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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빈, 『기독교강요』 , 2.9.5-2.10.5 세례 요한의 위치, [구약과 신약의 유사점] 문제의 제기, 세 가지 요점, 구약의 관심은 내세의 생명에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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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세례 요한

 

요한은 율법과 복음 사이에 서서 양쪽에 관계된 직책을 담당하였다. 이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며 죄를 씻기 위한 제물이라고 불러(1:29) 복음의 본질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부활에서 드디어 빛난, 비할 데 없는 권능과 영광은 밝히지 못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사도들과 동등하지 않다고 말하셨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큰 이가 없으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말씀하신 뜻은 여기 있었다(11:11).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사람들의 인품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요한을 모든 선지자들보다 앞에 세우신 다음에, 복음 전파를 최고의 지위에 올리시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데서 본 것과 같이, 이 복음 전파를 "천국"이라고 부르신다. 그런데, 요한은 자기가 선지자들보다 낮은 듯이 자기는 한 "소리"에 불과 하노라고 대답한다(1:23; 참조, 40:3). 이것은 겸손을 위장한 말이 아니며, 진정한 사절의 직책은 자기에게 맡겨지지 않았고, 말라기가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고 말한 대로(4:5), 자기는 선구자의 직책을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의 활동기간을 통해서 그가 한 일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제자들을 준비한 것뿐이다. 그는 심지어 이사야를 인용해서 하나님이 이 일을 자기에게 명령하셨다고 증명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그를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고 부르신다(5:35). 아직 완전한 대낮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여전히 복음 전파자로 여겨야 하는데 이는 그가 후에 사도들에게 위촉된 것과 같은 세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1:33). 그러나 요한이 시작한 일을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야 비로소 훨씬 자유롭게 완성해 나갔다.

 

10 장 구약과 신약 성경의 유사점

 

(구약성경의 언약은 신약성경의 언약과 실제로 같다. 1-6)

 

1. 문제

 

이미 말한 바에 의해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 곧 창세 이후로 하나님이 택하사 자기 백성 중에 가입시키신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되었으며, 그 언약을 맺게 한 율법과 교리는 현재 우리 사이에서 인정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853) 이점을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족장들은 우리와 같은 중보자의 은총에 의해서 같은 기업에 참여하며 동일한 구원을 바라보았지만, 이 교제에서 그들과 우리는 경우가 어느 정도로 다른가를 일종의 부록으로서 논하겠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수집한 증언들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경외와 경건에 관해서 어떤 다른 원칙이 있은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신구약의 차이점을 많이 논해서 단순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우리는 당연한 조치로서 이 문제를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논하는 몇 장을 특별히 마련해야 한다. 참으로 저 놀랄만한 불량배 세르베투스와 재세례파의 일부 미친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은 돼지 무리에 불과했다고 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매우 유익했을 일이 이제는 꼭 필요한 일이 되었다. 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상 생활에서 살찌우셨지만, 그들에게 하늘 영생에 대한 희망은 주시지 않았다고 그들은 지껄이기 때문이다.854) 그러면 이 악취 나는 오류에 경건한 사람들이 전염되지 않도록 하며, 동시에 신구약의차이점을 말할 때에 즉시 일어나는 난제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강림전에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과 그리스도 강림한 후에 우리들과 맺으신 언약이 얼마나 서로 같으며 또 얼마나 다른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일치되는 주요사항

 

한 마디로 두 가지 점을 다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족장들과 맺어진 언약과 우리와의 언약은 그 실질과 실상이 매우 동일하기 때문에, 사실상 이 둘이 하나다. 다만 처리 방법이 다르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히 말해서는 분명히 이해할 수 없으므로, 더 자세한 설명이 있어야만 논의에 전진이 있겠다. 그런데 신구약의 유사성이라기보다 그 동일성을 밝히려면, 이미 고찰한 세부를 검토할 필요는 없겠다. 다른 곳에서 논의 될 문제들을 여기서 뒤섞는 것도 합당치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세 가지 점을 주장해야겠다. 첫째로, 노력할 목표로서 유대인들에게 제시된 것은 육적인 번영과 행복이 아니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을 선택하셨을 때에 영생의 희망을 주셨고, 신탁(神託)과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 선택을 보증하시며 확인하셨다. 둘째로, 그들을 주에게 묶어 놓은 언약은 그들 자신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유지되었다. 셋째로, 그들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결합되며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리라고 믿었다. 둘째 점은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는지 모르므로, 적당한 곳에서855) 자세히 설명하겠다.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셨거나 약속하신 축복은 모두 오직 그의 선하심과 자비에서 왔다는 진리를 예언자들의 수많은 분명한 증언에 의해서 확증할 것이다. 셋째 점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곳에서 분명한 증거를 보였고, 첫째 점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지 않았다.

