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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빈, 『기독교 강요』2.8.56-59 스콜라 신학자들의 그릇된 논리,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권고가 아니라 계명임, 소죄의 구분의 부당함, 죄는 모두가 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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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복음적 권고 "원수를 갚지 말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들은 옛날에 모든 유대인에게 주셨고, 후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것인데, 스콜라학파는 이것을 복종해도 자유, 복종하지 않아도 자유인 "권면"으로 바꿔 버렸다. 이것은 얼마나 흉악한 무지 또는 악의인가! 그뿐 아니라, 그들은 이 "권면"에 복종하는 의무를 수도승들에게 지우고, 그들은 이 "권면"을 준수하겠다고 기꺼이 서약했으므로 이 한 가지 점에서는 단순한 신자들보다 더욱 의롭다고 한다. 이 계명들을 율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 무거운 짐이 되며, 특히 은총의 율법 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거운 짐인 것 같다는 것이다.839) 그들은 이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영원한 율법을 감히 폐지하려는 것인가? 율법책에 이런 구별을 어느 곳에 있는가? 도리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심히 엄격한 계명이 자주 나타나지 않는가? 배고픈 원수에게 먹을 것을 주며(잠 25:21),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바른 길에 데려다 주며, 원수의 짐승들이 짐이 너무 무겁거든 도와주라고 하는 것은(출 23:4-5) 어떤 계명인가? 원수의 짐승들을 도와주면서 원수 그 사람에게는 호의를 보이지 말 것인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신 주의 말씀은(히 10:30, 참조, 신 23:35) 영원하지 않은가? 다른 데서는 더욱 평이하게 표현하여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라"고 하셨다(레 19:18). 그들은 이런 말씀들을 율법에서 말소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 입법자시었다는 것을 인정하든지 해야 한다. 그리고 주께서는 단순히 권고하실 뿐이라는 거짓말을 버려야 할 것이다. 57.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참된 계명이다 네가 다음과 같이 묻노니, 그들이 감히 어리석은 해석으로 조롱한 이 발언들은 무슨 뜻인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눅 6:27-28, 마 5:44-45의 융합). 누가 여기서 크리소스톰과 함께, 이 발언들은 의무를 지우는 것이므로, 분명히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라고 결론짓지 않겠는가?840)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반열에서 배제된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그들은 수도승들만이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며, 수도승들만이 감히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와 같은 이론으로 추리한다면, 교회는 이방인과 세리의 무리로 인정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너희가 친구에게만 친절하다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이방인과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 했다(마 5:46-47, 눅 6:32, 마 18:17의 융합) 우리는 하늘나라의 유업을 상속받지 못할 것이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이라도 남으면 다행일 것이다. 어거스틴의 논법도 이에 못지않은 설득력이 있다. "주께서 우리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명령하실 때에는, 친구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원수의 아내도 건드리지 말라고 금하시는 것이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주의 명령은 친구의 것이든 원수의 것이든 일체의 도둑질을 허락하지 않는다.841) 바울은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이 두 계명을 사랑의 원칙에 관련시킨다. 참으로 그는 이 계명들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 포함시킨다(롬 13:9). 그러므로 바울이 틀림없이 율법을 잘못 해석했든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친구와 똑같이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는 결론이 그 계명에서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공통한 멍에를 벗어 버리는 방자한 자들은 스스로 사탄의 아들들임을 확실히 폭로한다. 그런데, 그들이 이 생각을 퍼뜨리는 것은 우둔하기 때문인가 또는 파렴치하기 때문인가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교부들 가운데는 이 말씀들이 참으로 계명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사람이 없다. 그레고리우스 때에도 이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강경히 주장하는 바와 같다. 이 말씀들이 계명이라는 것은 논의할 여지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842) 또 그들의 논법은 얼마나 미련한가!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리라고 한다! 그들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을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계명에 비교한다면 다른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나, 복수심을 송두리째 마음속에서 뽑아 버리라는 것이나 모두 쉽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이런 요구들은 율법의 가장 사소한 점까지도(참조, 마 5:18, 눅 16:17) 연약한 우리에게는 모두 곤란하다. 