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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빈, 『기독교 강요』2.9.1-4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 백성들과 신약 성도들의 이해 -복음의 탁월성 -신약의 신자들에게도 약속이 남아 있음 -율법과 복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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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장 그리스도는 비록 율법을 통해 유대인들에게도 알려지셨으나, 마침내 복음을 통해서 상세하고 분명하게 계시되었다848)

 

(그리스도의 은총은 기대되며 천명되었다. 1-2)

 

1. 신약 사회의 이점

 

옛날에 하나님께서 화목과 희생의 속죄 의식과 여러 가지 제사를 통해서 자기가 아버지심을 증거하며849) 자기의 선택된 백성을 따로 세우기로 정하신 것은 허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의 완전한 광채가 나타나지만, 분명히 그 때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같은 형상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라기는 자기가 죽은 후에 예언자의 직책이 중단되겠으므로,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유의하며 열심히 율법을 계속 지키라고 명령한 후에, "의로운 해가 떠오르리라"고 선언했다(4:2). 이런 말로 그가 가르치려고 한 뜻은, 율법은 경건자들을 그리스도가 오시리라는 소망 가운데서 살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리스도 강림시에 그들은 훨씬 더 많은 밝은 광명을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이 구원에 대하여는‥‥‥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으며"(벧전 1:10), 그것이 이제 복음에 의해서 밝혀졌다고 한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고 한다(벧전 1:12). 이 일들을 가르치는 것이 고대 백성에게 불필요하며 예언자들 자신에게 무가치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시키신 그 보화를 그들은 아직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들이 증언한 그 은총이 바로 우리 눈앞에 놓여 있다. 그들은 조금 맛보았을 뿐이나, 우리는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모세가 자기를 증언했다고 선언 하시면서도(5:46), 우리가 유대인들보다 더 많이 받은 그 은총을 찬양하는 의미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으며 너희의 듣는 것을 듣는 귀는 복이 있도다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이것을 갈망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느니라"(10:23-24, 13:16-17의 융합). 하나님께서 보기 드물게 경건하던 저 거룩한 족장들 보다 우리를 더욱 돌보신다는 것은 복음의 계시에 대한 적지 않은 칭송이 된다. 이 생각과 잘 맞는 것이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의 날을 보고 기뻐했다는 구절이다(8:56). 아직 먼데 떨어져 있어서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좋은 일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확신했다. 그랬기 때문에 이 거룩한 족장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쁘게 살았다. 세례 요한이 한 말"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는 말은(1:18) 그리스도의 강림 이전에 죽은 경건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빛나는 지식과 광명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처지와 우리의 처지를 비교함으로써, 그들이 희미한 윤곽을 잠깐 엿본 그 신비들이 우리에게는 밝히 나타났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점을 분명히 설명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1:1-2). 지금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 그 독생자가(1:3) 옛날 유대인들에게 알려지셨다는 뜻이다. 이전에 그들이 해방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가 그들의 지도자였다고 한 바울의 견해를(참조, 고전 10:4) 우리는 다른 곳에서850) 인용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이,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라고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다"는 것은 사실이다(고후 4:6). 하나님이 이 자기의 형상 안에서 나타나셨을 때에, 이를테면 자기를 눈에 보이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희미하게 그림자 가운데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대낮인데도 보지 못 하는 자들의 배은망덕과 타락은 더욱 가증하고 비열하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의 마음을 사탄이 어둡게 해서, 사이를 가리우는 수건이 없이 복음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고후 3:14-15, 참조, 4:4).

 

2. 복음은 계시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비밀을 분명히 나타내는 것이 복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울이 복음을 "믿음의 교훈"(딤전 4:6)이라고 부르므로, 율법에서 하나님이 죄를 값없이 용서하심으로써 사람들과 화해하시겠다고 자주 약속하시는 것은 모두 복음의 일부분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바울은 공포심을 행위에서 구원을 찾을 때에 양심을 괴롭힐 공포심을 믿음과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이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해석할 때에는, 하나님이 옛날 족장들에게 베푸신 자비와 아버지 같은 호의에 대한 증언들도 복음에 포함된다. 그러나 더 높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은총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이다. 이 용법은 일반적으로 인정된 것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권위가 지지한다(4:17, 23, 9:35).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사실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옳다. 그리고 마가는 복음서의 머리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했다(1:1). 이렇게 충분히 알려진 일을 증명하기 위해서 많은 구절을 인용 할 필요는 없다.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복음으로서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취하시기까지 족장들이 죽음의 그림자 속에 싸여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에는 명예로운 특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복음은 새롭고 특별한 종류의 사절이며(참조, 고후 5:20),이 사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약속하신 일을 약속하신 진상이 아들에게서 실현되리라는 것을 실행하셨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아멘이 되느니라"(고후 1:20) 한 바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신자들은 체험한다. 이 약속들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참조, 고후 1:2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 전체를 그 육신으로 완전히 성취하셨으므로, 실재(實在)의 이 산 계시가 새롭고 특이한 찬양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셨다(1:51).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족장 야곱이 환상 중에 본 사닥다리를 암시하시는 듯하지만(28:12). 그의 강림이 얼마나 탁월한 일인가를 표시하시기 위해서, 그가 강림하심으로 인해서 하늘 문이 열리고 우리가 모두 하늘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에 대한 잘못에 대한 논박 : 세례 요한의 중간적 위치. 3-5)

