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일 “김동수, 김남수, 김영구, 김근식. 나라를 사랑했던 강화의 그리스도인들”
오늘은 김동수(金東秀), 김남수(金南秀), 김영구(金永九), 김근식(金根植)이 별세한 날입니다. 1907년 8월 21일, 이들은 일본 헌병대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이 일의 배경은 정미의병입니다. 정미의병은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일어났습니다. 일본군은 ‘강화의 바울’이라 불리던 이동휘의 의병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강화도에 투입되었습니다. 1903년에 강화도 진위대장에 임명된 이동휘는 국권을 회복하려면 국민을 계몽시켜야 하고, 계몽을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강화 잠두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권사가 된 후, ‘일동일교(一洞一校)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하나씩 세우자는 이 계몽운동에 ‘아브라함’이라 일컬어지던 강화읍교회의 권사 김동수도 동참했습니다. 이동휘의 체포로 민족주의 단체로 인식된 감리교회는 의병 색출 과정에서 희생을 치렀습니다. 23세의 김영구, 44세의 김남수, 45세의 김동수가 일진회원의 밀고로 체포되어 무고히 죽고 만 것입니다.
일본군은 김동수 권사 일행을 재판에 회부한다면서 끌고 나갔다. 재판을 받으려면 갑곶나루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가야 하는데 갑곶나루 남쪽 1킬로미터 쯤 되는 더리미 해안으로 끌고 가 후미진 곳에 이르러 살해하였다……명백한 증거도 없이 재판도 받지 못한 채 희생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흘린 피는 헛되지 않았다. 김동수 권사 삼형제의 희생을 계기로 강화 주민들 사이에 ‘기독교는 나라 사랑하는 종교’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그 결과 입교인들이 늘어나 1년 만에 30개 교회에 5천여 명 교인이 출석하게 되었다. 당시 강화와 인천 지방을 관리하던 데밍 선교사의 1908년 선교 보고에 이런 대목이 있다. “강화 사업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강화 교회는 독자적으로 장로사 한 사람이 주재하며 일을 보아야 할 정도로 커졌습니다.”[이덕주,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 (서울: 홍성사, 2006), 212-13.]
나라를 사랑했고, 불의를 지나치지 않았기에 죽음을 감수해야 했던 이들은 예수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던 성도였습니다. 무관심의 질병과 대안 없는 비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나는 이들의 죽음 앞에서 초라하게 서 있습니다. 저의 몫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여, 지혜와 힘을 주소서. 고통 받는 이웃을 돌아보게 하시고 병든 사회를 불쌍히 여기게 하소서.
김동수, 김영구, 김남수 및 김근식……모두가……기독교 청년들이었다. 그리하여 1907년 강화에서 일어난 의병운동과 관련하여 감리교 희생자가 나오게 되었다. 이 사실은 1908년 3월에 열린 미감리회 연회에서 데밍의 보고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강화에서는 우리 권사 중 하나인 김동수가 강화읍 교회의 다른 교인들과 함께 죄수 신분으로 서울에 압송되던 중 일본인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그들은 강화 군인들이 군대 해산 명령에 반대하여 일으킨 소요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재판을 받기 위해서 서울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희생된 김동수는 강화읍 교회 권사였다. 그리고 동생 김영구와 사촌동생 김남수도 강화읍교회 교인들이었다……김영구, 김남수 등은 독실한 신앙인이었는데……‘솔로몬’, ‘요셉’이란 교명(敎名)을 갖고 있을 정도였다.[서정민, 『이동휘와 기독교』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2007), 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