 학문적인 공격으로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럼으로 츠빙글리는 개인의 구원과 말씀안에서의 구원의 확신이 처음부터 약했다. 그렇지만 그는 나중에 목회자로서의 경륜이 쌓여감에 따라서 교회와 교인들의 요구사항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으며, 본인도 점차적으로 복음의 진수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복음 이해는 인문주의적인 합리적 요소가 끝까지 있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재세례파 사람들이취리히를 중심으로 반기를 들면서 재세례를 베푸는 불상사가 일어 났었다. 그렇기 때문에 츠빙글리는 과격 재세례파 사람들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 고통이 있었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루터 보다 훨씬 강하였다. 그는 용병으로 벌여들이는 수입보다는 한 사람의 동족의 생명을 더욱 안타까워 했다. 그래서 그의 개혁은 재정적 수입원의 차단이라는 고육책으로 모범을 보이는데서 인정을 받았다. 츠빙글리는 루터만큼 많은 저술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글은 개혁교회의 기초가 될수 있는 복음 이해와 성찬 이론을 확립 시켰다.
그러나, 47세라는 인생의 황금기에 죽음으로 인해서 자신이 벌여 놓았던 많은 일과 사업의 뒷마무리를 후배인 칼빈에게 양보하고 말았다. 이러한 면에서 같은 인문주의자로 출발해서 복음주의로 바뀌었던 칼빈은 가장 적절한 후계자이며, 또한 완성자 였다고 말할수 있다.
2) 제네바의 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
제네바는 1387년 이래로 도시의 군주로서 주교, 도시의 소유자로서 사보이 가문의 백작, 그리고 자유 시민들로 이루어진 3원체제에 의해서 통치 되어 오다가 1444년 이후로는 사보이 가문에서 주교까지 세습적으로 계승함으로서 자연히 자유시민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네바의 시민들은 스위스의 자치주들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프라이부르크와 제휴하였지만 베른은 이에 동의하지 않으므로 인해서 적잖은 대결상태를 유지 했었다.
이렇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제네바 시는 소의회와 대의회제도로 바뀌었으며, 모든 중세사는 대의회에서 결정 하였다. 베른은 제네바가 개혁되기를 바라는 눈치 였으나, 공개적으로 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현수막 사건이 발생 했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를 회개하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진실하게 믿으면 모든 죄에 대한 완전 면죄부를 수여 받을수 있다"라고 쓰여졌다.
이로 인해서 1532년 가을에 제네바에 도착해서 조용하게 가정집에서 설교하던 파렐, 사우니어, 올리베탄은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파렐은 제네바를 포기 할수가 없어서 프로망을 불어선생의 자격으로 제네바에 잠입 시켜서 불어교습과 더불어서 개혁적 복음주의를 설교케 하였다. 그러다가 점점 숫적으로 불어난 복음주의자들과 가톨릭주의자 사이에 시민전쟁을 방불케하는 격렬한 몸싸움도 있었다. 여기에서 윌리라는 이름의 가톨릭 사제가 희생되었다.
가톨릭 측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려고 하였으나 베른은 복음주의자 편에 서서 옹호하고 나섰다. 프로망의 활동으로 가톨릭 수도자와 공개 토론회가 실시 되었으며 파렐은 공개 토론회 참가자로서 1532년 12월20일 에 다시금 제네바에 발을 딛을수 있었다. 그래서 1533년 2월에는 최초의 복음주의식 세례를 베풀었으며, 3월1일 부터는 공개적으로 복음주의식 예배를 드렸으며, 수도원의 교회를 빌려서 사오천명씩 한꺼번에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제네바 시는 기사도 정신에 뛰어난 프랑스인 파렐을 맞이해서 개혁을 이끌어 갈 준비를 마쳤다. 이제는 길이 닦인 도로 위에 복음주의 마차를 이끌어갈 마부가 필요 하였다. 바로 이러한 요구조건을 충족시켜준 사람이 바로 존 칼빈 이었다.
