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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3년 3월 7일,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 프랑스 리용에 수감된 다섯 명의 젊은이들에게 편지를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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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 “복음 설교와 교리교육이 따스한 목양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오늘은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 프랑스 리용에 수감된 다섯 명의 젊은이들에게 편지를 보낸 날입니다. 1553년 3월 7일, 칼빈은 스위스 출신의 형제들을 편지로 격려했습니다. 이들은 리용을 잠시 방문 중이었는데, 개신교도라는 이유도 도시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던 리용에는 제네바 출신의 개혁파 목사들이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시정부는 이들의 공개적인 설교를 막았으나 1551년, 종교개혁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은 시편찬송을 부르며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다섯 명의 수감자들은 이러한 갈등 상황 속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이들에 대한 항소가 기각되자, 칼빈은 목자의 마음으로 위로했습니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넣어 두신 확신을 누구도 흔들 수 없다는 점입니다.”……“여러분도 연약함 때문에 드는 회의에 속수무책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섬기는 하나님은 성령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붙들어 주시고, 은혜로 모든 유혹을 이기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W. Robert Godfrey, John Calvin: Pilgrim and Pastor, 김석원 역, 『칼빈: 순례자와 목회자』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9), 220.]

칼빈은 수감된 이들이 두려움과 의심, 유혹들을 이겨내길 원했습니다. 그는 몇 번의 편지를 더 보냈고 성경읽기와 기도로 시련을 극복해낼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들은 시편 찬송을 부르며 불 속에서 순교했습니다. 칼빈은 냉혹한 교조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서신과 설교를 통해 유럽 전역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했습니다. 추방된 칼빈이 27살에 『기독교강요』를 저술한 이유는 조국 프랑스에서 핍박받는 프로테스탄트들을 변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출판된 책을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했습니다. 복음 설교와 교리교육이 따스한 목양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열매는 맺히지 않습니다. 주여, 우는 자들과 함께 울게 하옵소서.

“사악한 사람들의 격노가 당신의 영토에서 너무나 멀리 파급되었기 때문에 건전한 교리가 발붙일 장소가 없게 되었습니다……가련한 교회는 잔인한 살육에 의해 피폐되거나, 혹은 추방을 당해 유배 중에 있거나, 혹은 협박과 공갈에 압도당하여 감히 입도 열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경건한 자들은 광분해서 이미 기울어가고 있는 벽을 강타하고, 그들이 악착같이 추구하고 있는 박멸 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우리의 주장을 전체적으로 간단히 검토해 보시고 만일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기’(딤전 4:10) 때문이며,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요 17:3)임을 믿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당신이 분명히 발견하실 수 없거든 우리를 사악한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사악한 자들로 여기십시오. 이러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곤장을 맞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을 조롱을 당하면서 끌려 다니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추방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을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을 도망을 다녀야만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가난에 찌들리고 무서운 저주를 받고 중상모략을 받기도 하고, 가장 치욕스러운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원광연 역, 『기독교 강요(최종판(상)』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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