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본카테고리

2월 16일 “죽음 앞에 허무한 탐심”

반응형

2월 16일 “죽음 앞에 허무한 탐심”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누가복음 12:19)

예수님께서 모든 탐심(every form of greed)을 물리칠 것을 말씀하십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은 영생에 조금도 기여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풍성한 소출을 얻은 한 부자의 비유를 들어 주십니다. 흡족한 부자는 곡식과 물건을 많아 쌓아 두기 위해 기존의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을 것을 계획합니다. 부자의 청사진은 완벽해 보입니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은 고생하며 일하지 않아도 풍족히 놀고먹을 수 있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농사에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탐심의 종의 되어 버린 부자는 자신의 밭에 비를 내려주시고, 자신의 곡식에 햇빛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이러한 부자를 어리석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모든 것을 가진 듯 기뻐했지만 주님과 함께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누가복음 12:20)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도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방 나라들을 어리석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거절하고 멋대로 살고자 하는 그들은 부자처럼 교만한 자입니다. 주께서는 부자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것처럼, 철막대기로 저들을 질그릇 깨뜨리듯 부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탐심을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눈이 멀지 않아야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편 2:4)

성경은 우리에게 명민히 생각할 것을 요구합니다. 죽음 앞에서 부자처럼 태연히 미소 지을 수 있는가? 기독교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답을 제시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위해 복음에 귀를 기울이라고, 회개하라고 말입니다. 주여,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하옵소서.

만일 누가 배가 고프면서도 아무런 이유 없이 식물을 거절한다면, 그를 어리석은 자라 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면 사람은 언제나 불만족을 느끼고 또 병적으로 되어 파괴된다. 철학자 니체(Nietzsche)는 하나님을 배척하고 기독교의 사랑의 도덕을 무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윈(Darwin)의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사상을 사회생활에 활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정신병자가 되어 비참한 운명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어리석은 주장을 고집하였던 까닭이다. 이런 무신론자는 벽(壁)을 문이라고 우기는 어리석은 자이다. 볼테르(Voltaire)는 회의주의(懷疑主義)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의 생애도 역시 뛰어나게 비참하였다. 그는 자기 생애에 대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 세상에 나지 하였다면”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인간은 하나님을 모심으로써 영혼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기 전에는 참된 행복과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없다. 로마 옥중에 갇히운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하였으니(빌 4:4), 참된 기쁨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다.[박윤선, 『성경주석: 시편』 (서울: 영음사, 1991), 142-43.]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