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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시대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어떻게 읽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문학적인 분석
장르
희곡. 난외 여백에 화자가 누구인지를 명시함으로 이 책을 희곡으로 해석하려는 견해를 반영하는 번역본들이 있다(NIV). 그러나 본문은 희곡적인 해석에 대해서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사실 본문에서는 등장인물의 수를 파악하는 것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등장 인물이 둘이라고 생각하고(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어떤 이들은 셋(솔로몬, 술람미여인, 목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둘 이라고 할 경우 아가서는 솔로몬이 사악한 일부다처제와 복잡한 사랑놀음으로부터 떠나서 한 시골 처녀에 대한 일부일처제의 단순한 사랑으로 옮겨가는 것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 된다. 세명의 등장인물로 간주하는 경우는 본문을 사랑의 삼각관계의 틀로 보려한다. 이럴 경우 목동인 시골청년과 사랑에 빠져있는 술람미 여인에 대해서 뻔뻔하고 일부다처제적인 솔로몬은 탐욕적으로 술람미 여인을 납치했으나 술람미 여인은 여전히 헌신적이고 순수하게 목동을 향한 자신의 열렬한 사랑을 보존하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희극적인 방식은 매우 큰 난점을 가진다. 첫째, 문단들을 특정 등장인물들에게 확실하게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희곡이라는 것은 성경이나 고대 근동의 문헌들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는 이 책은 네러티브에서 보통 발견되는 특징들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넷째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사랑의 시들이 아가서와 흥미로운 유사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곡적인 접근방법은 뚜렷한 플롯적인 구조를 찾아낼 수 없으므로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사랑의 시. 이런 개념은 비교적 최근의 연구에 의해서 지지를 받는다. 특별히 이집트의 사랑의 시들간의 유사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아가서가 사랑의 시들을 느슨하게 연결시켜 놓은 모음집이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아마도 가장 좋은 결론은 아가서가 한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는 시들의 모음집이라고 보는 것이다.
알레고리적인 해석의 문제
알레고리적인 해석은 장르라고 말하기 보다는 하나의 해석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알레고리적인 방법은 오랜 세월동안 주도적인 해석 원리로 적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와 이스라엘 간의 사랑의 알레고리로 이해했으며, 기독교인들은 에수님과 교회간의 사랑을 알레고리화했다. 비록 결혼이라는 아주 흔한 은유가 아가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아가서에 나오는 인간의 육체에 대한 이미지들을 무시하는 알레고리적 접근 방법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실 아가서는 선정적인 표현들을 영적인 차원에서 해석하도록 해주는 단서들이 전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전통이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추구한 것은 초대 교회와 회당이 육체와 영혼에 대한 헬라주의적인 사고 방식의 영향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세에도 동일한 주류로서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흐름은 꺾였는데, 그 이유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사랑의 시들이 많이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최근의 연구들은 아가서의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배격하게 하며, 나아가서 아가서를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물인 남녀간의 사랑을 찬미하는 사랑의 시들의 모음집으로 보려는 해석으로 기울어졌다.
아가서는 인간의 경험에 대해서 성찰하고 있는 시이기 때문에 성경의 지혜 문학의 또 하나의 에임이 분명하다. 잠언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언약 관계에 대한 언급이 많지는 않지만, 정경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이 책은 성이라는 인간의 중요한 경험 영역에 대한 신적인 통찰과 가르침을 주고 있다.
역사적인 배경
가장 중요한 점은 아가서가 하나의 통일된 네러티브가 아니라, 노래들의 모음집이라는 점이다. 이 사실은 아가서가 모든 시대의 다른 저자들로부터 나온 시들의 모음집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열어 놓는다.
저작권과 관련해서 솔로몬의 역할이 주목된다. 솔로몬은 전치사 le에 의해서 제목과 연결되어 있다. 이 단어는 좀더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문맥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뜻을 확정짓는 것은 아주 어려운 실정이다. 우선은 솔로몬 저작권에 대한 무게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또 무시해선 안되는 것이 아가서 안에 있는 후기 연대의 증거들이다. 먼저 언어적인 특징들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언어학적인 논거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아람어의 영향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아람어도 히브리어만큼 오래된 언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후대로 저작연대를 미루는 것은 논거가 불충분하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열왕기서의 솔로몬과 아가서의 솔로몬을 연결짓는데 따르는 어려움이다. 때로는 솔로몬을 찬양하고, 때로는 솔로몬을 거부하는 내용이 모순적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솔로몬을 먼발치에 보게하는 경우들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표제에 나온 솔로몬에 대한 언급으로 솔로몬이 저자라는 교조주의적인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 아마도 솔로몬의 시대에 솔로몬의 저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이다.
신학적인 메시지
성은 하나의 우상이 되기도 했고, 또 반대로 극단적인 금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가서는 이 양편의 성에 대한 잘못을 고쳐주는 정경서이다. 아가서는 성이 선하고 유쾌한 것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그러나 아가서는 단순한 성에 대한 교과서 이상이다. 아가서는 성에 대한 성경신학적인 연구에 기여를 하고 있으며, 동산에서의 성관계로 말미암아 회복될 에덴 동산을 사모하게 만든다.
물론 아가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가서는 인간의 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이긴 하지만, 이 책은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 언약과 아주 유사한 관계를 백성들과 맺으셨고, 하나님은 결혼관계에서와 같이 배타적인 충성을 요구하신다.
신약으로의 접근
신약은 아가서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사용한다. 에베소서5:22-23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예수와 교회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가르친다. 결혼관계 속의 친밀성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친밀성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아가서를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관계에 대한 시로 읽는 것도 아가서가 원래 인간의 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음을 전제하는 한 괜찮은 것이다.
