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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년 2월 9일, 존 후퍼(John Hooper, Johan Hoper) 순교, “비국교도의 아버지(father of nonconform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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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일 “비국교도의 아버지”

오늘은 “비국교도의 아버지(father of nonconformity)”라 일컬어지는 존 후퍼(John Hooper, Johan Hoper)가 순교한 날입니다. 1555년 2월 9일, 후퍼는 화형주에 묶였습니다. 에드워즈 6세가 죽고 로마가톨릭 신자였던 메리가 즉위하자 그는 런던으로 소환되었습니다.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후퍼는 도망가지 않고 성도들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는 제대로 된 변호도 해 보지 못한 채 약 18개월간 감옥(Fleet Prison)에 갇혔습니다. 감옥 안에는 하수도와 쓰레기 더미가 있었고, 후퍼는 질병에 노출되었습니다. 헨리 8세 통치기 때 츠빙글리와 불링거의 글을 읽으며 종교개혁 사상을 접한 후퍼는 1540년대 초에 영국을 떠나 망명생활을 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는 귀국하여 개혁 작업을 진행하던 중 교역자들의 무지함에 통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311명 중 10명은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못했고, 171명은 십계명을 외우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549년 5월,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자 후퍼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능력 있는 설교자였던 그는 금세 크랜머 대주교와 새로운 왕의 지지와 후원을 받으며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지닌 급진적인 개신교 관점 때문에 “영국의 츠빙글리”로 알려지게 되었다. 1550년 4월, 후퍼는 글로스터의 주교직을 제안 받았으나 거절했다. 성인들에게 맹세하고 중세의 예복을 입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후퍼는 그것을 미신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행위라고 묘사했다. 이 일은 ‘성직자 의복 논쟁’으로 알려진 것으로, 다른 주도적인 개혁주의자들과의 충돌을 일으켰다. 많은 사람이 후퍼에게 관점을 바꾸라고 설득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결국 후퍼는 플리트 감옥의 외로운 독방에 감금되고 말았다. 교식 통일령을 따르기를 거부했다는 것이 이유였다.[Andrew Atherstone, The Martyrs of Mary Tudor, 송용자 역 『순교자들과 떠나는 여행』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9), 49-50.]

후퍼는 주교직을 박탈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토요일 아침, 성모 마리아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화형장에서 후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집행인들은 후퍼의 다리 사이와 양팔 겨드랑이에 1파운드 가량의 화약가루를 넣은 주머니를 묶었습니다. 후퍼는 양 팔에 갈대 가지 다발을 끼운 채 화형주에 묶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45분간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었고, 장작들이 젖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 예수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입술이 타들어갈 때까지 순교자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생명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나의 고백의 진정성을 살피게 됩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만 영광 받으소서.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르자 양심의 문제로 고향을 떠났던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는데 그 가운데 후퍼도 끼어 있었다. 그의 가슴은 조국 사람들에게 복음을 외치려는 마음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떠나기 전에……때때로 그의 안부를 편지로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불링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러나 내가 편지로 보낼 수 없는 마지막 소식이 있습니다. 거기서 나는 가장 심한 고통을 받을 것이며, 불에 타서 재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당신에게 써 보낼 수 없는 마지막 소식이 될 테지만 당신은 내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Marie Gentert King ed., Foxe’s Book of Martyrs, 양은순 역, 『기독교 순교사화』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9), 27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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