3) 칼빈의 개혁
가. 시작
1537년 1월에 칼빈은 제네바의 대의회 앞에서 자신의 개혁안이 담긴 비망록을 전달하였다. 성만찬, 공중 예배에서의 찬양, 어린이의 종교교육, 결혼 등 4가지 였다. 성만찬은 가급적으로 자주 집행하는 것이 좋으나 현재적인 형편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행하는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합당한 자는 주님의 몸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출교에 관한 치리를 제정해서 참여치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회중에게는 시편찬송을 적극적으로 권장함과 동시에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간략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작성해서 목회자가 직접 가르치도록 했다. 결혼은 지금까지 악하고 비성경적인 교황청의 법에 의해서 이루어 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새로운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칼빈의 새로운 제안은 교회의 행정에 관한 조항으로서 소의회와 대의회를 통과 하였다. 성만찬은 일년에 4차례 집행하며, 결혼광고는 예식거행에 앞서서 3주 동안 광고하여야 한다고 규정 하였다.
제네바 시는 칼빈과 그의 동료 파렐의 가르침에 따라서 종교개혁을 추진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다같이 개혁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1538년 1월에 시의회는 원치않는 사람에게는 성만찬을 베풀지 않는다고 결정하였으며, 2월의 시의회 선거에서는 칼빈과 파렐을 반대하는 4사람이 특별 평의원으로 당선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른 시의 간섭과 더불어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재세례파와 손을 잡았으며, 파렐과 칼빈은 아리우스주의자 이며, 자유방임주의자라고 비난 하였다. 베른의회는 제네바를 위시한 전지역을 그들의 손에 넣을려고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연약한 제네바 시의회는 3월에 이르러서 베른의 예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 하였다. 이러한 사태변화 가운데서 꼬로우, 파렐, 칼빈은 제네바시를 떠날것을 명 받았다.
파렐과 칼빈은 제네바를 떠났으며, 칼빈은 허탈감에 빠져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연구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그간 파렐과 더불어서 3년동안 개혁을 시도 하였던 모든 일이 허사로 끝난데 대한 분노와 갈등을 이겨 내면서 연구와 동시에 프랑스 난민들을 돌보는 목회일에 전념 하였다.
나. 다시 돌아온 칼빈과 그의 개혁
파렐과 칼빈이 떠난 제네바의 상황은 예전보다 좋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악화되는것 같았다. 새로 부임한 목회자를 특별평의원들은 자기의 종같이 부렸으며, 모든 가장들에게 교회에 참석토록 하는 의무규정을 부과 하였으며, 주의 만찬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도시의 도덕적 수준은 날로 저하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평의원들은 인기가 떨어지고 다음해 선거에서 재당선하지 못했다. 이때로부터 칼빈을 다시 초청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539년 10월 대의회에서 대표자를 보내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칼빈은 보름스의회에 참석중이었기 때문에 답장을 유보한채 번민에 있었다 이 때 파렐릐 충고가 크게 작용 하였다. 파렐은 제네바가 차지하는 지역적인 중요성을 들어서 제네바가 개혁되면 인근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의 복음화가 가속화 된다고 강력하게 설득하였다. 칼빈은 3년여 동안 제네바를 떠나 있다가 1541년 9월 13일 다시금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네바 교회규범을 제정해서 의회에서 통과 시켰다. 이제는 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엄격한 훈련과 경건생활 실천을 위한 각종제도와 이단을 색출해서 처리하는데 이르기까지 칼빈은 정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다. 제네바의 개혁추진과 칼빈의 신학
칼빈은 제네바에서 소위 말하는 외국인이었다. 이런 그가 제네바에서 세력을 얻어 확장시키기까지의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다시 돌아온 칼빈과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마찰이 끊임없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칼빈의 사상을 율법적인 독선이라고 비난하였다. 마치 루터에게서 농민전쟁이 예기치 않는 결과를 초래하였듯이 칼빈도 이들을 맞이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제네바의 현지인과 자유주의자.
