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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강독 "인간은 배은망덕하게 하나님께 반항한다/창조주와 피조물의 혼동/하나님의 본질을 다 꿰뚫어 보려고 하지 말고 그 하신 일을 보고 찬양해야 한다" [상]6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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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간은 배은망덕하게 하나님께 반항한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파렴치한 배은망덕이 드러난다. 인간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무수한 사역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공장과, 동시에 측량 할 수 없는 부요함이 넘쳐흐르는 창고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더욱 더 교만에 부풀어 스스로 잘난 체한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그들은 깨닫고 있다. 그들은 또한 각종의 많은 은사가 하나님의 관대하심에서 왔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운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이것들이 신성의 표시임을 그들은 알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들을 자기 안에 감추어 버리고 만다. 실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하나님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마음을 비추어 주는 것들을 땅에 묻어 버리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탈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 지상에는 많은 기괴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도말하기 위하여 인간성 안에 널리 뿌려져 있는 신성의 모든 씨앗을 그릇되게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영육에서 수백 번이라도 하나님을 발견함에도 불구하고, 이 탁월성 자체를 구실로 삼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 광란이야말로 얼마나 가증한 것인가? 그들은 인간이 우연히 동물과 구별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분을 "자연"으로 대치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을 삭제해 버린다. 그들은 극히 절묘한 하나님의 솜씨를 입과 눈에서부터 심지어는 발끝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각 지체 전체를 통하여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기서도 하나님을 자연으로 대치시킨다.220) 그러나 영혼의 신속한 운동, 그 탁월한 기능, 그 특수한 은사, 이러한 것들은 특히 쉽게 감춰질 수 없는 신성을 그 면전에 보여 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에피큐로스 학파는 키클로페스(Cyclopes)221) 같이 그러한 고귀성을 이용해서 더욱 더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 우주에는 이러한 특권이 없어서 인간이라고 하는 겨우 5척밖에 안 되는 버러지를 다스리기 위하여 하늘나라의 모든 지혜의 보화가 한 곳에 다 동원되었단 말인가? 첫째, 그 영혼 안에 육체의 각 부분과 부합하는 어떤 기관이 있다고 먼저 주장하는 것은 조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더 빛나게 하는 것이다. 에피큐로스로 하여금 다음의 질문에 답하게 하자. 곧 원자의 집합이 어떻게 식물과 음료를 분해하여 한 부분은 배설물로 다른 부분은 피로 변하게 하는가? 그리고 마치 많은 영혼이 상의하여 한 육체를 다스리기나 하는 것처럼 무엇이 각 지체로 하여금 열심히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가!

 

5. 창조주와 피조물의 혼동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런 돼지 떼와222) 같은 것에 대하여는 아무 관심도 없다. 오히려 해괴한 것들에 끌리어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리를 박탈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그 냉소적인 교설을223) 부정한 방법에 따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유기적인 여러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은 이것을 구실로 삼아 영혼을 육체에 구속시키고, 육체 없이는 영혼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하며 자연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최대한 억압한다.224) 그러나 영혼의 여러 능력이 지체를 돕는 기능에만 국한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천체를 관측하고 별의 수를 계산하며, 그 크기를 결정하고 별과 별 사이 거리를 알며, 그 운행의 신속함과 완만함을 알고, 궤도의 여러 모양의 기울기의 정도를 아는 일에 있어서 도대체 사람의 육체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실로 나는 천문학의 유용함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천체에 대한 이러한 깊은 연구에는 영혼과 육체의 유기적인 조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육체와는 구별된 영혼의 활동이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위에서 제시한 한 실례로 인해 독자들은 나머지 문제들도 쉽게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을 관찰하며, 과거와 미래를 결합시키며, 오래 전에 들은 것을 계속 기억에 담아 두며, 즐겨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생각해 낼 수 있는 영혼의 그 다방면의 민첩함 그리고 훌륭한 것들을 발명해 내며 많은 놀라운 발명품의 어머니인 영혼의 그 다방면의 교묘함 이러한 것들은 분명히 인간에게 신성이 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이다.225) 이 외에도 사람이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영혼이 여기 저기 배회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유익한 것들을 생각하며 여러 가지 문제를 추리하며 심지어는 미래의 일을 예시하기까지 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인간에게 심어져 있는 영혼 불멸의 흔적은 지워 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을 말해야 하겠는가? 그런데 신적 존재인 인간이 창조주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실로 우리가 받은 판단력에 따라 정과 사를 분별할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나라에 심판자가 없을 수 있겠는가? 수면 중에도 우리에게는 지능의 어떤 부분이 활동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깨어 계셔서 세계를 통치하지 않으신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자신을 그렇게 많은 예술과 유익한 것들의 창안자로 자처하면서 하나님은 그가 받으실 찬양을 빼앗겨도 좋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다른 근원으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주어 졌음을 경험이 풍부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더욱이 전 우주에 생명을 주는 것은 은밀한 영감이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이 더러 있는데 그들의 말은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불경스러운 것이다. 그들은 버질(Vergil)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를 좋아하고 있다.