 

3. 약속들이 우리에게는 철폐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르베투스의 악마적 공상을 경계해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은총의 위대함을 찬양하고자 하면서, 또는 그렇게 하는 체하면서, 약속도 율법과 동시에 끝난 것같이 약속을 전적으로 파기한다. 복음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모든 약속이 성취하는 데 참가하는 듯이 그는 말한다.851) 우리와 그리스도는 사이에 조금도 다르지 않은 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 전체에서 조금이라도 완성하시지 않은 것이 없다고 나는 방금 말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신 혜택들을 이미 지금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의 구원이 희망 속에 감취었느니라"고 한 바울의 말은(3:3, 참조, 8:24) 거짓말이던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즉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긴다는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요한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그를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비록 그리스도께서 복음에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것은 현재의 완전한 영적 혜택이지만, 그 혜택을 받아 즐기는 것은 항상 희망의 보호 하에 숨겨져 있어서, 우리가 썩을 육체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가신 분의 영광으로 변모할 때까지 이를 것이다. 그때가 오기까지는 약속을 믿으라고 성령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며, 성령의 권위를 믿는 우리는 저 불결한 개의 모든 짖음을 침묵시켜야 한다. 바울의 말대로 "경건은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딤전 4:8),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노라고 자랑한다(딤후 1:1). 또 다른 구절에서 우리는 옛날 거룩한 분들이 받은 것과 똑같은 약속을 받았다고 가르친다(고후 7:1; 참조, 고후 6:16-18). 끝으로 그는 우리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을(1:13) 최고의 행복으로 여긴다. 우리는 그 자신의 약속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에만 그를 받아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참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시지만(참조, 3:17). 동시에 "우리는 주와 따로 거하나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고후 5:5-7). 그러면 하늘 생명을 완전히 실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러나 믿음은 보이지 않는 좋은 일들을 보는 것이라고 하는(참조, 11:1) 이 두 가지 주장은 서로 잘 일치한다. 다만 우리는 약속들의 성격이나 특질에 있는 차이점, , 율법이 예표로 미리 암시한 것을 복음은 손가락으로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율법과 복음과의 대치가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이로써 또한 행위의 공로와 의가 값없이 전가해 주시는 의를 대립시켜서 율법과 복음을 항상 잘못 비교하는 사람들도 우리는 반박한다. 이 대립은 물론 버려서는 안 된다. 바울은 "율법"이라는 말로 의로운 생활의 표준을 의미하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표준에 의해서 자신의 것을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며,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살 소망을 전혀 주시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빗나가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더하신다고 한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약속된 보상을 받을 이만큼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전혀 없으므로, 우리는 다만 은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용서로 의로운 자로 인정된다는 것을 주장할 때다. 그러므로 바울이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를 대립시키는 것은 정당하다(3:21이하, 3:10이하, 기타).

 

그러나 복음은 다른 구원 방법을 제시할 이만큼 율법 전체를 폐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이 약속한 것을 모두 확인하며 실현했으며, 그림자에 실체를 주었다.852)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까지라"(16:16; 참조, 11:13)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율법의 종들이 피할 수 없는 저주를 족장들도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뜻은, 그들은 초보훈련을 받았을 뿐이며 복음의 높은 가르침보다 훨씬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복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자고 부르지만(1:16), 얼마 안 가서 복음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3:21)고 첨부한다. 그리고 같은 서간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침묵 중에 감취었던‥‥‥그 비밀의 계시"라고 하지만(16:25, 의역), 이 발언을 제한하는 설명을 붙여서, 그리스도는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알려지셨다"고 한다(16:26). 이것을 보고 우리는 추리한다. 율법 전체를 볼 때에 복음은 계시의 명백함이 율법보다 다를 뿐이라고.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며 밝히 나타난 은총이 헤아릴 수 없이 풍성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천국이 지상에 건설되었다고 말하며(참조, 12:28), 또 이 말에는 훌륭한 근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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