칼빈의 개혁은 이단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데에서 다른 사람과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단성이 있는것은 정죄하였으며, 자유주의자들을 맞이 해서는 전통신앙과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교리적인 문제
칼빈 역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미사를 폐지하였고, 교계제도를 장로제도로 바꾸었으며, 교회의 성 미술을 우상이라며 배척하고 파괴하였다. 칼빈의 주장은 크게 다음과 같다.
1)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2) 무조건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 속죄 (Liminted Atonement) 4)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table Grace) 5) 성도의 견인 (Persiverance of the Saint)
위의 교리는 "칼빈의 5대 강령"이라 하며 이 교리를 반대하는 많은 개신교 종파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칼빈을 괴롭혔던 교리적인 문제는 미카엘 세르베투스 와의 신학적 논쟁과 그에 대한 처형에서 야기되었다. 칼빈은 그를 처형시킴으로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비난을 받아 오고 있다.
칼빈의 절대군주적 신정정치
제네바는 본래적으로 자유스러운 분위기 였고 자유가 강조되는 나라였다. 그러나 칼빈은 타락한 사람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생활규범과 훈련이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부임하자마자 4가지 개혁안을 부르짖었다. 이렇게 해서 어느 정도 질서가 잡혀가는 듯 하였으나 칼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강하게 요구하였고, 급기야는 자기를 으뜸으로 하는 신정 국가로 만들어 공포정치를 펼치기에 이르렀다.
칼빈의 엄격한 생활규범은 생활 전반에 걸쳐서 실시되었다. 춤, 도박, 주정, 술집 출입의 횟수, 방종, 사치, 접대 행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의복 착용, 음란하거나 비신앙적인 노래등 금지, 혹은 비난, 구금형을 가하였다. 심지어는 잔치집의 접시까지 세웠다. 주민들의 교회 참석 여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파견되었으며, 교회법원의 사람들이 가정을 1년에 한 차례씩 찾아가서 신앙상태를 점검 하였으며,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무심코 밷은 말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이상과 같은 엄격한 규율은 네델란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영국의 청교도에 이르기까지 개혁교회의 주된 윤리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라. 칼빈의 개혁 평가
칼빈은 자기들을 언행을 지적하고 반대하는 교황을 포함한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을 두고 적그리스도니 뭐니 비방을 하였지만, 정작 그 자신도 교황 못지 않은 자리를 만들고 사람들 위에 앉아 군림하여 민중을 억압하는 공포정치를 대대적으로 실행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종교개혁기 이후 소위 종교개혁을 주장한 사람들과 그 후계자들(특히 재침례교도들)이 이상한 교리들을 만들어 내세워 자기들을 교주화 하게 되었다.
영국의 종교개혁
영국의 종교개혁은 대륙의 개혁과 다른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의 반대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정치적인 문제로 진행되었으며, 한 사람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서 많은 사람이 조금씩 개혁 쪽으로 이동되어 갔다. 따라서 영국의 개혁은 신학적인 이론에 있어서는 자연적으로 대륙의 개혁자들의 신학을 받아들였으며, 그것도 주로 스위스 개혁자들의 사상으로 흘렀다.
1) 헨리 8세
리차몬드의 공작이었던 헨리 7세는 영국 내부의 결속을 어느 정도 다진 다음에 종주국이었던 에스파냐와의 우호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에스파냐 왕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 사이의 셋째 딸인 캐더린을 맞이해서 큰아들 아더와 결혼 시켰다. 1501년 11월 14일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1502년 4월에 신랑이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사벨라는 강력한 압력을 가해서 아더의 도생 헨리 8세와 재혼시킬 것을 요구했다. 만일 듣지 않으면 결혼 지참금을 회수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캐더린은 1509년 시동생인 헨리 8세와 결혼하였다. 철이 들면서 헨리 8세는 어쩔 수 없는 결혼이었지만 아들을 낳아서 왕위를 계승할려고 했으나 캐더린과의 사이에는 딸만 낳았고 그것도 다 죽고 오직 메리 튜더만 살아 남았다.
