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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 “왕의 마음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손”
오늘은 처음으로 서울에 발을 디딘 선교사 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맥클레이, Robert Samuel Maclay, 1824-1907)가 태어난 날입니다. 알렌이나 언더우드, 아펜젤러보다 빨리 서울에 도착하여 선교의 발판을 마련해 준 매클레이는 1824년 2월 7일,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1847년에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어 24년간을 그곳에서 선교하였습니다. 1873년부터는 미국감리교회 일본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매클레이는 일본에서 개화파 지도자 김옥균을 만납니다. 김옥균은 불교신자였습니다. 매클레이는 일본에서 세례 받고 성경을 번역하고 있던 이수정도 만나 조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당시 가우처 대학의 총장이었던 가우처(John F. Goucher)목사는 한미수호통상조약 소식을 전해 듣고 직접 선교헌금을 하며 한국선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1884년 1월, 가우처는 일본에 있는 매클레이에게 “한국을 방문하여 그 나라를 답사하고 선교부를 설치할 시간을 내실 수 있습니까?”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에 매클레이는 부인과 함께 1884년 6월에 방한하였습니다. 3개월 후, 알렌이 미국공사의 주치의 자격으로 내한했고, 이듬해 4월에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부부가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매클레이는 당시 정부의 고귀 관직에 있었던 김옥균을 통하여 한국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하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국왕에게 전하였다. 며칠 후 김옥균은 매클레이에게 국왕으로부터 회신이 왔는데 “임금님께서 지난밤에 나의 편지를 자세히 읽어 보시고 나의 요청대로 선교회가 한국에서 병원사업과 교육사업을 시작하기로 정하였다”고 말하였다……매클레이는 주한 미국 공사 푸트에게……선교 사역을 시작할 대지를 구매해 달라는 부탁을 해놓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上』 (서울: 쿰란출판사, 2012), 146.]
한국선교개척의 문을 연 매클레이 선교사는 당시 60세였습니다. 은퇴를 앞둔 선교사는 청년과 같은 열정으로 한국선교사를 모집하고 모금활동을 벌였으며, 후배 선교사들을 위한 터를 닦아주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교육과 의료에 있어 시급한 필요가 요구되던 시기였기에 매클레이의 전략은 아주 유효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요리문답의 중요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문답을 살펴봅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과 구원자로 영접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를 나눕니다.” 하나님의 일에 은퇴란 없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개척자의 정신으로 살기 원합니다. 주여, 다음 세대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뜨거운 심장을 주소서.
맥클레이 자신의 고백처럼 “이 같은 윤허는 주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강물처럼 왕의 마음이 주의 손”에 달려 있어 “주님은 그가 원하시는 곳 어디로든지 왕의 마음을 돌리신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일본으로 돌아간 맥클레이는 이수정에게 감리교교리문답을 한글로 번역하도록 부탁하여 아펜젤러가 일본에 도착할 무렵 1천부를 발행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한국선교를 준비했다.[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347.]
오늘은 처음으로 서울에 발을 디딘 선교사 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맥클레이, Robert Samuel Maclay, 1824-1907)가 태어난 날입니다. 알렌이나 언더우드, 아펜젤러보다 빨리 서울에 도착하여 선교의 발판을 마련해 준 매클레이는 1824년 2월 7일,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1847년에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어 24년간을 그곳에서 선교하였습니다. 1873년부터는 미국감리교회 일본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매클레이는 일본에서 개화파 지도자 김옥균을 만납니다. 김옥균은 불교신자였습니다. 매클레이는 일본에서 세례 받고 성경을 번역하고 있던 이수정도 만나 조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당시 가우처 대학의 총장이었던 가우처(John F. Goucher)목사는 한미수호통상조약 소식을 전해 듣고 직접 선교헌금을 하며 한국선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1884년 1월, 가우처는 일본에 있는 매클레이에게 “한국을 방문하여 그 나라를 답사하고 선교부를 설치할 시간을 내실 수 있습니까?”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에 매클레이는 부인과 함께 1884년 6월에 방한하였습니다. 3개월 후, 알렌이 미국공사의 주치의 자격으로 내한했고, 이듬해 4월에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부부가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매클레이는 당시 정부의 고귀 관직에 있었던 김옥균을 통하여 한국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하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국왕에게 전하였다. 며칠 후 김옥균은 매클레이에게 국왕으로부터 회신이 왔는데 “임금님께서 지난밤에 나의 편지를 자세히 읽어 보시고 나의 요청대로 선교회가 한국에서 병원사업과 교육사업을 시작하기로 정하였다”고 말하였다……매클레이는 주한 미국 공사 푸트에게……선교 사역을 시작할 대지를 구매해 달라는 부탁을 해놓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上』 (서울: 쿰란출판사, 2012), 146.]
한국선교개척의 문을 연 매클레이 선교사는 당시 60세였습니다. 은퇴를 앞둔 선교사는 청년과 같은 열정으로 한국선교사를 모집하고 모금활동을 벌였으며, 후배 선교사들을 위한 터를 닦아주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교육과 의료에 있어 시급한 필요가 요구되던 시기였기에 매클레이의 전략은 아주 유효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요리문답의 중요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문답을 살펴봅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과 구원자로 영접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를 나눕니다.” 하나님의 일에 은퇴란 없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개척자의 정신으로 살기 원합니다. 주여, 다음 세대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뜨거운 심장을 주소서.
맥클레이 자신의 고백처럼 “이 같은 윤허는 주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강물처럼 왕의 마음이 주의 손”에 달려 있어 “주님은 그가 원하시는 곳 어디로든지 왕의 마음을 돌리신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일본으로 돌아간 맥클레이는 이수정에게 감리교교리문답을 한글로 번역하도록 부탁하여 아펜젤러가 일본에 도착할 무렵 1천부를 발행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한국선교를 준비했다.[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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