 

3. 구약은 미래를 기대한다

 

첫째 점이 특히 바로 눈앞의 문제에 관계된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의 논적들은 논란이 더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더욱 면밀히 주의해 보기로 하자. 그러나 우리가 하는 설명에 빠진 곳이 있을 때에는, 설명을 추진하면서 보충하든지, 또는 다른 적당한 곳에서 첨가하겠다. 사도는 확실히 이 세 가지 점에 관해서 우리의 의혹을 제거해 준다. "오래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성경에 복음을 미리 약속하시고," 지정된 때에 "그의 아들에 관하여"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사도는 말한다(1:2-3). 마찬가지로, 율법과 선지자들이 믿음으로 인한 의를 증언하며, 이것을 복음 자체가 가르친다고 한다(3:21). 물론, 복음은 사람의 심정을 현세의 기쁨에 국한하지 않고, 영생을 바라보는 경지로 들어올린다. 지상의 쾌락에 얽어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안식을 얻는 희망을 전언함으로써 이를테면 사람의 심정을 하늘로 옮겨간다. 이 점을 바울은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너희도‥‥‥복음을 듣고‥‥‥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1:13-14). ,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전에 복음 곧 진리의 말씀에서 들은 것이라"(1:4-5). 마찬가지로, "그는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4). 그러므로 복음을 "구원의 말씀"(13:26),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1:16), "천국"이라고 부른다(3:2, 13). 만일 복음의 교훈은 영적인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썩지 않는 생명을 얻게 한다면, 그 복음의 약속과 선포를 받은 사람들이 영혼의 일을 돌보지 않고856) 우둔한 짐승같이 육적인 쾌락을 추구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복음에 관한 약속은 율법서와 예언서에 인봉되었고 새로운 백성을 위해 있었던 것이라고857) 하는 패악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사도는 율법에 복음이 약속되었다고 말하고, 조금 후에 "무릇 율법에 있는 것은 특히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첨가한다(3:19 의역). 바울은 다른 것과 관련하여 이 말을 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율법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의례히 유대인에게 해당된다고 말할 때에, 그는 몇 절 앞에서 자기가 복음이 율법에서 약속되었다고 주장한 말을 잊은 것이 아니다(1:2; 참조, 3:21). 복음의 약속이 율법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함으로써 사도는 구약이 특히 내세(來世)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증명하는 것이다.

 

4. 구약에서도 의롭다 함은 오직 은총에서 그 타당성을 얻었다

 

같은 이유로, 구약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토대로 삼았으며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해서 확립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복음이 선포하는 것도 죄인이 자기의 공로와는 별도로 아버지 같은 하나님과 사랑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선언하는 데 불과하며, 그 전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요약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감히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분리할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 복음의 언약을 주셨다고 하며, 복음의 유일한 토대는 그리스도가 아닌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누가 감히 거저 얻는 구원의 선물에서 격리할858) 수 있는가? 분명한 문제를 길게 논의할 것 없이, 우리에게는 주의 유명한 말씀이 있다.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8:56).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에 관해서 증언하신 것을 사도는 신자들의 전반적 경험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13:8). 바울이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능이며, 이 권능을 신자들은 영원히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처녀 마리아와 사가랴의 노래에서도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구원을 전에 주께서 아브라함과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들이 나타난 것이라고 부른다(1:54-55, 72-73). 주께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심으로써 옛날 맹세를 실행하신 것이라면, 구약의 목적은 항상 그리스도와 영생에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859)

 

5. 언약의 비슷한 표징들

 

참으로 사도는 언약의 은총뿐 아니라 성례전의 의미에서도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를 동등하게 한다. 성경에 있는 대로,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한 형벌들을 사도가 예로 든 것은 고린도 신자들이 그와 같은 죄를 짓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래서 사도가 출발점으로 삼은 전제는 우리가 특권을 요구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벌을 받지 않겠다고 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우리와 같은 은혜를 베푸셨을 뿐 아니라, 은총을 나타내실 때에 같은 상징들을 쓰셨기 때문이라고 했다(참조, 고전 10:1-6,11).860) 그의 말뜻은 다음과 같다. "만약 그대들은 세례로 인치심을 받았고 매일 성찬에 참여하면서 세례와 성찬에는 놀라운 약속이 있으므로 그대들에게는 아무 위험도 없으리라고 믿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애를 경멸해서 방자한 행동을 한다면, 유대인들은 그런 상징이 없지 않았으면서도 주께서 그들을 엄격하게 처벌하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바다를 건넘으로써 세례를 받았고 뜨거운 태양을 가리워 준 구름 속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우리의 논적들은 바다를 건넌 것을 육적인 세례라고 부르면서,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의 영적 세례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인정된다면, 사도의 논법은 아무 효력이 없게 될 것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의 특권에 의해서 유대인들보다 자기들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설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곧 계속되는 발언도 논적들에게 트집을 잡힐 수 없다. "그들은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고전 10:3-4). 이것을 사도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한다.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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