이런 과정에서 헨리 8세는 궁녀 앤 볼렌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아이를 갖고 만다. 따라서 자신이 캐더린과의 결혼은 불법이므로 이혼하고 앤과 함께 결혼하기를 원했다. 월시 추기경은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영국을 떠난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이혼 요청은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불허로 거부되었다. 이에 월시는 그 책임을 물어 실각되고 그의 뒤를 이어 토마스 크랜머가 영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토마스 크랜머는 헨리 8세의 요구에 따라 교황권 제한령과 사전 보호법을 발동시킨다. 이 두 가지 법으로 교황의 권한이 영국 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국왕의 허가 없이 교황에게 항소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헨리8 세와 앤과의 결혼이 적법하다고 공포되고 앤은 왕비가 되었다.
1533년 9월 앤이 공주 엘리자베스를 낳고 1534년 국왕의 영국 국교회 수장법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1536년에는 수도원 해산법을 통과시킴으로서 드디어 영국 국교회가 탄생되고 말았다. 물론 이에 교황청은 격노하여 헨리 8세를 비롯해 앤 볼렌, 크랜머 등을 파문하였다. 앤의 두 번째 임신과 더불어서 왕위 계승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누구든지 왕자를 낳으면 계승권을 가지고 그 다음으로는 메리,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엘리자베스라고 명기 하였다.
1536년 앤이 두 번째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 8세는 간통죄를 적용해서 처형시키고 그의 눈길은 세번째 여인인 제인 시모어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고서 죽고 만다. 그 후 헨리 8세는 클리부스 앤과 결혼하였으나 이혼하고 크랜머도 참수시킨다. 이제는 보수파에서 캐더린 하워드를 왕비로 내세우면서 로마 가톨릭 6개 조항을 발표시켰다. 그러나 보수파도 얼마가지 못하고 헨리 8세는 캐더린 하워드를 간통 혐의로 처형하고서 마지막 여섯번째 부인인 캐더린 파르와 결혼하였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음으로서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른다.
헨리 8세는 6번을 결혼하면서 각 권력의 암투에 휘말리면서 개혁보다는 권력 유지에 부심했다. 즉 개혁을 향한 의지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래서 영국 국교회는 완전한 개혁 측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로마 가톨릭 측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2) 에드워드 6세
에드워드 6세는 10세에 왕위에 오르면서 너무도 어린 나이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히 외척이 힘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삼촌이었던 헤르포드의 백작은 섭정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서머셋 공작으로 승진 하여서 국가의 총사령관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서머셋은 개신교 추종자였다. 국가의 교회 종속은 속속 진행되었다.
로마 가톨릭 6개 조항을 파기시킴과 더불어서 모든 가톨릭과 관련된 법을 파기시켰다.
국회는 이종 성찬을 허용하였다. 또한 성직자의 결혼을 금하는 법령을 무효화 시켰다.
에드워드 제 1기도서가 작성되었다.
성경의 출판과 판매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에드워드 제 2기 도서가 마련되었다.
영국 국교회의 대헌장이라고 할수 있는 42개 조항이 발표되었다. 물론 이 헌장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에 39개 조항으로 대체되기는 하였으나, 영국 국교회의 근본적인 신앙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헌금법을 발동하여서 모든 헌금을 국왕의 수입으로 함으로써 교황청의 재정을 압박하였다.
이상과 같은 변화가 영국에서 일어나자 유럽으로 피난 갔던 개혁추진파들이 급거 귀국하였으며 동시에 유럽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영국으로 망명 오는 사람들로 있었다. 이렇게 해서 대륙으로 피난하였던 사람들이 새로운 학문과 개혁적 전통을 영국 교회에 소개하기 시작함으로써 영국의 대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3) 메리 1세의 반동
에드워드 6세의 사망은 영국의 왕위 계승 문제를 야기시켰다. 영국인들은 메리에게 눈길을 돌렸으며 왕위에 오른 메리는 자연스럽게 영국의 가톨릭화를 추진하였다. 메리 1세는 한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그래서 그녀는 헨리 8세의 시절과 에드워드 6세의 시절 법령을 상당 수 번복하였다. 헨리 8세와 캐더린의 결혼은 적법한 것이었으며, 메리 자신은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고 선포하였다. 에드워드의 6세의 모든 종교적인 법안을 폐기시켰으며, 헨리 8세 시절의 반-교황적인 법을 무효화 시켰다.영국 교회의 수장으로서 메리 1세는 중세적인 예배 전통을 그대로 복구하였으며, 미사를 다시금 실시하였다.
