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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2월 18일, 이노리교회가 이인재 전도사를 시무교역자로 청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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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8일 “반 거짓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출옥성도 이인재가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에 위치한 이노리교회에서 시무교역자로 목회를 하게 된 날입니다. 1940년 2월 18일, 교인 약 80명의 이노리교회는 이인재 전도사를 시무교역자로 청빙했습니다. 하지만 설교 중 신사참배 반대에 대해 말한 것이 꼬투리가 잡혀 한 달 만에 강제 사임을 당했습니다. 1906년에 경삼남도 밀양에서 태어난 이인재는 사춘기 시절 죄의 영향 아래 놓인 자신의 처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처녀를 보면 안아보고 싶은 생각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여인의 손목을 잡아보곤 했던 그는 자신에게 유혹을 물리칠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인재는 마산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면장 후보였지만 신사참배를 수용할 수 없어 면서기직을 내려놓았습니다. 1938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나 그해 가을 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인해 폐교를 결정했습니다. 그는 신사참배운동을 전개하다 투옥되었습니다.

만주 하얼빈에서 작성된 장로교 언약문서는 만주의 다른 지역뿐만 아니라 한국 내의 여러 신앙인들에게도 전해졌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은 이인재(1906-2000)였다. 그는 평양신학교 재학 중에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이때부터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특히 남한과 북한 두 지역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정보를 전달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이노리 교회를 목회하면서 반대운동에 참여하였고, 5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과 더불어 출옥하였다.[박응규, 『가장 한국적인 미국선교사 한부선 평전』 (서울: 그리심, 2004), 298-99.]

일본의 항복 후 평양형무소에서 출소한 이인재는 자신을 재판했던 판사 가마다(鎌田)를 찾아갔습니다. 예심판사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것을 해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판사가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일본의 국조(國祖)로 시인하느냐고 이인재에게 물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인재는 가마다가 일본에 가기 전에 꼭 그를 만나 천조대신은 신이 아님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인재 목사의 진솔한 고백은 종종 자기기만에 빠지는 내게 도전을 줍니다. 또한 출옥성도를 지나치게 영웅시하는 풍조에 일침을 가합니다.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은혜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주여, 진실하게 하소서.

‘하나님 용서하소서. 솔직하지 못하고 반 거짓말을 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이인재는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않기 위하여 감옥까지 왔는데 어찌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연약을 심히 통탄하였다. 조금 후 제5호실 점호시간이 왔다……이인재는 사실을 그 간수에게 고백하였다. “좀 전에 저 밥그릇 통로 문을 열었을 때 ‘누가 열었느냐?’했을 때 ‘내가 열었다’고 했습니다.”……“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그때 제가 ‘소제하기 위해 열었다’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는 맞은 감방에 주기철 목사님의 얼굴이 보고 싶어 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거짓말 한 것을 고백합니다.” 간수는 이인재를 바라보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무엇이 그게 중요하다고 지나간 것을 갖고…”[심군식, 『이인재 목사의 생애와 설교』 (서울: 영문, 1996), 10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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