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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년 3월 24일,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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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4일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오늘은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가 사망한 날입니다. 1603년 3월 24일, 44년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다스린 여왕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였습니다. 엘리자베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자신은 국가와 결혼했음을 밝혔습니다. 미국의 버지니아 주(Commonwealth of Virginia)는 식민지 개척 시대 때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따라 명명된 것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헨리 8세, 어머니는 앤 불린(Anne Boleyn)이었습니다. 헨리 8세는 전처(前妻)와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였고, 이것이 영국종교개혁의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엘리자베스는 열세 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간통죄로 고발되어 참수된 것입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복 언니 메리 튜더의 치하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메리 튜더가 사망할 때 영국의 왕위 계승권은 엘리자베스 외에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에게도 있었다……메리 스튜어트는 헨리 7세의 딸인 마가렛의 손녀가 아닌가! 그런데 메리 스튜어트의 종교가 가톨릭이었으므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왕권 신장을 위해서라도 스코틀랜드 왕정의 종교와 반대되는 개신교를 택함이 유리했던 것이다. 아울러 아버지인 헨리 8세도 그의 통치 말기에 개신교에 기울어졌고, 에드워드 6세도 개신교도였으며, 그녀의 어머니인 앤 볼린도 개신교도였으므로 엘리자베스가 개신교에 접근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영국내의 종교 전쟁을 원치 않았으므로 개신교도나 가톨릭교도들 모두에게 반감을 사지 않도록 처신하는 방법, 곧 헨리 8세가 실시했던 “교회 형식은 가톨릭, 교리는 개신교”를 채택했다. 이 방법은 개혁주의 청교도들이나 독실한 가톨릭교도들 모두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정준기, 『청교도 인물사』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6), 16.]

일반적으로 청교도운동은 엘리자베스가 통일령(Act of Uniformity)을 반포한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간주됩니다. 여왕은 자신을 영국 교회의 최고 통치자로 명명했고, 국민들에게 국교회의 기도서와 의식을 지킬 것을 강요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의 중용 정책에 만족하지 못했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비성경적인 전통으로부터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영국 청교도의 아버지(father of Puritanism)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와 같은 이들은 강단사역과 저술을 통해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깨웠습니다. “거룩한 불만”이 있는지 내 자신을 돌아봅니다. 현실에 만족하며 물에 술탄 듯 살고 있지는 않은지 성도로서의 내 자리를 살피게 됩니다. 개혁에의 의지가 꺾이지 않기 원합니다. 어려워도 끝까지 분투하는 작은 불꽃 되게 하소서.

청교도들은 정치권에서 엘리자베스 1세를 대항하지 못하였다. 이때부터……다른 방향으로 그들의 정력을 쏟아 부었다. 의회법을 통하여서 하향식으로 교회의 개혁을 성공시키지 못한 청교도들은 전에 없던 열정을 가지고 강단에서의 설교와 출판 및 개인적인 영향력을 통하여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아내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종교개혁을 추구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실제 청교도주의의 역사는 영적 성장과 영력에 관한 역사인 것이다.[Peter Lewis, The Genius of Puritanism, 서창원 역, 『청교도 목회와 설교』 (서울: 청교도신앙사, 199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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