 

최초에 한 영이 있어

 

하늘과 땅, 해면, 빛나는 달

 

그리고 타이탄의 별들을 부양한다.

 

이 영은 모든 부분에 고루 퍼져서

 

그 덩어리를 움직이며 또 그것과 융합한다.

 

이 영으로부터

 

인류, 짐승, 창공을 비상하는 날개 달린 아름다운 새들

 

그리고 유리같이 빛나는 대양 밑의 고기들이 나온다.

 

이 영은

 

만물에서 불의 열과 생명의 기원을

 

나오게 했다.226)

 

이 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장관(壯觀)으로 세워진 이 세계가 마치 그 자체의 창조주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시인은 다른 곳에서도 헬라 사람과 라틴 사람의 공통적인 견해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기 때문이다.

 

꿀벌은 하늘나라 마음의 한 부분

 

천상에서 어떤 힘을 발아 들인다.

 

그것은

 

신이 땅과 바다와 하늘

 

그리고 만물에 편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양과 소

 

사람, 짐승들이 태어날 때

 

실낱같은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만물이 그에게로 돌아가서 해소되고

 

또 회복된다. 다시는

 

죽음이 없다. 그러나 별 많은 하늘나라

 

높이 올라가 거기서 살리라.227)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그것을 움직인다는 우주정신에 대한 그 빈약한 사색이 인간의 마음에 경건을 일으키며 키우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사상은 또한 위와 같은 원리에서 연역해 낸 추악한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그 모독적인 시구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228) 이 시는 실로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하고 찬양해야 할 참되신 하나님을 몰아내기 위하여 영광적인 신격을 고안해 낸 것이다. 물론 경건한 마음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고 하면 자연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은 경건하게 말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 말은 귀에 거슬리며 부적당한 말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경건을 요하는 중대한 과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그 사역의 열등한 과정과 혼동하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다.229)

 

