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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9월 2일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별세, 복음 들고 평양에 온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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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토마스 선교사,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 왔노라.”

오늘은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가 별세한 날입니다. 1866년 9월 2일, 토마스는 대동강 쑥섬에서 순교했습니다. 영국 웨일즈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는 런던대학에서 수학 후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중국에 도착했지만, 아내와 사별하고 맙니다. 토마스는 세관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던 중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서해안에서 두 달 반 동안 선교활동을 벌이고 돌아온 그는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를 타고 다시 조선으로 향했습니다. 무장한 상선인 이 배는 조선의 퇴거 요구를 무시한 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모래톱에 좌초되었습니다. 조선인들의 화공을 받아 배에 불이 붙자, 토마스 선교사는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붙잡혀 처형되었고, 시체는 토막 난 채 불태워졌습니다.

토마스를 죽인 병사는 그 성경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으며, 가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 죽인 것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홍포의(紅布衣)의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고 권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 왔노라.” 바로 그 병사가 중군 이익현을 구출한 박춘권이었다 한다. 중군을 구출한 그는 이후 셔먼 호 사건의 공으로 오위장(五衛將)이라는 직위를 얻었다. 그 후 그는 토마스 목사가 죽어 가면서 준 그 성경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으며 장대현 교회(널다리골 교회) 최초의 교인 중 한 명이 되었다.[나동광, 『한국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목사의 생애』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9), 93.]

토마스의 죽음을 놓고 논쟁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무역선의 통역관으로서 죽은 것입니까? 선교사로서 순교한 것입니까? 조선인들은 그를 총과 칼을 찬 무관으로 보았으나, 토마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개신교 선교사에 두었습니다. 그가 배에서 뛰어내릴 때, 그리고 사형 전까지 마지막으로 품에 안고 있는 성경책이 강력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건네 준 전도지 한 장, 성경책 한 권은 헛되이 버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와 무관심이 횡행한다 하여도, 복음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낼 것입니다. 주여, 믿음을 더하소서.

이때 군중 속에 열두 살 난 소년, 최치량(崔致良)이 있었는데, 그는 토마스 목사가 던져 준 성경 세 권을 주워 갖고 있다가 두려워 그 중 한 권을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에게 주었다. 그가 그 성경을 뜯어 벽지로 발라 쓴 것을 최치량이 후에 그의 집에 갔을 때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 박영식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다. 박춘권의 조가 이영태(李榮泰)가 박영식의 집에 왔다가 벽에 바른 성경을 읽고 감동하여 예수를 믿고 후에 평양 숭실전문을 졸업하고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레널즈(William Reynolds, 李訥瑞)의 조사(助事)가 되어 한국인 성서번역위원의 산 사람으로 큰 공헌을 하였다.[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上』 (서울: 쿰란출판사, 2012), 1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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