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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 “요단강과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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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 “요단강과 삼위일체”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누가복음 3:22)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세례 받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인과 동등됨을 입으시는 차원에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제 십자가를 향한 그분의 공적 사역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요단 강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납니다. 구속을 위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성자 하나님이 계십니다. 홍수가 그치고 아라랏 산에 멈춘 방주처럼, 구원의 방주이신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나오신 후 뭍에 서 계십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 성령께서 강림하십니다. 노아가 보낸 두 마리의 비둘기가 다시 돌아온 것처럼, 성자로부터 나오신 성령께서 성자에게 다시 임하십니다. 성부는 천상의 보좌에서 성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성부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 있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이사야 42:1).

우리는 본문을 통해 삼위일체 교리를 배웁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모든 기독교 교리들의 근간이 됩니다. 이 복된 교리는 철저히 성경에 근거하여 학습해야 합니다.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이 교리를 배우는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무릎 꿇은 자세가 이 교리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 교리에 접근하면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삼위일체 교리가 기독교 신앙의 가장 독특한 교리라는 것에는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입니다……저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강조하지 않는 현상이 편안하고자 하는 바람, 경험에 안주하는 경향, 지적인 수고를 요구하는 일은 무엇이나 회피하려는 경향 등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게으름의 또 다른 예가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삼위일체 교리를 소홀히 대했다면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모든 교리 중 가장 고귀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 우리에게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신 것들 중 가장 놀라운 것입니다……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오직 한 가지뿐인데, 그것은 우리가 성경에 계시된 신비 앞에 서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신비를 이해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그것을 파악하리라고 바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을 완전히 초월합니다. 우리는 그저 경이와, 경외감과 예배함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놀랄 뿐입니다.[D. M. Lloyd Jones, God the Father, God the Son, 임범진 역,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7), 154-55.]

벨직신앙고백서는 이 교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단 하나의 본질이신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믿으며, 그 안에 공유할 수 없는 고유성에 따라 실질적으로, 참으로, 그리고 영원히 구별되는 삼위,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이 계심을 믿습니다. 성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시작, 원인, 근원이십니다. 성자는 말씀과 지혜, 성부의 형상이십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는 영원한 권능과 능력이십니다.” 복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성부가 나를 지으셨고, 성자가 나를 구속하셨고,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는 복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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