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9일 “김창식(金昌植), 조선의 바울”
오늘은 김창식(金昌植, 1857-1929) 목사가 별세한 날입니다. 1929년 1월 9일, 김창식은 해주 구세요양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선교사들이 영아를 잡아먹는다는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던 중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후 감리교 의료선교사 홀과 함께 평양선교를 돕다가 체포된 김창식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4년간 선교사들에게 신학교육을 받은 후, 김기범과 함께 감리교 목회자로 안수 받았습니다.
황해도 수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머슴살이로 전국을 떠돌다 서울에 정착한 김창식은 1888년 여름 유언비어가 극성을 부릴 때 그 소문을 듣고 흥분해 사실 규명 차원에서 선교사 올링거(F. Ohlinger)의 하인으로 ‘위장 취업’을 했다. 그는 위장 취업 2년 만에 선교사들의 활동에 감복해 개종을 결심하고 올링거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1901년 5월 14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미 감리회 조선선교회 연례회에서 ‘집사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써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2: 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서울: 인물과사상사, 2007), 95.]
김창식은 1924년 정년 은퇴하기까지 125개의 교회를 개척한 한국교회의 어른이었습니다. 30년 이상 해주, 수원, 영변 지방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그는, 사역하는 동안 건강을 지켜주시어 한 주일도 빠지지 않게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김창식 목사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의심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확신으로 바뀔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한국 최초의 교역자는 기댈만한 자국인 선배가 없었습니다. 신학교 선배는 물론이려니와 기도와 상담을 요청할 한국인 목사도 없었습니다. 외국 선교사들의 도움이 있었으나, 한국인 교역자로서 그가 겪었을 어려움과 외로움은 필설로 담기 어려울 것입니다. 처음 가는 길을 복음 들고 간 김창식의 정신이 오늘날 절실히 요구됩니다. 나 자신도, 외부의 인맥도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개척자의 정신으로 주님만 바라보게 하소서.
(김창식은)……48군데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선교사들은 그런 그에게 ‘조선의 바울’이라는 명칭을 붙여 주었다. 그는 한곳에 머물러 장기 목회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감리교 특유의 ‘순행’(巡行) 목회자였다. 열다섯 살에 집을 떠나 유랑생활을 하면서 얻은 길 지식이 목회에 도움이 된 것은 물론이다. 또한 어려서부터 몸에 익숙한 ‘밑바닥’ 생활 경험은 고행과 같은 농촌 목회에 큰 힘이 되었다. 머슴이었다가 한국 최초 목사가 되는 신분의 수직 상승을 경험하였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낮은 자’의 겸손과 순종을 잃지 않았다. 그가 처음 선교사 집에 소개받아 왔을 때, 주변 사람들이 “어이, 창식이, 창식이!”하며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선교사들은 그의 이름이 ‘김창식이’인 것으로 착각하고 영문으로 표기할 때, ‘i, y’(이) 자 하나를 더 넣었던 것이다. 김창식은 굳이 그것을 빼 달라고 하지 않았다. ‘낮은 자리’가 자신의 떠날 수 없는, 떠나서는 안 될 은혜의 자리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덕주,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 (서울: 홍성사, 2006), 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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