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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안식일 계명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만일 누가 일곱이라는 수에 대한 이 해석을 너무 미묘하다고 해서 싫어한다면, 나는 더 간단히 생각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예컨대, 주께서는 하루를 정하셔서 백성이 율법의 지도하에 영적 안식을 끊임없이 명상하게 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또 일곱째 날을 제정하신 이유에 대해서도, 혹은 그 날로서 충분하리라고 보셨다고 하며, 혹은 자기가 하신 예를 보여 주심으로 백성을 더욱 잘 분발시키려 하셨다고 하며, 흑은 적어도 그들이 조물주를 본받게 하려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이 안식일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하셨다고 해석한다. 여기서 주로 제시된 신비를 우리의 수고를 영구히 쉰다는 점을 보존하기만 하면, 어느 해석을 취하든 간에 별로 차이가 없다. 예언자들은 유대인들이 이 점을 회상하게 만들며, 신체적 노동만 하지 않으면 의무를 완전히 다한 줄로 생각하지 않게 만들려고 반복 호소했다. 이미 인용한 구절 이외에 이사야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사 58:13-14).
그러나 주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이 폐지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실상이시므로 그가 계시는 곳에서는 모든 상징이 사라지며, 그가 본체이시므로, 그가 나타나실 때에 그림자는 버려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안식의 진정한 실현이시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으며, 그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한 목적은 그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살려는 것이다(롬 6:4-5).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다른 곳에서 안식일은(골 2:16)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한다(골 2:17).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는 실상의 바로 본체시며,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잘 설명했다. 이 일은 어느 하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할 때까지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있을 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날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을 철저히 피해야 한다.
32. 넷째 계명은 어느 정도까지 외적인 법규를 벗어나는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둘째와 셋째 이유들은 고대의 그림자로 돌릴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똑같이 적용된다. 안식일은 폐지되었으나, 우리는 여전히 ⑴ 일정한 날에 모여 말씀을 들으며 신비의 떡을 떼며 공중기도를 드려야 한다(참조, 행 2:42). 그리고 ⑵ 종들과 노동자들의 노고를 쉬게 해야 한다.815) 주께서 안식일을 명령하셨을 때에 이 두 가지 점을 고려하신 것은 틀림이 없다. 처음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만 봐도 증거가 많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둘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신 5:14-15). 또 출애굽기에서는,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숨을 돌리리라"고 한다(출 23:12). 이 두 가지 일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집회를 우리에게 명령하며, 우리는 일상 경험으로 모임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안다. 그러나 집회 제도와 일정한 날이 없으면 어떻게 이런 모임을 가질 수 있겠는가? 사도가 말하는 대로, 우리는 모든 일을 적절하게 하며 질서 있게 해야 한다(고전 14:40) 예정과 규정이 없이는 적절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으며, 따라서 교회가 즉시 혼란과 파멸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주께서 유대인들의 곤란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안식일을 제정하셨고, 우리도 같은 곤란을 느낀다면, 아무도 이 일이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지 말라. 우리의 지극히 천명하시고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일에 못지않게 우리에게 필요한 일에도 유의하셨던 것이다.
혹자는 우리가 날들의 구별을 일체 철폐하고 매일 모이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영적 지혜를 위해서는 매일 얼마만큼 시간을 배정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연약해서 매일 모일 수 없고, 사랑의 원칙이 그들에게서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무슨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정해 주신 질서에 순종하지 않을 것인가?
33. 우리는 왜 주일을 지키는가?
지금 침착하지 못한 사람들이 주일에 관해서 소동을 일으키므로,816) 나는 부득이 이 문제를 길게 논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날들을 지키기 때문에, 유대교의 정신을 받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날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들과 아주 다르기 때문에, 이 점에서 유대교를 초월한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장 엄격하고 신중한 의식으로서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며, 거기 영적 신비가 상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교회내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대책으로서 이용하는 것이다. 바울은 어느 누구도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며, 그것은 장차 올 일의 그림자라고 가르친다(골 2:17). 그래서 갈라디아 신자들이 아직도 날들을 지키니, 자기는 그들 사이에서 헛수고를 한 것이 아니냐고 염려한다(갈 4:10-11). 그리고 날을 서로 구별하는 것은 미신이라고, 로마 신자들에게 단언한다(롬 14:5).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사도가 어떻게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가를 어느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가 상대한 사람들은 지키는 목적을 사회 및 교회의 질서에 두지 않고, 영적인 일을 예시하는 것으로서 안식일을 보존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의 빛을 그만큼 흐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육체노동을 쉰 것은 육체노동이 거룩한 연구와 명상을 방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중히 그날을 지킴으로써 옛적에 권장된 신비적 의식들을 존중하노라고, 일종의 소심에서 오는 상상을 한다. 사도는 날에 대한 이 어리석은 구별을 비난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 사회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합법적 날짜 선택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그가 세운 교회들을 이 목적으로 안식일을 보존했다. 사도는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을 돕기 위한 기부금을 모으는 것도 그 날 하라고 지정했다(고전 16:2). 미신을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는 주일보다 유대인들의 성일들에 위험성이 더 많았다. 미신을 없앨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성일을 제쳐놓았고,817) 교회의 예절과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 목적을 위해서 다른 날을 제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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