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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6월 23일, 윌리엄 매켄지(William John Meckenzie, 1861-1895)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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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3일 “매켄지, 한국을 제 2의 고향으로 삼고”

오늘은 윌리엄 매켄지(William John Meckenzie, 1861-1895)가 별세한 날입니다. 1895년 6월 23일, 캐나다 선교사 매켄지는 34살의 나이로 순직했습니다. 매켄지는 일사병으로 인해 고열과 정신착란으로 고통 받으며 자신의 어머니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남겼습니다. “예수님이 저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어머니,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아픕니다, 어머니.” 댈하우지 대학(Dalhousie College) 재학 중 시골지역 개척전도를 하던 매켄지는 조선에 대한 글을 읽고는 큰 감명을 받고 선교를 결심하게 됩니다. 그는 친구들이 모아준 쌈짓돈을 들고 온 독립선교사였습니다. 캐나다장로교회가 매켄지의 조선 선교사 파송 신청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매켄지는 황해도 소래(松川)에서 한국인처럼 생활하면서 서경조와 함께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캐나다 장로교회가 본격적으로 한국선교를 개시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1895년 6월 캐나다 장로교 제 9회 총회의 총대이며 매켄지를 개인적으로 후원하던 핼리팍스의 로버트 머레이 목사는 소래에서의 놀라운 선교 결실을 담은 매켄지의 감동 어린 편지를 받고, 제 9회 총회에 한국선교를 헌의하여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의 제안을 해외선교위원회 동양선교부에 이첩하여 연구 후 다음 총회에 보고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 매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소래교회를 대신하여 서경조가 매켄지에 대한 소래 교인들의 존경과 애정, 그와 같은 목사를 파송해 달라는 내용을 담은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편지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에 도착한 것이다……캐나다 장로교의 한국선교는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매켄지의 동향인 맥래는 “한국에서 자기의 생명을 바친 매켄지의 영웅적인 삶을 보고 너무도 큰 감동을 받았으므로 그의 뒤를 이어 한국에 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441-42.]

한국을 제 2의 고향으로 삼고 한국인들과 같이 살기를 원했던 매켄지는 언더우드의 부인이 성탄절을 맞아 서울에서 보낸 준 우유, 설탕, 케이크와 과일 통조림을 주민들에게 다 나눠 주었습니다. 그는 서양 음식에 대한 향수를 없애고자 일절 손대지 않았습니다. 매켄지는 지역 주민들에게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동학란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생활하고 밥에 김치를 먹으며 복음을 전했던 젊은 선교사의 삶은 소래 주민의 마음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역을 밝히는 빛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는 흐려지는 정신으로 마지막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어제 선편으로 서울에 가기를 결정하였다. 내일 누구 한 사람 오라고 전보를 쳤다. 잠을 들 수가 없다. 오늘은 심방객들을 오지 말라고 하였다. 나가지도 아니하겠다. 너무도 허약하다. 오늘 오후에는 전신이 추워진다. 의복과 더운 물주머니가 있어야겠다. 땀을 내야겠다. 조금 나은 것 같다. 죽음이 아니기를 바란다. 한국을 위하여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한국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다가 이렇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내가 조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 여행하고 밤이면 공기가 추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上』 (서울: 쿰란출판사, 2012),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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