6. 창조주는 자신의 주() 되심을 창조에서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고찰 할 때마다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셔서 바로 이 분이 자연 전체를 주관하시며 우리들로 하여금 그를 바라보게 하시며, 우리의 신앙을 자기에게 향하게 하시며, 또한 자기에게 예배를 드리고 자기의 이름을 부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우리 안에 신적인 본성을 증거해 주는 그 놀라운 은사를 향유하면서도, 우리가 이 은사를 풍부하게 주신 창조주를 멸시하는 것처럼 더 불합리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권능은 얼마나 명백한 증거를 통하여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는가! 우리가 일부러 모르는 척하지 않는 한 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감추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무한히 거대한 이 천지를 지탱하신다. 때로는 단순한 그의 고갯짓 신호만으로도 천둥을 일으켜 하늘을 뒤흔들어 놓으시며, 번개로 모든 것을 뒤 흔들고, 불꽃으로 대기 전체를 태우신다. 때로는 여러 가지 폭풍우로 대지를 휘저어 놓으시며 그가 원하실 때에는 순식간에 그것들을 잔잔케 하신다. 그리고 파도가 높게 일어 계속 땅을 파멸할 것같이 보이는 큰 바다를 마치 공중에230) 매달려 있는 것처럼 그것을 견제하시며 때로는 심한 폭풍을 일으켜서 그것을 놀라운 방법으로 격동시켰다가는 다시 잔잔하게 하기도 하시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자연의 증거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찬양이 성경 여러 곳에서 기록되어 있지만, 특별히 욥기와 이사야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에 대하여는 고의적으로 생략하려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 근거하여 우주 창조를231) 논할 때 더 적절하게 소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여기서 제시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살아 계신 모습의 그 윤곽을 높게 추구하고, 낮게 추구하는 것이라면 교회에 속하는 사람이나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나 다 같이 하나님을 찾는 방법은 공통적이라는 사실이다.232) 하나님의 이 능력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원성을 생각하게 한다. 왜냐하면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분은 필연적으로 영원하시며 자존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처음에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보존하시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만일 그 유일한 이유라고 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데 충분히 남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선포한대로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자비를 넘치도록 받지 못한 자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145:9 참조).

 

7.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하나님의 사역의 제2의 종류, 곧 자연의 정상적인 과정 밖에서 일어나는 사역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증거는 모든 점에서 똑같이 명백하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사회를 다스리실 때 섭리를233) 잘 조절하셔서 무수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지만, 그러나 명백하고 일상적인 지시에 따라 경건한 자에게는 관대하심을, 악하고 범죄한 자에게는 엄격하심을 선언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흉악한 행위에 대하여 형벌로 보복하신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무죄자의 보호자요, 변호자이시며, 선한 사람들을 축복하셔서 그들의 생활이 번창하게 하시며, 그들의 궁핍함을 도우시며,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시며, 그들을 재난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그리고 이 모든 일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명백하게 보여 주신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자주 사악한 자와 행악 자가 일시적으로 벌을 받지 않은 채 날뛰도록 허용하시며 일시적으로 선한 사람들이 부당하게 많은 역경 속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심지어는 불경한 자들의 불법과 악의로 압박까지 받게 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하나님의 그 불변적인 의의 법칙을 흐리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오히려 이와는 달리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한 가지 죄를 벌하실 때 그의 진노를 명백히 하시는 것은 그가 모든 죄를 미워하신 바는 뜻이요, 그가 많은 죄악을 벌하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두는 것은 앞으로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때까지 그 형벌을 연기하신다는 뜻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기의 긍휼하심을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시기 위해 얼마나 풍부한 기회를 주셨던가! 곧 하나님께서는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비참한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은혜를 나누어주시고, 아버지의 사랑 이상의 것으로 그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셔서 그들의 행악을 산산이 부숴 버리지 않으셨는가!

 

