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6일 “캔터베리의 어거스틴, 집단 개종”
오늘은 캔터베리의 어거스틴(Augustine of Canterbury)이 죽은 날입니다. 604년 5월 26일은 그의 사망일로 추정되는 날입니다. 로마가톨릭, 동방정교회, 성공회에서는 이날을 캔터베리의 어거스틴의 축일로 기념합니다.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 어거스틴은 영국에 로마 가톨릭 교회를 세우는 데 공헌한 인물입니다. 당시 영국에는 이미 켈트 선교사들이 들어와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레고리 1세(Gregory the Great, 540-604)는……선교정책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첫 번째 선교팀이 파송된 것도 그의 고집스런 추진력 때문이었다. 그레고리는 수도사로서 기독교 신앙을 로마제국 밖의 이방인들에게 전하기를 무척이나 소망했었다. 그러다 그가 로마의 감독이 되자 선교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했다……596년, 몇 번의 실패와 연기가 계속되다가 어거스틴(Augustine)과 일단의 수도사들이 영국으로 파송되었다. 어거스틴은 비록 신실하고 경건한 사람이기는 하였으나 선교단장의 임무를 잘해 내지는 못하였다.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가는 도중에 “그렇게 야만적이고, 잔인하고, 미신적인 국가를 위해 도저히 그 위험하고 지루하고 불안전한 여행을 계속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두려움은 근거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레고리는 다시 가야 한다고 명령하였다.[Ruth A. Tucker, From Jerusalem to Irian Jaya: A Biographical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박해근 역, 『선교사 열전』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0), 48.]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방법은 집단 개종(Mass Conversions)이었습니다.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만큼 중요했던 것은 정치적인 결탁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더 중요했을지 모릅니다. 교황은 힘이 있는 지도자였고, 선교사들은 그 힘을 등에 업고 사역했기 때문에 수천, 수만 명의 대량개종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물론 경건한 선교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집단개종은 결코 부흥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회심에 있어서는 정치적 압력이 아닌 복음 앞에서의 개인적 설복이 요구됩니다. 바른 열정에 걸맞은 바른 방법으로 전도하기 원합니다.
영국은 군소 왕국으로 분열되어 전쟁으로 날을 새고 있었으며 수많은 세월이 흘러간 다음에야 웨섹스(Wessex)의 왕 엑버어트(Egbert)가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지만 전적으로 야만적인 나라는 결코 아니었다. 선교사들이 상륙한 땅 켄트(Kent)의 왕 에텔버어트(Ethelbert)는 고올의 그리스도인 공주 베르타(Bertha)와 결혼하였다. 수도승들은 환대를 받았다. 사실 왕은 약간 불안해하고 있었으며 수도승들이 “감쪽같이 자기를 속여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요술에 익숙하지 못하면” 어느 집으로도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끝내 그는 자신의 수도 캔터베리에 거처를 정해 주었다. 어거스틴과 그의 친구들은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화상을 앞에 들고 임시기도 성일(Rogation Days)의 교송(交頌) 중의 한절을 부르면서 캔터베리로 들어갔다. “자비가 많으신 주님이여 당신의 거룩한 집 이 도성에서 진노와 격렬한 화염을 거두소서. 우리가 죄를 지었나이다. 할렐루야.” 오래지 않아 왕은 그들의 고결한 생활과 설교에 깊이 감동을 받아 개심하였으며, 그해 말에 어거스틴은 1만 명의 색슨존에게 세례를 베풀었다.[Stephen Neil,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홍치모·오만규 역, 『기독교 선교사』 (서울: 성광문화사, 1979), 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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