메리 1세는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와 결혼하였다. 그와 동시에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이 속속 복귀하였으며, 교황청 사절이 공식적으로 다시 파견되었다. 교황청 사절은 순종법을 발동시킴과 동시에 이단 규제법도 발동시켰다. 이 때부터 개신교도들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메리 1세는 피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을 처형하였으며, 불운한 삶을 살았던 여인이다.
4) 엘리자베스 1세의 수습
엘리자베스 1세(1559년- 1603년)의 즉위 이전부터 영국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개신교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1559년 1월 15일 대관식을 거행하고서 왕위에 올랐으며, 1603년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영국 국교회를 개신교 쪽으로 이끌어 갔으나 어느 한 쪽으로도 과도하게 흐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교도들의 출현은 당연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여러 번의 반대를 물리치고서 4월 29일 여왕의 영국 교회 지존법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해서 모든 성직은 여왕에 종속되었다. 이 권한을 바탕으로 영국 교회 통일법을 통과시켰다. 그래서 성직자의 복장과 교회의 장식을 비롯한 모든 것을 통일시켰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63년 두 번째 의회 소집으로서 제 2차 통일령을 통과시켰는데 이번에는 훨씬 더 종교개혁을 강하게 추진하였으며, 많은 점에서 칼빈 유형의 개혁 교회 형태로 기울어져 갔다. 에드워드 6세의 42개 조항을 39개 조항으로 개정하였다.
그러나 1563년 두 번째 의회는 영국 국교회의 통일법을 가지고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청교도 측의 패배로 끝났다. 교황청은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시켰으며 여기에 맞선 엘리자베스 1세는 반 교황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585년 예수회 사람들을 영국에서 강제로 추방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무찌름으로서 교황권과 로마주의로부터 영국을 보호하였으며, 동시에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서 화려한 대영제국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 국교회 개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어느 하나도 버리지 아니했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국 국교회는 신학적으로는 칼빈주의를 따르지만 예배 모범과 교회조직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모범을 많이 반영한 복합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과격파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루터파, 개혁 교회파, 그리고 영국 국교회로 대별되는 3대 우파 종교개혁과 재세례파, 신령주의파, 그리고 반 삼위일체파로 이어지는 3대 좌파 종교개혁이 있다. 후자에 속하는 종교개혁을 흔히 과격파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전자에 대한 종교개혁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며, 성경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 뿐만 아니라 우파에게도 배척을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한시적인 운동에 불과했다고 말할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우파에서 볼 수 없는 신선함이 있었고 이들은 집단적인 공동체를 거점으로 해서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운동이었다는 점에 관심을 가져 본다.
1) 재세례파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종교개혁의 분파를 지칭하며, 유아세례를 받은 이는 재세례를 통해야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성경을 강조하고 원시 기독교로의 복귀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 무저항주의 및 천년왕국설을 역설했고, 교회와 국가 사이에 상호 긴장 관계 수립, 정치 참여 금지 등을 설교하여 국가를 신뢰하지 않았다.
재세례파의 주요 분파는 다음과 같다.
가. 스위스형제단
재세례파의 활동의 시작은 스위스로부터 일어났다. 콘라도 그레벨은 츠빙글리의 개혁안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형제단을 조직하여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그들은 예배와 신학과 교회 행정에 있어서는 초대교회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라는 용어를 배제하고 공동체라는 용어로 대체하였고, 찬송가도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고 반대하였다. 이들은 유아세례의 반대, 세속적인 직업 거부, 정치 참여 금지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다보니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 그리고 스위스의 개혁파들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모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려고 했다. 비폭력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죄 회개,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그리고 거듭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했다.
