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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5월 12일, 경재(鏡齋) 김인전(金仁全)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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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일 “경재 김인전, 화해의 명수”

오늘은 경재(鏡齋) 김인전(金仁全) 이 별세한 날입니다. 1923년 5월 12일, 48세의 김인전은 상해 동인병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인은 과로로 알려져 있습니다. 충청남도 서천에서 태어나 부친의 영향으로 개화론자가 되었던 경재(鏡齋)는 1903년에 기독교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믿고 고향에 중등과정의 한영학교(韓英學校)를 세워직접 학생들에게 한문과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1910년에 평양신학교에 진학한 김인전은 졸업 후 전주 서문밖교회의 목사로 섬겼습니다. 그는 교역자이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1910년대 엄혹한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에서도 이같이 선생이 북돋아온 민족 독립운동의 역량은 3·1운동을 통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3·1운동 기간 중 군산에서는 3월 5일부터 여러 차례 선생의 지도를 받았던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세시위를 벌였다. 전주에서도 3월 13일 선생의 지도 아래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의 학생 및 교사, 그리고 기독교신자들이 천도교측과 합세하여 군중들을 이끌고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항일 독립의지를 불태웠다. 때문에 선생은 전라도 지방 만세 시위운동의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일경의 표적이 되었다. 이에 선생은 국내의 3·1운동 진상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한편,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해외 망명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망명지는 중국 상해로 결정하였다. 그것은 상해가 국제도시인 까닭에 3·1운동의 진상을 전파하기에 적합하고, 또 여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되어 독립운동을 지휘 통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3·1운동 직후 선생은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http://www.mpva.go.kr/open/open300_view.asp?ipp=10&id=17823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2014년 5월 12일 검색.]

1922년에 제4대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된 경재는 안창호의 평가처럼 “파벌과 계파를 초월한 참신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김인전은 국민대표회의의 소집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던 국민대표회의 준비위원회와 임시의정원 사이의 반목을 잘 중재했습니다. 정부는 1980년에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김인전 목사는 독립개신교회의 김홍전 박사와 사촌지간입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입법부와 행정부의 조화를 위해 뛴 경재의 정신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평화의 도구로 사는 것,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기 원합니다.

경재의 독립사상은 온건한 자유, 정의, 진리, 평등, 평화, 박애주의, 자강 사상의 체계화 속에서 개혁과 전진을 강조함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화해의 명수”로 알려진 그는 임시정부 내의 파벌과 정책대결이 있었을 때마다 이를 원만히 수습하여 극한적 쟁투나 대립 갈등 구조를 해소했던 일이 있었다. 목사로서 호소력 있는 논리정연한 정열적 설득에 따라 싸우던 동지도 감동 감복하여 조용하고도 평화로운 화해를 유지하면서 일사분란하게 광복정책 실현 속에 참여하여 발전적이고 균형 있는 항쟁 분위기를 잡아갔었다.[이현희, 『경재 김인전 목사의 나라사랑』 (서울: 동방도서, 2004),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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