우리의 덕행은 주 안에서 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오며, 뜻하시는 것을 명령하시 옵소서."843) 은총의 율법 하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율법의 규례를 벗고 함부로 헤맨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 그의 은총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풀리며, 그의 영으로 우리의 마음에 율법이 새겨진다는 뜻이다(렘 31:33). 이 은총을 바울은 "법"이라고 부른다. 엄격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관련시켜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이 은총을 대조시킨 것이다(롬 8:2). 이 사람들은 "율법"이라는 말을 가지고 허무한 사색을 하고 있다. 58. 치명적인 죄와 가벼운 죄의 구별은 타당하지 않다 그들이 "소죄"라고 부르는 것은 첫째 판을 위반하는 비밀한 불경건이나, 마지막 계명을 직접 어기는 것 같은 것들이다. 그들의 정의를 보면, 소죄는 의식적인 찬동이 없는 욕망이며,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지 않는 욕망이라고 한다.844) 그러나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마음속에 없는 경우가 아니면, 소죄는 거기 침투할 수도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우리는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라"는 금지명령을 받았다. 우리의 마음이 불신의 간교한 술책에 압도되어 다른 곳을 둘러볼 때, 갑자기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고 싶어할 때 이런 순간적인 충동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가? 그것은 영혼 속에 어떤 빈곳이 있어서 이런 유혹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이 논의를 더 길게 끌 것 없이,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영혼의 모든 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율법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양심 속에 하나님 나라에 반대하는 원수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명령을 방해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좌가 우리의 양심 속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증명이 된다. 마지막 계명이 원래 여기 해당한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다.845) 어떤 욕망이 우리의 마음을 자극했다면, 우리는 이미 탐심이라는 죄를 범했고, 따라서 율법을 범한 자들이다. 주께서 금하시는 것은 타인에게 손해가 될 일을 결심하고 계획하는 것뿐 아니라, 탐심에 불이 붙어 타오르는 것도 금하신다. 주의 저주는 항상 율법 위반을 추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경미한 탐심이라도 사형 판결에서 면제할 근거가 없다. 어거스틴은 말한다. 죄의 경중을 달 때에는 "부정한 저울을 가져다가 우리 멋대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 생각에 따라 '이것은 무겁다, 이것은 가볍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울인 성경을 하나님의 창고에서 내듯이 해서 이 저울로 경중을 달아야 한다. 아니, 우리가 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미 달아 놓으신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846)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물론 바울이 죽음을 죄의 삯이라고 부르는 것은(롬 6:23) 이 타기할 구별을 그가 몰랐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너무도 위선으로 기울어졌으므로 결코 이 완화제를 붙여서 우리의태만한 양심을 위무해서는 안 된다. 59. 죄는 모두 치명적인 죄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잘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고 하신다(마 5:19). 율법에 대한 범행을 감히 가볍게 보아서 사형에 해당하지 않는 듯이 말하는 자들은 이런 무리들이 아닌가? 그들은 율법의 명령뿐 아니라, 누가 명령하시는가를 생각해야 마땅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율법에 대해서는 경미한 범행일지라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다. 그들은 무슨 일에서든지 하나님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을 사소한 일로 생각하는가? 율법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계시하셨다면, 율법에 위반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미약해서 사형이 즉시 따르지 않으리라고 공상하는가? 또 하나님에서는 이 점을 분명히 선언하셨다. 그들이 미련한 궤변으로 명백한 진리를 흐리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의 선언은 이것이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20). 방금847) 인용한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는 구절도 같은 뜻이다(롬 6:23). 그들은 부정할 수 없어서 죄라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대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기의 어리석은 생각에 너무 오래 빠져 있었으므로 적어도 한 번만은 현명해야 하리라. 그러나 만일 잠꼬대를 고집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작별하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는 모두 죽을죄라고 생각해야 한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역이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기 때문이다. 죄는 율법 위반이며, 여기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성도의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으나 그것은 그들의 성도로서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를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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