나. 뮌스터의 은거자들
멜키오프 호프만은 본래 루터파에 입문했다가 츠빙글리를 거쳐 재세례파로 옮겼다. 그는 초대교회의 영지주위에 가까운 이론을 가르쳤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론과 묵시적인 종말론을 가르쳤다. 그리고 예수는 슈트라크부르크에 재림해서 새 예루살렘을 건설한다고 하였다. 이런 소문이 네델란드까지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 당국은 멜기호프를 감금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를 처형하자 이제는 장소를 뮌스터로 옮겨서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설교하였다. 이렇게 전개되자 도시 밖의 재세례파들을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도시 내의 재세례파 종말론자는 로마 가톨릭 전통의 모든 유산들을 파괴하고 소각하고 도시 내의 비 재세례파 사람들을 축출하였다. 급기야는 전쟁으로 번져서 남자들의 죽음으로 일부다처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불만을 품은 내부 반동자들이 교황청군과 내통하고서 성문을 열어 주었으며, 결국 그들은 무참히 살해되어 갔다.
다. 메논파
메노 시몬니스는 네델란드 출신의 로마 가톨릭 사제로 일하다가 재세례파에 가담한 사람으로서 『기독교 교리의 기초』라는 일종의 변증서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과격파가 부르짖었던 칼, 일부다처제도 등을 반대하면서 재세례파의 새로운 신학을 정립하였다. 그래서 메논파라는 조직을 세우게 된다. 이들은 스위스형제단과 관점이 유사하며 원하는 자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교인들의 말씀 중심적인 훈련을 강조하였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연합을 상징하며, 불신자와는 결별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도록 했고 공직을 거부하게 했다. 특히 그리스도의 사랑과 고행을 실천하는 길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유아세례를 반대함으로서 재세례 금지법을 어겼으며, 자의적인 세례란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교회와 세상을 분리했다.
2) 신령주의자
아시시의 성(聖) 프란체스코로부터 종교개혁이 한창 무르익을 때까지 개인적인 영적생활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교권적인 기도문에 의한 형식적인 기도보다는 신과 직접적으로 영적인 교제를 바람으로서 자연적으로 반(反) 교회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종교개혁의 대원리인 성경과 은총과 믿음을 거부하고서 대중 속에 파고 들어서 조용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성경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에서 얻은 영감을 더욱 권위있는 것으로 보면서 기록된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오직 각 개인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나누는 영적인 교제를 가장 가치있게 보았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불필요한것으로 보므로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부인하는쪽으로 흐르기 쉽다. 어떤 면에서는 이들은 합리주의적인 면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로서 캐스타슈벵크펠트(1489년-1561년), 세바스티안 프랑크(1499년-1542년), 후안 데 발데스(1490년-1541년)등을 들수 있다 이들은 모두 체계적인 교권을 부인하는 사람들 이었다. 그리고 신비주의자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내면적인 영적인 교제는 언제나 가장 합리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마련 이었으므로 어떠한 면에서는 이들이 19세기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자유주의의 선구자라고 말할수 있다.
3) 반--삼위일체파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겠다고 처음부터 부르짖는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면에서 루터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와 예전을 부인하는것이 아니라 잘못 시행되고 있는면을 바로잡자고 외쳤을 뿐이다. 그런데 루터로 부터 시작된 개혁의 바람을 타고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기본교리를 부인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탈리아와 에스파냐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유럽의 자유지역이라고 할수 있는 폴란드, 모라비아 지역으로 도피하였다. 그리고 네델란드를 거쳐서 영국으로까지 퍼졌으며,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미국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이들의 신학적인 이론은 "라코비안 요리문답"을 통해서 알수 있다. 이들의 신학적 구조는 속죄론에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속죄설을 부인하는 틀안에서삼위일체를 부인한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을 반대하고 예수께서 도덕적인 스승으로 뛰어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신적인 능력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것보다는 도덕적 스승으로서의 예수의 삶의 모범을 따라서 거룩한 생활을 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배제 시켰기 때문에삼위일체론자가 아니라 일위일체론자 였다. 흔히 유니테리언이라고 부른다.
