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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5년 2월 3일, 안스카 별세, "북유럽의 사도(Apostle of the No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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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3일 “낌새조차 없는 문을 향하여 돌진”

오늘은 북유럽의 사도(Apostle of the North)로 불리는 안스카(앤스칼, 안스카르, 안스가리우스, Ansgarius)가 별세한 날입니다. 865년 2월 3일, 안스카는 그토록 소원하던 순교의 면류관을 쓰지 못하고 평화로이 눈을 감았습니다. 덴마크에서 사역하다 쫓겨난 안스카는 스웨덴으로 파송되어 가던 중 해적을 만나 약탈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스웨덴에서의 선교사역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황제와 교황이 선교의 업무를 관할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와 정치가 긴밀히 연관된 시대였던 것입니다. 선교사에게는 절대적인 복종이 요구되었고, 선교사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지방영주들을 물질로 포섭하는 것이었습니다. 안스카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안스카 선교사역에 힘입어 북유럽에는 12년 동안 로마 가톨릭이 융성할 수 있었습니다.

크게 기뻐한 황제는 안스카르를 함부르크의 대감독에 임명하고 그곳을 스칸디나비아의 복음화를 위한 그리스도교의 전초지로 삼고자 하였다. 안스카르는 스칸디나비아로 잠입할 기회를 기다려야만 했다. 나타나는 징조들은 좋지 않았다. 845년에는 함부르크가 바이킹족들에 의하여 불탔다. 848년에 브레멘(Bremen)의 대감독으로 임명된 안스카르는 외교적 노력을 끈기 있게 기울인 끝에 덴마크 왕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하여 슬레스비히(Slesvig)에 교회를 세울 수 있었으며, 얼마 후에는 서쪽 해안의 리베(Ribe)에도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작은 것들의 날」이었다……안스카르가 사망하자 그가 이룩한 모든 업적은 사실상 상실되고 말았다. 그의 후계자들은 스칸디나비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예언적 인물로서, 안스카르를 잊을 수 없는 것은 그가 이룩한 업적 때문이 아니고 열려진 낌새조차 없는 문을 향하여 돌진해 들어간 그의 끈기와 헌신 때문이며, 또 그가 잘 조직된 그리스도교 중심지를 마다하고 아직도 이교도들의 지역으로 남아있는 먼 지방으로 나아가 활동한 최초의 감독이었다는 점 때문이다.[Stephen Neil,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홍지모·오만규 역, 『기독교 선교사』 (서울: 성광문화사, 1979), 97-98.]

위대한 선교의 시대로 19세기를 꼽습니다. 윌리엄 캐리와 같은 수많은 헌신자들이 기꺼이 복음 들고 타문화권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로마가톨릭의 교권은 정치와 사회뿐만 아니라 선교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쳤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도 이방인들을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기쁘게 자원하여 남들이 가지 않는 길로 간 선교사 안스카와 같은 이들은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선교가 허용되지 않는 나라와 도시의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면서 말입니다. 아스카와 같은 선교의 정신이 보내는 자와 보냄 받은 자 모두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그(안스카)는 엄격한 금욕주의자였으며 그의 사역에 지장이 없는 범위 안에서 기도와 금식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수도사들은 언제나 노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도 바느질을 종종 하였다. 그는 중세의 다른 영적 지도자들처럼 많은 신비한 기적들을 체험하였으나 남에게 자랑하는 것도 칭찬을 받는 것도 싫어하였다. “가장 커다란 기적은 하나님이 우리 죄인들을 의롭게 해주신 것입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Ruth A. Tucker, From Jerusalem to Irian Jaya: A Biographical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박해근 역, 『선교사 열전』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0),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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