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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년 9월 3일,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 별세, 호국경(護國卿, Lord Prot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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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일 “올리버 크롬웰, 참된 종교적인 관용의 면에서 아버지와 같은 사람”

오늘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 별세한 날입니다. 1658년 9월 3일, 말라리아에 걸린 59세의 크롬웰은 런던의 화이트홀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크롬웰은 잉글랜드 동부 헌팅던(Huntingdon)에서 태어났고, 케임브리지 대학을 중퇴했습니다. 1628년에 하원의원이 된 크롬웰은 왕당파에 밀리는 의회파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1642년에 기병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는 엄격한 군기강을 확립했고, 『기독교 전사』,『병사의 요리 문답』과 같은 책들로 군인들을 격려했습니다. 또한 충분한 급여와 좋은 장비를 지급했습니다. 크롬웰의 지휘 아래 신모범군(New Model Army)은 찰스 1세의 왕당파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1653년, 크롬웰은 호국경(護國卿, 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올라, 5년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다스렸습니다.

참된 종교적인 관용의 면에서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다름 아닌 올리버 크롬웰이라는 점입니다. 그가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 했던 행동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관한 한 그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습니다. 장로교주의자들은 관용의 면에서 매우 인색했으며, 제 5 왕국파들과 다른 분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각각 자신이 가진 견해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투쟁했습니다. 반면 올리버 크롬웰은 이들의 모든 요구에 대해서 저항했으며,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도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든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그 나라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거할 수 있는 보호시설을 마련해 주기까지 했습니다.[Martyn Lloyd-Jones, From Puritanism to Nonconformity, 김효남 역, 『타협할 수 없는 진리』 (서울: 지평서원, 2010), 234-35.]

찰스 1세가 반대했던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크롬웰의 군대가 내전을 수행하는 기간 동안 열릴 수 있었습니다. 크롬웰은 자유의 투사, 독재자라는 대조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영국 의회 광장에 세워진 크롬웰의 동상은 잉글랜드에 세워졌던 최초의 공화국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의 영향 하에서 찰스 1세가 처형되었고, 2,000여 명의 아일랜드인들이 학살당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로마의 호민관처럼 호국경의 임무를 양심적으로 수행하려 했던 크롬웰이 죽고,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정이 복고되었습니다. 크롬웰은 국왕 살해의 죄목으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습니다. 정치 혁명에 실패한 청교도들은 다시 핍박의 자리로 내몰렸으나, 결코 설교와 가르침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합시다.

크롬웰은 생전에 자신의 역할을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는 모세’처럼 여겼다. 그는 잉글랜드인들이 이집트, 즉 스튜어트 왕조에 구속되어 있다가 국왕 처형으로 상징되는 홍해를 넘어 사막을 건너는 것으로 해석했다. 자신이 이끄는 군대의 승리로 보여 주는 하나님의 섭리는 불기둥과 같이 잉글랜드인들을 인도하고 있다. 크롬웰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동조하는 잉글랜드인들이 사막에서 저항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들의 팔을 틀어쥐고서라도 약속된 땅으로 이끌고 가야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도 끝내 모세처럼 약속된 땅을 보지 못했다.[이동희, 『역사를 바꾼 종교개혁가들』 (서울: 지식의 숲, 2013),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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