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5일 “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
오늘은 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이 태어난 날입니다. 1864년 3월 25일, 이승훈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상투를 자르고는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설립했습니다. 우국충정(憂國衷情)과 후손교육에 대한 도산의 메시지에 감동과 도전을 받은 것입니다. 1910년 9월, 한일합방의 서글픔을 가슴에 안은 이승훈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됩니다. 한석진은 조사시절부터 담대한 전도자였으며,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이기도 합니다. 이승훈은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듣고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은 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며, 이듬해에는 장로로 세워졌습니다.
남강은 '105인 사건'과 '3·1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바람에 세 번에 걸쳐 9년간의 옥살이를 겪는 등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조만식과 함께 오산학교를 민족의 지도자를 기르는 학교로 발전시켰다. 오산학교는 일본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교육을 하였으며, 1919년에는 강제 폐교를 당하는 등 어려움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부활의 행진을 계속하였다. 학교 설립 초창기에는 춘원 이광수가 교사로 근무하면서 행정의 틀을 잡았고, 민족 사학자 신채호,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작가 염상섭도 교사로 근무하였다……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하여……‘독립선언문’에 서명을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3년 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61세 때는 민족 신문인 동아일보 4대 사장을 맡아 친일파들에 맞서 민족 언론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박은배, 『하나님의 거처』 (서울: 새로운사람들, 2009), 172-73,]
이승훈은 출생 후 8개월 만에 어머니를 잃었고, 열 살이 되었을 때에는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를 여의었습니다. 할머니를 잃고 두 달 만에 아버지까지 잃은 이승훈은 고생 끝에 놋그릇 장사를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큰 실패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승훈은 데라우찌 총독 살해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무고하게 고문을 받았습니다. 일제는 러시아에서 배워온 고문기술을 이승훈을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에게 사용했습니다. 3ㆍ1운동 때 그가 설립한 오산학교는 일본 헌병대에 의해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연이은 고난 속에서 민족의 지도자들은 그 빛을 더욱 발했습니다. 역경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이겨낼 수 없는 힘이 내 속에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강한 속사람을 일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고난을 통해 단련되게 하소서.
1930년 이승훈의 제자들이……그의 동상을 세웠다……이승훈은 학생들을 동상 앞에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내일은 손님들이 많이 오실 터이므로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못할 것 같아서 여러분을 이렇게 모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무슨 일 조금 했다고 해서 여기 동상을 세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무엇을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똥을 먹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승훈은 평소에 학생들의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겨울엔 얼어붙은 똥이 튀는 바람에 입에까지 들어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튿날 제막식에서……이승훈은 답사에서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말했다. “제가 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시키셨을 뿐입니다.”[최현, 『한국 신앙의 거성』 (서울: 한국문서선교회, 2003), 3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