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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4월 6일, 이용도(李龍道, 1901-1933)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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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6일 “이용도(李龍道) 목사와 신비주의”

오늘은 이용도(李龍道, 1901-1933) 목사가 태어난 날입니다. 1901년 4월 6일, 이용도는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출생했습니다. 고학(苦學)을 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4회에 걸쳐 3년 여간 교도소 생활을 했던 이용도는 협성신학교 재학 중 폐병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요양 도중 눈물의 집회를 인도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했고, 졸업 후에는 금식기도와 축귀(逐鬼) 사건을 통해 담대한 부흥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이용도의 사경회는 간도와 평양에서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활동무대는 좁아지고 말았습니다.

1932년 가을, 이용도는 동해안 방면에 집회 인도차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원산을 통과하게 되었다. 거기에서……7-8명의 남녀와 기도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때 유명화의 입에서 “용도야, 너는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좀 더 충성하고 좀 더 고생을 당하여라.”라는 예언이 나왔다. 그러자 이용도는 울음을 터뜨리며 기도했다.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가식밖에 없었고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게으름과 대접받는 일밖에 없었나이다. 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눈물과 땀을 주시어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게 하옵소서.” 이 일이 발단이 되어 용도가 “접신녀(接神女)” 유명화를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항간에 퍼지게 되었다……이용도에 관한 유명화의 예언 중에 대표적인 것은 교회 분립에 관한 것이다. “용도야! 너는 조선 제일의 내 사자이니 너는 무병하다. 73세를 너와 함께하리라. 너는 내 교회를 따로 세워라. 이 놈 네가 교회를 분립하지 않으면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이냐.”[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2』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640-41.]

예수님을 사랑했던 이용도는 33세에 죽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지나치게 소위 예언하는 여인들을 신뢰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른다고 하면서 설교 없이 사경회를 인도하는 등 준비에 소홀했던 것은 하나님의 교회에 질서가 중요함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처사라 여겨집니다. 이용도 목사는 불 끄고 기도하는 것과 안수기도를 강조했는데 이는 당시 많은 비판을 많은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신비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비주의(神秘主義)에 빠지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합시다. 성령에 감동된 사람은 황홀경에 빠진 이와는 다르게 명확한 지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분별력을 잃지 않기 원합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가 한 번 기도를 시작하면 3일이고 일주일이고 무아의 지경에서 기도를 하였다. 사경회 기간 중 설교시간에 기도만 하고 끝나는 때도 있었다. 한국 교회에서 그의 기도를 따를 사람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다. 물질에 대해 추호의 탐심이 없었고, 새 두루마기를 길가의 거지에게 그대로 벗어 주고, 사경회에서 받은 거마비를 거지에게 봉투째 준 일이 비일지배하다. 장로교회의 송창근 목사가 미국 유학 여비가 없어 어려움을 당할 때 자기 집을 팔아 여비를 준 일화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청빈의 삶을 산 이용도의 삶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下』 (서울: 쿰란출판사, 2012),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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