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본카테고리

1874년 8월 15일, 강규찬(姜奎燦, 1874-1945) 출생,"나의 복음 증거 결과로 약 95명이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고 주님에 대한 믿음의 실체와 신실성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반응형

8월 15일 “강규찬, 경성 서대문 구치소 교회의 모범적인 세례교인들”


오늘은 강규찬(姜奎燦, 1874-1945)이 태어난 날입니다. 1874년 8월 15일, 강규찬은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공부한 강규찬은 이미 16세에 천문지리와 한시(漢詩)에서 탁월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1908년에 신성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정석해, 박형룡, 백낙준 등의 후학들을 키워냈습니다. 1911년에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양전백 등과 함께 투옥된 강규찬은 모진 고문 속에 허위 진술을 하고 말았습니다.

강규찬은 1911년 신성학교 교사 시절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어 취조를 받을 때 극심한 고문에 못 이겨 자신과 신성학교 동료 교사들 그리고 매큔 선교사마저 데라우치 총독 살해 음모에 가담했다고 허위 자백했다. 민족애와 애국심으로 불타면서도 무서운 일경의 취조와 극악한 고문에 못 이겨 그만 실수한 것이지만, 또 강규찬만 실수한 것도 아니지만 이것은 그의 생애에 큰 오점이었다. 하지만 강규찬은 자신의 실수를 생애의 거울로 삼고 하나님과 역사 앞에 서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그에게 역사 앞에 서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었다. 실수를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박용규, 『강규찬과 평양산정현교회』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2), 316.]

허위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일본 경찰이 행한 72가지 종류의 고문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출옥한 강규찬은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였고, 졸업 후 산정현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여 한국교회와 사회를 깨웠습니다. 그는 목회자이자 애국자로서,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다 붙잡혀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14개월 동안 7번 감방을 바꿀 때마다 강규찬은 복음전도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 냈습니다. 일경은 그를 죄수로 대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서대문 구치소의 목회자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광복절을 기념할 때, 민족과 교회를 가슴에 품고 좁은 길을 걸었던 강규찬의 생애도 잊지 맙시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고 있습니까?
 

여러 해 동안 나는……모든 동포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한국의 십삼도를 방문하게 허락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 좋은 길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그러한 오랜 여행을 하기에는, 특별히 나의 과체중을 가지고는 여행을 하기에 너무 늙고 약해졌다는 사실을 잘 아시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나를 경성 서대문 감옥에 집어넣으셨으며, 내가 2년 동안 그곳에 있었는데 주님은 13도 각 도로부터 감방동료를 보내 주셔서 내가 복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나의 복음 증거 결과로 약 95명이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고 주님에 대한 믿음의 실체와 신실성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들 중에서 나는 문답을 거쳐 몇 명을 학습교인으로 등록하였으며 6개월 혹은 그 이상이 지난 후 그들은 실제적인 영적 성장을 현시했습니다. 나는 그들 중 아홉 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시내 각 교회에서 이들을 정식 교인으로 받아 줄 것을 요청하는, 그들이 경성 서대문 구치소 교회의 모범적인 세례교인들임을 말해 주는 증서를 소지하게 했습니다![박용규, 『평양산정현교회』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6), 110-11. 소열도가 강규찬에게 들은 내용]

강규찬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