문학적인 분석
장르
희곡. 난외 여백에 화자가 누구인지를 명시함으로 이 책을 희곡으로 해석하려는 견해를 반영하는 번역본들이 있다(NIV). 그러나 본문은 희곡적인 해석에 대해서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사실 본문에서는 등장인물의 수를 파악하는 것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등장 인물이 둘이라고 생각하고(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어떤 이들은 셋(솔로몬, 술람미여인, 목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둘 이라고 할 경우 아가서는 솔로몬이 사악한 일부다처제와 복잡한 사랑놀음으로부터 떠나서 한 시골 처녀에 대한 일부일처제의 단순한 사랑으로 옮겨가는 것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 된다. 세명의 등장인물로 간주하는 경우는 본문을 사랑의 삼각관계의 틀로 보려한다. 이럴 경우 목동인 시골청년과 사랑에 빠져있는 술람미 여인에 대해서 뻔뻔하고 일부다처제적인 솔로몬은 탐욕적으로 술람미 여인을 납치했으나 술람미 여인은 여전히 헌신적이고 순수하게 목동을 향한 자신의 열렬한 사랑을 보존하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희극적인 방식은 매우 큰 난점을 가진다. 첫째, 문단들을 특정 등장인물들에게 확실하게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희곡이라는 것은 성경이나 고대 근동의 문헌들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는 이 책은 네러티브에서 보통 발견되는 특징들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넷째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사랑의 시들이 아가서와 흥미로운 유사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곡적인 접근방법은 뚜렷한 플롯적인 구조를 찾아낼 수 없으므로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사랑의 시. 이런 개념은 비교적 최근의 연구에 의해서 지지를 받는다. 특별히 이집트의 사랑의 시들간의 유사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아가서가 사랑의 시들을 느슨하게 연결시켜 놓은 모음집이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아마도 가장 좋은 결론은 아가서가 한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는 시들의 모음집이라고 보는 것이다.
알레고리적인 해석의 문제
알레고리적인 해석은 장르라고 말하기 보다는 하나의 해석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알레고리적인 방법은 오랜 세월동안 주도적인 해석 원리로 적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와 이스라엘 간의 사랑의 알레고리로 이해했으며, 기독교인들은 에수님과 교회간의 사랑을 알레고리화했다. 비록 결혼이라는 아주 흔한 은유가 아가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아가서에 나오는 인간의 육체에 대한 이미지들을 무시하는 알레고리적 접근 방법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실 아가서는 선정적인 표현들을 영적인 차원에서 해석하도록 해주는 단서들이 전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전통이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추구한 것은 초대 교회와 회당이 육체와 영혼에 대한 헬라주의적인 사고 방식의 영향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세에도 동일한 주류로서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흐름은 꺾였는데, 그 이유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사랑의 시들이 많이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최근의 연구들은 아가서의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배격하게 하며, 나아가서 아가서를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물인 남녀간의 사랑을 찬미하는 사랑의 시들의 모음집으로 보려는 해석으로 기울어졌다.
아가서는 인간의 경험에 대해서 성찰하고 있는 시이기 때문에 성경의 지혜 문학의 또 하나의 에임이 분명하다. 잠언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언약 관계에 대한 언급이 많지는 않지만, 정경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이 책은 성이라는 인간의 중요한 경험 영역에 대한 신적인 통찰과 가르침을 주고 있다.
역사적인 배경
가장 중요한 점은 아가서가 하나의 통일된 네러티브가 아니라, 노래들의 모음집이라는 점이다. 이 사실은 아가서가 모든 시대의 다른 저자들로부터 나온 시들의 모음집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열어 놓는다.
저작권과 관련해서 솔로몬의 역할이 주목된다. 솔로몬은 전치사 le에 의해서 제목과 연결되어 있다. 이 단어는 좀더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문맥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뜻을 확정짓는 것은 아주 어려운 실정이다. 우선은 솔로몬 저작권에 대한 무게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또 무시해선 안되는 것이 아가서 안에 있는 후기 연대의 증거들이다. 먼저 언어적인 특징들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언어학적인 논거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아람어의 영향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아람어도 히브리어만큼 오래된 언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후대로 저작연대를 미루는 것은 논거가 불충분하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열왕기서의 솔로몬과 아가서의 솔로몬을 연결짓는데 따르는 어려움이다. 때로는 솔로몬을 찬양하고, 때로는 솔로몬을 거부하는 내용이 모순적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솔로몬을 먼발치에 보게하는 경우들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표제에 나온 솔로몬에 대한 언급으로 솔로몬이 저자라는 교조주의적인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 아마도 솔로몬의 시대에 솔로몬의 저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이다.
신학적인 메시지
성은 하나의 우상이 되기도 했고, 또 반대로 극단적인 금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가서는 이 양편의 성에 대한 잘못을 고쳐주는 정경서이다. 아가서는 성이 선하고 유쾌한 것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그러나 아가서는 단순한 성에 대한 교과서 이상이다. 아가서는 성에 대한 성경신학적인 연구에 기여를 하고 있으며, 동산에서의 성관계로 말미암아 회복될 에덴 동산을 사모하게 만든다.
물론 아가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가서는 인간의 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이긴 하지만, 이 책은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 언약과 아주 유사한 관계를 백성들과 맺으셨고, 하나님은 결혼관계에서와 같이 배타적인 충성을 요구하신다.
신약으로의 접근
신약은 아가서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사용한다. 에베소서5:22-23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예수와 교회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가르친다. 결혼관계 속의 친밀성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친밀성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아가서를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관계에 대한 시로 읽는 것도 아가서가 원래 인간의 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음을 전제하는 한 괜찮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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