반-삼위일체론자들은 인격적으로 매우 존경할만한 사람들이었다. 높은 학식과 지식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도덕적으로 칭찬을 받을만 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전략시킴으로서 초대교회의 에비온주의를 다시 등장시킨 이단들 이었다. 다만 이들이 지금까지 존재할수 있었던 이유는 도덕적인 윤리관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기독교라고 부를수 없고 다만 기독교를 빙자한 도덕주의자들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반동
종교개혁은 단순하게 신앙적인 개혁에 그치지 않았다. 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온통 뒤바뀌어 버린 분기점이었다. 유럽의 각 나라들이 로마 교황청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었으며, 예술에 있어서도 인문주의와 더불어서 신앙적인 주제를 떠나서 인간을 중심으로 삼았으며, 과학에 있어서도 신앙적인 면에서 벗어나서 합리적인 요구를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종교개혁은 각 나라의 경제적 자립을 확보해 줌으로서 교황청의 재정적 압박과 더불어서 권위를 상실케 하였다.
교황청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해야만 했다. 이러한 절대적인 필요성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하였으며, 새롭게 조직된 예수회라는 종단의 창설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쇄신 운동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시도에 그쳤다. 그것은 개혁을 주도해야 할 교황이 교회 문제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세속 문제에 몰두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오스만 제국 등 이슬람 세력의 유럽 침공에 반격하기 위해 십자군을 조직해야 했고 유럽 각 나라들의 정치적 분쟁에 일일히 개입하여 중재해야만 했다.
게다가 1572년에 신성로마제국의 개신교를 신봉하는 용병들이 교황청령에 쳐들어 와 로마를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의 일로 가톨릭교회도 그에 따라 종교개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오히려 태도가 강경해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가톨릭 교회는 자유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던 1869년-1870년의 바티칸 제 1 차 공의회에서 더욱 더 보호망을 강하게 하였다가 1962년-1965년의 바티칸 제 2차 공의회에서 보호막을 벗어 버리고 개방을 허락함으로써 비로소 종교개혁에 도전장을 던졌다고 말할 수 있다.
1) 트리엔트 공의회
1545년 12월 13일에 교회 개혁을 수행하려는 강한 의지를 지닌 교황 바오로 3세의 주최 아래 트리엔트에서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18년 동안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는 세 시기 즉, 교황 바오로 3세 치세에 속하는 제 1기(1545년-1547년), 교황 율리오 3세가 속개한 제 2기(1551년-1552년), 교황 비오 4세 치세 때 열린 제 3기(1562년-1563년)로 구분된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목적은 이단들이 점차적으로 강성해 가는 것과 교회 내부의 부패상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주교들의 태만으로부터 야기되었다고 밝히며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교회의 증가하는 부패는 영적 이상의 상실, 교리 문제에 관한 신학적인 불명확성, 그리고교황청의 타락에 그 원인이 있었다. 따라서 회의에서 교회 개혁에 관한 중요 안건으로는 교회의 무능, 성직자 중임제, 그리고 감독 소홀 등 이었다. 교리 문제에 있어서는 불가타판 성경을 정경으로 재확인 하였다.
그런데 1552년 1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주선으로 회의장에 도착한 개신교측 사절들은 새로운 공의회 소집, 이미 결의된 신앙 교리의 취소, 교황 수위권 거부, 공의회 우위사상의 인정과 같은 무리한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게다가 루터교를 신봉하는 독일인 기사들이 갑자기 회의장 안으로 난입해 난동을 일으키자 교황은 공의회를 서둘러 중단하였고 더 이상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의 대화는 있을 수 없게 되었으며 기독교 세계의 분열만 두드러졌다.
2) 예수회의 창설
이냐시오 로욜라는 피레네 산맥에 접한 로욜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문의 출세와 명예를 위하여 일찍부터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하고나서 그는 성경과 여러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영적 지도자로서의 꿈을 끼웠다. 그리고 영성 훈련과 운둔 생활, 고행, 대학에서의 공부, 신학 공부를 하였다.
