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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5월 19일, 애쉬벨 그린(Ashbel Green, 1762–1848)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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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 “애쉬벨 그린, 요리문답을 외우게 한 학장”

오늘은 애쉬벨 그린(Ashbel Green, 1762–1848)이 별세한 날입니다. 1848년 5월 19일, 미국의 장로교 신학자요 목사였던 그린은 85년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애쉬벨 그린은 필라델피아의 제 2장로교회에서 목회하던 중 프린스턴 대학교의 학장으로 부름 받게 됩니다. 이 무렵 찰스 핫지도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학교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반항적이었고, 졸업생들 중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학장 그린은 학교의 개혁을 위해 성경과 교리를 강조했습니다. 그린의 노력으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성경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종교학 교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이들에게 성경이 없는 것을 보고 새 학장 그린이 놀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핫지의 대학생활에 있어서 무엇보다 의의가 있었던 사건은 그의 회심, 즉 거듭남의 체험이었다. 프린스턴 대학의 초기 학장이었던 위더스푼이 대학생들의 공적처세를 올바로 할 것을 강조하고 스텐홉 스미스 학장이 학생들에게 과학탐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할 것 같으면, 아쉬벨 그린 학장은 조나단 에드워즈 초대 학장처럼 학생들의 경건생활(Piety life)을 강조하였다. 경건생활을 강조하는 한 방법으로 주일 오후에 실시하던 성경공부를 폐지하고 소요리문답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시키는 것을 의무화했다. 이 결과 1814년에서 1815년 사이에 대학에서 부흥이 일어났다. 핫지는 1815년 1월……신앙을 고백하였다. 당시 프린스턴 대학에는 105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 삼분의 이 이상의 학생들이 회심 체험을 가졌다.[홍치모, “찰스 핫지의 생애와 신학”, 길자연·강웅산 편저, 『찰스 핫지의 신학』 (서울: 솔로몬, 2009), 24.]

영적체험을 강조한 칼빈주의자 그린은 영적 진통 속에서 빈사(瀕死) 상태에 빠진 학교의 영적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애썼습니다. 신앙에 회의적인 학생들의 절망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영적인 대각성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 프린스턴 대학(당시 뉴저지 대학)에 부흥을 허락하셨습니다. 학생들은 회개했고, 기도회로 모였으며, 설교를 경청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학생들의 영적상태를 위해 고심하는 그린과 같은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지도자 말입니다.

나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그것을 목격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오기까지는 2년이라는 갈등의 시간을 거쳐야 했습니다. 정말 제가 겪은 어려움과 좌절감은 아무리 많은 세상적인 보상을 준다 해도 다시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모든 어려움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대가를 지불받았습니다……한 사람도 자기의 구원에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광경이……일어난 것입니다. 제가 개혁을 시도하는 데 있어서 처음으로 사용한 방식은 전 대학을 신앙으로 교육할 수 있는 조직으로 구성하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학생으로 하여금 자기 부모가 속해있는 교회나 교단의 교리 문답서를 다 외우도록 했으며, 그것을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암송하게 했습니다.[에쉬벨 그린 목사의 편지, William Buell Sprague, Lectures on Revivials of Religion, 서문강 역, 『참된 영적 부흥』 (서울: 이러세원, 2007), 549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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