8.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의 생활을 좌우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선지자는 절망적인 곤경에서 거의 멸망 직전에 빠져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갑자기 기적적으로 또는 예상 밖으로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상기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들을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여 마침내는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107:4-7), 궁핍하고 주린 자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시며(9), 사로잡힌 자들을 음침한 토굴과 쇠사슬에서 놓아주시며(10-16), 파선 당한 자들을 항구까지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며(23-30), 병으로 거의 죽게 된 자들을 고쳐 주시며(17-20), 뜨거운 열기와 한발로 땅을 태우기도 하시며, 은밀한 자비의 단비로 그 땅을 비옥하게도 하신다(33-38). 하나님은 가장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며 혹은 높은 자들을 그 위엄 있는 위치에서 떨어뜨리기도 하신다(39-41) 이러한 실례를 제시함으로써 선지자는 우연한 사건으로 간주되는 것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요, 특별히 그의 부성적인 사랑을 여러 모양으로 증거해 주는 것임을 보여 준다. 여기서부터 경건한 자들은 기쁨의 근거를 얻게 되고 불경자와 유기자(遺棄者)들은 그 입을 다물게 된다(42). 그러나 사람들은 대다수가 잘못에 빠져들어 그와 같은 눈부신 극장234) 안에 있으면서도 눈먼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신중히 고려한다는 것은 희귀하고도 특수한 지혜의 문제요(43), 그리고 다른 일에 있어서는 가장 예리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이를 생각하는 데는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그는 말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무리 찬란하게 빛날지라도 이를 참으로 보는 사람은 백사람 가운데 겨우 한사람235) 있을까말까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는 흑암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억제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불경자의 그 흉악함이 순식간에 정복되고, 그들의 오만함이 꺾이고, 그들의 강한 요새가 무너지며, 그들의 무기와 갑옷이 산산 조각나며, 그들의 힘이 무너지고, 그들의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고, 그들이 스스로 거꾸러질 때, 또 하늘 위에까지 높이 오른 그들의 뻔뻔스러움이 땅 한가운데에 내던져질 때 하나님의 권능은 그 자체를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 반면에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113:7), 눌린 자와 슬퍼하는 자를 궁지에서 구해 내시며, 절망자로 하여금 선한 소망을 다시 찾게 하시며, 소수이며 약한 비무장자가 많고 강한 무장자에게 승리할 때에도 또한 하나님의 권능은 명백하게 나타난다. 실로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것을 가장 적합한 때에 맞춰 처리하시고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모두 혼란하게 하시며(고전 1:20 참조), 그리고 "지혜 있는 아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고전 3:19,  5:13 참조) 하실 때, 그의 탁월성을 나타내신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최선의 방법으로 다스리시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9.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다 꿰뚫어 보려고 하지 말고 그 하신 일을 보고 찬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을 설명하며 주장하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기 위해 이 이상 더 장황하고 수고로운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위에서 닥치는 대로 말한 것들은 비록 적은 것이긴 하지만 눈으로 쉽게 분별할 수 있으며, 손으로 가려낼 수 있을 만큼 어디서나 분명하고 명백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상고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이 지식은 공허한 사색으로 만족하며 단순히 뇌리에서 맴도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지각하며 마음에 뿌리를 내리게만 한다면 반드시 건전한 것이 되며 풍성한 열매를 맺는 지식이다.236)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권능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므로, 그 능력을 우리 속에서 느끼며 그 은사를 우리가 향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지식을 통하여 한층 더 깊이 감동을 받아야 하고, 우리의 인식을 통해 파악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을 공상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완전한 방법이요 가장 적절한 순서는 다음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곧 하나님은 주의 깊게 탐색해야 할 분이기보다 경배 받으셔야 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친 호기심에서하나님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시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에서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며 친밀히 하시며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전달하신 그 사역에서 하나님을 숙고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권능으로 우리 각자 안에 거하시므로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17:27-28). 이러한 이유로 다윗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측량할 수 없는 것이라고 먼저 고백하고( 145:3), 곧 이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언급하면서 "나도 주의 광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 145:5-6,  40:5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특별히 하나님에 관한 탐구에 열중할 때 그것이 우리의 정신력을 감탄케 할뿐만 아니라, 우리를 깊이 감동시킨다는 것은 역시 당연한 일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이 말한 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압도당하여 하나님을 파악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새로워지기 위하여 그의 사역을 다시 소생해야 하는 것이다.237)

 

10.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목적

 