1541년 4월 14일 예수회는 이냐시오를 공식적인 대표자로 선출하고 4월 22일 새로운 수도회로 출발하였다. 예수회의 창설 목적은 분명했다. 헌장에서 밝히는 대로 종교 개혁으로 인해서 실추된 교황의 절대권 회복을 위해서 싸우는 군대 교단이 될 것과 해양 개척으로 인해서 발견된 신대륙에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을 전하는 선교 집단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붙인다면 학문을 발달시킴으로서 선교의 사명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군대적인 절대 복종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예수회는 그 설립 목적과 부합되게 전세계에 선교 활동을 펴나갔다. 이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유럽에서 개신교에게 빼앗긴 교회 영역을 유럽 밖의 선교에서 보충하였다. 세계 선교를 통해서 이름 그대로 보편 교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특히 예수회는 신앙의 토착화라는 새로운 선교 방법을 개발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 지방의 관습과 생활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고 원주민들과 의식주를 함께하면서 그들이 가톨릭 신앙을 올바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언어로 교리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였다.
3) 종교재판
한때 중세 유럽에 유행했었던 종교재판을 16세기에 자신들의 전제적 통치에 일대 위협을 느낀 교황청이 강경일로로 돌아서서 개신교 박멸의 수단으로 부활시켰다. 용의자로 지목되기만 하면 교황청에서 파견된 심문관의 철저한 고문으로 강요한 고백이 강요된 후 정죄되면 세속 정권에 의하여 형이 집행되었다. 재산 몰수, 투옥, 유배 및 사형 등의 형이 내려졌다. 교황 바오로 4세의 영도 아래 소위 '거룩한 이단심문소(Sanctum Officium Sanctissimae)'라 불리는 악명 높은 신앙교리성성이 모든 나라들의 종교재판 중심기관으로 설립되어 수많은 이단심문관들을 양성하여 전 유럽의 개신교 탄압의 기수로 삼았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처럼 이단으로 지목되고 박멸의 대상으로 곤욕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에서도 똑같이 가톨릭 교회 신자들과 자체 내부를 향해 종교재판을 자행하였다. 개신교에서 자행한 종교재판에서 비롯된 각종 고문형과 마녀사냥은 가톨릭 교회 이상으로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끝내면서
1517년 10월 31일을 계기로 일어난 북유럽의 이른바 종교개혁 운동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일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은 긍정적 시각에서 보는 이들도 있는 반면,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이들도 그에 못지 않게 많다. 물론 각자가 어떠한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견해는 충분히 다를 수가 있으며 종교개혁 역시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잔뜩 내포하고 있기에 확실하게 이렇다 하고 말하기에는 상당히 어렵다.
이들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위클리프, 후스를 위시한 신학적 도전은 중세 기독교의 기초에 균열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신비주의 개혁자들의 집단적 운동은 점차 하나의 범 시민 운동으로 번져서 교황청의 단일 체제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거기에다 교회의 위신은 교황청의 분열로 이어져 땅에 떨어졌으며, 교황청의 지나친 과세는 일반 시민들의 원망을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부조리는 16세기 유럽 대륙 중에서 독일의 경우가 제일 심했다. 또한 독일은 연방제이므로 교황의 세력이 왕권을 통하여 직접 미치기가 힘들었으며, 르네상스를 통한 인문주의의 영향이 지성인들 사이에 컸기 때문에 어느 곳보다도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늘날 루터의 개혁운동을 보다 폭넓은 동기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루터 개인의 입장에서는 종교적 관심에서 출발했던 교회 혁운동으로만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루터 자신은 어떻든 루터를 둘러싼 인물들의 동기는 결코 종교적 신념과는 큰 관계가 없고 정치적 동기가 더욱 강하게 작용했으며, 칼빈의 개혁은 경제적 동기가 주요한 동기가 되어 그의 개혁에 참여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영국의 청교도도 칼빈 계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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