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일 “클레르보의 버나드, 벌꿀 박사(Doctor Mellifluus)”
오늘은 클레르보의 버나드(베르나르 드 클레르보, Bernard of Clairvaux, 1090–1153)가 별세한 날입니다. 1153년 8월 20일, 버나드는 63년간 입었던 흙옷을 벗었습니다. 퐁텐느(Fontaines)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버나드는 1112년부터 수도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1115년에 대수도원장에 임명되어 60개 이상의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신비주의자이자 정치가, 신학자이자 수도사였던 버나드는 2차 십자군 원정을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최후의 교부(The Last of the Fathers)로 불릴 만큼 영적인 일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합법적인 교황 선출에 대한 자문을 담당하고, 속죄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주장한 아벨라르(Abelard)를 정죄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다음으로 루터에게 영향을 준 인물은 버나드였으며, 심지어 버나드를 루터의 영적 지도자요, 신학적 선생으로까지 일컫는다. 어쨌든 루터는 버나드를 전 생애를 걸쳐 변함없이 흠모했다……칼빈은 처음과는 다르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버나드에게 매료되었는데, 여러 판의 「기독교강요」가 이 차등적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버나드가 신학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라는 사실과 교회 개혁적 인물이라는 점이 칼빈에게 우선 호감으로 다가왔다. 버나드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본문 주석 자체에 치중한다는 사실에도 칼빈은 동질감을 느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성경 해석학적 차이가 있지만, 전혀 수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칼빈이 모든 점에서 버나드를 수용한 것은 아니었고, 때때로 비판적인 모습을 보인다.[주도홍, 『교회사 속의 설교자들』 (용인: 프리칭아카데미, 2010), 44.]
버나드의 설교와 글은 청자와 독자에게 달콤한 영적 진리를 선사했기 때문에, 그는 “벌꿀 박사(Doctor Mellifluus)”라고 일컬어지곤 합니다. 버나드는 은혜와 의지를 이해함에 있어서 개혁자들과 맥을 같이 합니다. 또한 속죄를 모범으로서가 아닌 칭의의 차원에서 이해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수도원은 봉건세가 아닌 노동으로 자급자족했고, 복잡한 의식 대신 간소한 절차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버나드를 비판적으로 읽으면서, 루터와 칼빈이 받았던 감흥을 느껴봅시다.
그는 우리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에 그의 사랑은 다정하다. 그는 모든 죄에 대해서 자유로우시기 때문에, 그의 사랑은 현명하다. 그리고 그의 사랑은 죽음을 견디는 지점까지 이르렀기에 강하다……육체를 취하시며 그는 나에게로 자기를 낮추셨다. 죄의 모든 얼룩으로부터 분리되어, 그는 그 자신의 신성을 보이셨다. 죽음에 내어지셔서 그의 아버지를 만족하게 하셨고, 그래서 당장 자신이 친구들 중 가장 친절하며 신뢰할만한 조언자요 능력 있는 조력자임을 나타내셨다. 나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나를 기꺼이 구원하셨고, 그 방법을 아셨고, 그것을 수행할 힘을 가지셨던 그분을 신뢰한다. 그분이 찾고 그분의 은총에 의해 부름 받은 영혼이 그에게로 올 때 그가 내쫓으시겠는가? 어떤 폭력도 어떤 기만도 나를 그의 손 밖으로 뽑아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그는 진실로 인간의 육체를 취하시고 죄의 외양을 취하셨다.[Ray C. Petry, ed., Late Medieval Mysticism, 류금주 역, 『기독교고전총서 12: 중세 후기 신비주의』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11), 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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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3년 8월 20일, 클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 별세, 나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나를 기꺼이 구원하셨고, 그 방법을 아셨고, 그것을 수행할 힘을 가지셨던 그분을 신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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