이러한 종류의 지식은 마땅히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자극시킬 뿐만 아니라, 내세의 소망을 갖도록 일깨우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238)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의 자비하심과 엄격하심에 대한 표본은 지금 막 시작되었을 뿐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도 의심 없이 이러한 표본이 위대한 사건들의 서곡이며, 따라서 이것의 완전히 드러남은 그 충분한 제시는 미래의 생활에까지 연기된다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경건한 사람이 불경한 자로부터 고통을 당하며 해를 받고, 중상으로 부끄러움을 당하며, 능욕과 비난으로 상처를 받는 것을 본다. 이와는 반대로 악한 자는 번영하며 부요하게 되고, 엄연히 안정을 누리고 조금도 벌을 받지 않고 지내는 것을 본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우리가 여기서 즉시 결론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분명히 이 세상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어서 거기서 불의는 벌을 받게 되고, 의는 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신자들이 자주 주님의 징계를 받는 것을 보게 될 때, 불경자들이 언젠가는 하나님의 형벌을 전혀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매우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 실로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유명한 말이다. "만일 공개적으로 형벌이 현재 모든 죄에 대하여 가해진다고 하면, 최후 심판에 남을 것은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어떠한 죄에 대하여도 공개적으로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없다고 믿을 것이다."239)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각 사역에서 특히 그 전체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그림에서처럼 실제로 표현됨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는 하나님을 알도록 초대되고 유인되며, 여기서부터 인류는 참되고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은 그가 하신 사역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 능력의 주요한 목적, 그 가치, 그리고 이에 대하여 우리가 숙고해야 할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 안에서 자신의 생명, 지혜, 능력을 보이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의, , 자비를 행사하셨는가를 깊이 생각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불신자들이 인류의 통치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그 심원한 계획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다윗이 그들의 우매함을 탄식한 바 있지만( 92:5-6),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는 우리들의 머리털 보다 많다고 말하였다( 40:12 참조). 그러나 이 논의는 후에 더 충분히 다루게 될 것이기 때문에240) 여기서는 이를 생략하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경배 드리지도 않기 때문에 마침내 미신과 혼란에 빠진다. 11-12)

 

11. 창조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증거가 우리에게는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역이라는 거울에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영원한 왕국을 아주 명백하게 보여 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그 명백한 증거들을 보면서도 점점 더 우둔하여져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구조와 질서에 대하여 말한다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거나 온 땅을 두루 바라볼 때 마음을 기울여 창조주를 기억하는 자가 우리 중 과연 몇이나 있는가? 오히려 창조주를 무시하고, 나태하게 앉아서 그의 사역을 바라다보고만 있지 않은가? 사실, 자연의 통상적인 과정 밖에서 매일같이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하여 말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로 지배를 받는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맹목적이며 무분별한 운명에241) 의하여 회전된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우리 중에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것들의 안내와 지도에 따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신성에 대한 개념을 경솔히 파악하고, 즉시 자신의 육적인 망상과 광란에 빠져 들어가서 마침내는 공허한 것으로 하나님의 순수한 진리를 부패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떤 점에서 서로 동일하지 않은 데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자신의 특수한 오류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괴하고 어리석은 것들을 위해서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을 버리는 데는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동일하다. 범인이나 둔한 자 뿐만 아니라 가장 탁월하고 다른 일에 있어서는 예리한 식별력을 가진 자라도 다 같이 이와 같은 질병에 걸려 있다.

 

이 점에 대하여 모든 철학자가 얼마나 그들의 우둔함과 어리석음을 여실하게 드러내었던가! 가장 미련한 자처럼 행한 다는 철학자들은 그만 두고라도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종교적이며 가장 신중했던 플라톤 역시 자신이 생각해 낸 둥근 구체(球體)242)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 사람들에게 길을 비추어 주는 것을 그 임무로 하는 지도적인 인물들도 이렇게 방황하고 비틀거리고 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그런 잘못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인간사의 통치가 너무도 명백하게 섭리를 증거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보고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만사가 생각 없는 운명의 의지에 의하여 뒤죽박죽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공허와 오류에 크게 기울어져 내가 항상 말하는 것은 가장 탁월한 사람에 대해서이지 하나님의 진리를 모독하는데 그 광기가 지나친 천박한 자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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